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증오까지 하고 그러세요...
나의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시 부모님을 증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말해준 시가 관련 스토리를 들어보면 정말 할머니 할아버지가 최악의 시부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녀 입장에서의 스토리만 들었기 때문에 무조건 그녀는 옳고 그녀의 시부모님이 다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여태까지 직접 목격한 사건 들만 고려해도, 충분히 그녀의 시부모에 대한 분노는 이해할만하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시댁 관련 이야기만 나오면 아빠와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 관련 해서 돈이 필요하거나, 두 분이 뭔가 사고를 쳐서 그것을 수습해야 하는 경우에 큰 소리가 났다.
그때는 어려서 제대로 몰랐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나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매우 가부장 적인 분이셔서, 식사를 할 때도 남자아이들은 큰 식탁에서 어른들과 밥을 먹을 수 있게 허락했고, 며느리와 여자 아이들은 작은 식탁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웃긴 사실은 나와 언니는 장남의 두 딸이었기 때문에 귀한 손녀 대접을 받았지만, 고모의 두 아들인 사촌 오빠들은 작은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명절 때마다 고모는 시댁에 가서 일을 하느라 기진맥진해져서 친정에 왔지만, 자신과 두 아들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에 매우 속상해 했고,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떠나고 싶어 했다.
고모는 재산이 별로 없이 힘들게 자영업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나중에 부모님에게 들어가는 용돈을 드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할머니와 할아버지 병간호와 요양원 방문을 거의 전담해야 했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미성숙한 어른들이어서 싫었다.
중학교 때부터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이만 많지 지혜도 없고 배울 점도 없는 어른 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빠 쪽 할머니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면 별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 없었다. 주변 지인들 관련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뉴스 이야기, 정치인 욕하기 등등의 것들이 많았다.
특히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했다. "누가 그랬는데~ 그 집 누가 그랬데~ 내가 아는 누가 그랬데~" 등등 할머니가 아는 지인들에 대한 이야기 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셨다.
그리고 지인들도 어찌나 많으신지 집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서로 뭘 샀네, 남편이 어땠네, 시부모가 어땠네 하면서 남 흉보는 이야기도 하곤 했다.
할머니가 하는 말들을 자세히 들어보면 전부 다른 사람들 관련 이야기 이거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인생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 뿐이었다.
어릴 때 부터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낸 나는 30이 넘은 지금, 미 성숙한 어른들은 대화만 해봐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할아버지는 자주 "여자는 그저 우선 이뻐야해! 우리 막내 손녀처럼!" 이라고 하셨다. 참... 그런 분들이셨다.
두 분은 무언가를 할 때 스스로 알아보며 공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만 믿었다. 그리고 귀가 매우 얇고,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늘 손해를 보고서도 본인들은 봉사를 한거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공인중개사를 하셨는데, 힘들게 번 돈으로 투자를 하면서 모았던 재산을 사업으로 날렸다.
집안은 어려워졌고, 그렇게 투자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 나머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사업 실패 이후 평생 동안 그저 예금만 하며 사셨다.
어쩌다가 할아버지가 투자한 부동산들이 잘 된 경우도 있었지만, 할머니는 허영심과 질투가 많은 여자였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할아버지와 결혼한 할머니는
세상물정을 모르셨다. 할머니는 돈을 쓸 때 가장 행복해하셨고, 젊은 시절부터 아파서 거동이 불편하실 때까지 할머니는 정말 철이 없게도 돈을 생각 없이 쓰셨다.
돈이 많을 때는 금반지와 같은 물건들을 사 모으셨고, 돈이 없을 때는 홈쇼핑에서 파는 물건들을 사 모으셨다.
지인이 무언가를 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같은 물건을 고민도 하지않고 구매했다. 원하는게 있으면 주변 사람에게 사달라고 부탁해서 어떻게든 구하셨다.
할머니는 또한 친척이나 지인들과 자신의 삶을 자주 비교하곤 하셨다. 자신보다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면서 매우 슬퍼했다.
공인중개사를 정리하고 은퇴를 한 이후, 주변 지인과 친척들이 가진 재산에 비해 초라한 자신들의 재산을 보며 슬퍼진 나머지 할아버지는 이전에 했던 실수를 다시 반복했다.
힘들게 모은 현금을 부동산과 땅 투자를 해 대부분 잃었다.
어리석었던 과거에 대한 반성과 성찰 없이 그저 빨리 쉽게 돈을 벌려고 하다가 두 분은 그나마 모아놓은 재산마저 잃었다.
두 분은 나이가 들자 이제 힘든 일을 할 수 없다며 돈을 벌지 않으셨다. 간간히 할아버지가 일을 하셨는데, 할아버지가 풍으로 쓰러지시고 나자, 할머니는 이전보다 적은 생활비로 사셔야 했다.
