나도 에코이스트 성향이 있었구나
엄마와 언니는 내게 항상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에 공동운명체야"라고 했다.
내가 결혼을 준비하던 때에도 엄마와 언니는 내 결혼과 남편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막말을 했다. 둘은 "우리는 공동운명체 이기 때문에 니 결혼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라고 했다.
나는 항상 "공동운명체"라는 말이 너무 소름이 끼치게 싫었다. 본인들이 선을 마구 넘으면서 나에게 폭언하고 간섭하는 걸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라고 말하다니. 내가 선택한 적도 없는 운명인데 무슨 공동운명체? 나에게 만약 선택권이 있었다면 나는 절대 엄마 언니와 가족이 되는 운명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지금은 내가 연을 끊고 차단을 했기 때문에 연락을 할 수 없지만, 엄마와 언니는 내가 둘 과의 인연을 끊기 전까지도 가족 단톡방에서 서로의 일상을 공유했다. 엄마와 언니는 우리 셋의 가족 단톡방에서 끊임없이 +999를 만들어 내며 서로 밥을 먹었네, 뭘 먹었네, 맛이 어떻네, 누굴 만났네, 누가 뭘 했네, 숨을 쉬고 있네, 숨이 잘 안 쉬어지네 등등 정말 사소한 것들을 서로 공유했다. 내가 답을 늦게 하거나, 대답을 안 하기라도 하면 '응답하라 둘째 딸! 응답해!'라고 나를 닦달했다.
나는 대학교 3학년 때 언니와 같이 살게 되었다. 언니와 나는 같이 살면서 지킬 규칙을 정했다.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 터치하지 않기. 서로 배려하고 짜증 내지 않기. 식비와 생활비는 서로 반반 내기. 엄마한테 서로 외박을 하거나, 집에 늦게 들어온 걸 말하지 않기. 집안일은 나눠서 하기. 등등
이 규칙은 잘 지켜졌다.
내쪽에서만.
언니는(이하 새끼 나르) 본인이 주문한 음식을 나와 먹을 때면 너는 나한테 얻어먹는 걸 고마워하라고 생색내고 눈치를 주며 내 입맛을 떨어지게 했다. 새끼 나르는 내 물건이나 옷은 맘대로 쓰고 입고 아무렇게나 놓으면서, 자기가 사 온 물건을 내가 써도 되냐고 물어보면 늘 화를 냈다.
새끼 나르는 나르엄마를 어떻게든 따라잡겠다는 듯이, 엄마와 똑같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새끼나르 언니는 회사를 다니며 대학원 공부를 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기분이 태도가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새끼 나르는 자기가 집안일을 안 할 경우, 회사와 학업을 병행하는 본인이 집안일을 못한 것은 괜찮지만 동생인 내가 안 하면 학생인 주제에 집안일도 안 한다며 내게 욕을 하며 화를 냈다. 새끼 나르는 내가 바빠서 집안일을 늦게 하거나, 정리를 안 하면 나를 게으르다고 비난했다. 새끼 나르가 옷을 쌓아두거나, 빨래를 돌리고 널지 않아서 내가 뭐라고 하면, 자기는 일하느라 힘들어서 그런 건데 그런 자신을 이해도 못해주는 내가 나쁜 년이라며 막말을 냈다.
언니는 내가 너무 집을 더럽게 쓰면서 청소도 안 하는 게으른 애라서 같이 못 살겠다고 일주일에도 몇 번씩 엄마에게 하소연을 했다. 언니는 자기는 혼자 잘살고 있었는데, 나랑 같이 살게 되면서 자신의 라이프가 다 망가졌다고 엄마에게 징징댔다.
그러면 그 말을 들은 나르 엄마는 나에게 "너는 예전부터 정말 청소를 제대로 안 해", "너는 늘 뭘 해도 대충 하고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경우가 없어"라고 말하며 가스라이팅을 했다. 나는 엄마가 하는 말들이 말도 안 되는 비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회사에 입사해서 칭찬을 받고 내 성과로 인정받는 경험을 하기 전까지 내가 모든 일을 대충 마무리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으며 지내왔다.
내가 언니도 청소를 안 하고 더럽게 산다고 말을 하면 엄마는 늘 내게 다른 사람 잘못한 건 얘기하지 말고 너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고 했다. 정말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하루는 언니가 일어나서 출근하기 전, 전 날 나와 같이 산 빵 중 자기가 아침에 먹으려고 했던 빵이 안보인다고 내게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다음날 언니가 먹고 싶어할 빵을 미리 예측하고 그 빵 대신 다른 빵을 먹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침부터 언니에게 욕을 먹었다. 나는 등신처럼 편의점으로 내려가는 언니를 따라가 쩔쩔매며 내가 다시 사 줄 테니 화를 풀라고 했다. 하지만 새끼 나르는 계산대 앞에서 직원이 보고 있는데, 내가 집어간 빵을 손으로 탁 치고는 본인이 집어온 빵을 계산하고 말없이 출근했다. 나는 머쓱하게 나를 보는 직원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빵은 슈크림 빵이었다.
언니는 야근을 하거나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잘 있다가도 갑자기 무엇이던 트집을 잡아서 내게 화를 내곤 했다. 내 사생활을 간섭하고, 엄마한테 "동생이 12시 넘어서 술 마시고 들어왔어요!"라고 일러바치는 것이 새끼나르의 특기였다. 새끼 나르는 내가 친구들이랑 놀거나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에는, 엄마에게 연락해서 내가 늦게 들어왔다고 고자질하곤 했다. 나는 그런 엄마와 언니를 보면서 정말 저 두 사람은 왜 저럴까 하며 대응하지 않고 무시했다. 내가 둘이 단톡방에서 나를 욕할 때마다 무시하거나 대답을 안 하면, 두 사람은 나를 개념이 없는 애라고 함께 씹어대며 서로를 위로했다.
나는 나를 괴롭히는 엄마 언니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오은영의 금쪽상담소 프로그램에서 조혜련 모녀에게 오은영 박사가 해주는 상담을 보면서 나는 엄마 언니와 나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오은영 박사가 말하길, 자녀들은 부모에게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약 엄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불안해지고 공허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사이가 좋은 모녀는 서로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고 싶어 하고 '정서적 샴쌍둥이'처럼 서로를 통해 안정감을 느낀다고 한다.
엄마와 언니는 서로 샴쌍둥이처럼 의존적인 관계였다. 둘이서 그렇게 의존하면서 서로 정서적 샴쌍둥이처럼 지내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내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이 둘이 나르시시스트라는 것이었다. 나르시시스트와 정반대 되는 대표적인 성향을 가지는 사람이 에코이스트인데, 오은영 박사는 요즘 MZ세대에서 많이 보이는 성향이 에코이스트 성향이라고 했다.
에코이스트는 타인에게는 너그럽지만 자신에게 엄격한 성격을 갖고 있어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성향이다. 자신에게는 너그럽지만 타인에게는 엄격한 나르시시스트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기 때문에 나르시시스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 중 에코이스트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다.
나도 첫 입사 했을 때부터 회사에서 다들 나를 MZ세대라고 불렀었는데, 사실 나는 이 MZ라고 불리는 게 너무 싫었다. 지금도 싫다.
내가 무슨 MZ야, 나는 그냥 나지.
아무튼 오은영 박사에 따르면 요즘 엄마와 딸들 간의 세대차이에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에코이스트가 가지는 특징을 알아보면 세대 간의 성향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에코이스트 체크리스트
1. 주목받는 것을 싫어한다. (여기서의 주목은 자신을 향한 지나친 관심을 뜻한다.)
2. 문제가 생기면 내 탓부터 한다.
3. 유독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다.
4. 남한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한다. 타인이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싫어한다.
5. 타인과의 갈등을 회피한다. (불편해지거나 대화로 해결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면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성향이다.)
이런 에코이스트들의 특징을 알고 나니, 에코이스트 성향을 가지는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가 가지는 성향의 차이 때문에 세대 간 갈등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 언니의 관계에 대해서 내가 이해했고, 나도 어느정도 에코이스트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엄마와 언니를 다시 볼 생각은 없다. "우리는 이런 성향을 각자 가지고 있고,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서로를 이해하며 잘 지내보자!"와 같은 발전적인 대화가 가능했다면 애초에 내가 엄마, 언니와 연을 끊지도 않았을 거다.
나르시시스트 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절대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나르시시스트들이 있다면 손절만이 답이다. 가족이어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가족들과 대화가 가능한 분들이 있다면, 꼭 서로의 성향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고 같이 대화를 하면서 감정을 공유해 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