네 명의 자녀들은 생활비를 조금씩 모아서 보내드렸다.
할머니는 늘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보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어... 내 팔자야."라고 중얼거리셨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집이 한채 있으셨는데, 할머니는 자녀들이 만류할까봐 자녀들 몰래 그 집을 팔아버리고 예금에 넣어 놓고 이자로 생활을 하셨다. 자녀들이 주는 용돈으로는 원하는 물건을 사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역시나 어리석게도 더 아껴 쓰지 않으시고 이전과 똑같은 씀씀이로 생활을 하셨다.
특히 할머니는 체면을 중시 하셔서 자녀들이 준 용돈으로 주변 지인들에게 밥을 사고 물건을 선물하셨다. 주변 지인들에게 밥을 얻어먹기만 할 수는 없다는게 그 이유였다.
그냥 지인들과 자주 만나지 말거나, 차 한잔만 하시라고 자녀들이 말해도 할머니는 늘 이렇게 말하셨다. “그래도 그럴 순 없지. 얻어먹기만 하면 다들 나랑 안 만나려고 할텐데.”
노후 준비가 된 주변 지인들 소비 수준에 맞춰 어울리느라, 할머니는 본인 노후자금을 날리셨다.
할머니가 집을 파셨다는 사실은 몇년 뒤 집주인이 나가라고 했다는 할머니의 전화로 알려졌다.
할머니는 본인의 집을 은퇴한 부부에게 팔았다. 할머니는 노후 자산이던 집을 팔아, 그 집에서 세입자로 살면서 4년 동안 그 은퇴 부부가 부동산 상승기에 편안한 갭투자도 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이후 몇백, 몇천만원의 전세금을 2년마다 올려주는 것은 모두 자녀들의 몫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세금은 매우 빠르게 증가 했다.
자녀 중 누군가가 할머니와 같이 살경우 2년마다 올려 줘야 하는 전세금 부담을 덜 수 있었지만, 자녀들이 결혼한 배우자 중 그 누구도 할머니와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빠는 엄마에게 할머니와 같이 살면 어떠냐고 제한 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듣고 매우 화를 냈다.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자녀들 그 누구도 부모님에게 노후 자금을 지키셔야 한다고 조언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우리 엄마 아빠와 같이 살자고 하면 당신은 살 거냐고 하는 엄마를 보면서 아빠는 내가 괜한 말을 했다고 했다.
아빠는 원래 본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엄마와 잘 공유하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늘 문제가 생기면 숨기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일이 터졌다고 고백하는 편이라,
자녀들이 일을 수습하기에는 시간이 지난 후여서 늘 손해를 봤다. 엄마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자 시가 이야기만 나오면 매우 신경질 적으로 반응했다.
할머니의 예금은 10년만에 동이 났다.
할머니는 70대 중반이셨고, 아픈 곳이 많아 지셨다.
자녀들은 더 많은 용돈을 드려야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는 주변 지인들은 남편도 있고 집도 있는데, 자기는 집도 없고 남편도 없다며 슬퍼하셨다.
할머니는 자신은 평생 누리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하고 살았다며, 자식들이 주는 돈 다 쓰고 죽을 거라고 하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한심한 말이다. 적어도 내가 본 할머니는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신 분이다. 여행도 일 년에 1번 이상은 꼭 다니셨고,
집에는 새로운 금반지와 금목걸이가 매년 몇 개씩 생겼다. 그리고 갖고 싶은 것은 고민하다가 결국 다 사셨다.
그중에는 지인들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같은 교회에 다니는 지인들에게 강매당한 영양제나 필요 없는 책 등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홈쇼핑에서 이미 집에도 있는 물건들을 새 거인데 싸다는 이유로 대량으로 사서는, “이거 너무 괜찮지 않니!?” 라고 말하며 며느리 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하셨다.
엄마는 방문할 때마다 할머니가 챙겨주는 극세사 행주, 차렵이불, 지퍼락 등등의 물건을 받을 때마다 이 많은 걸 대체 왜 사시는 거냐고 어이없어했다.
할머니는 늘 "이거 얼마 안 했어~!" "되게 싸게 주고 산 거야!" 라면서 몇만 원, 몇십만 원을 필요 없는 곳에 쓰셨다.
할머니는 작은 물건만 사진 않으셨다. 옥장판, 마사지 의자, 멀쩡한데도 낡았다는 이유로 버리고 새로 구매한 김치 냉장고 등등.
할머니는 자녀들이 주는 적지 않은 생활비를 전혀 모으지 않으셨고, 다치시거나 어쩌다가 큰돈이 필요할 경우 늘 자녀들에게 손을 벌리셨다. 자주 만나는 할머니 형제 자매들의 씀씀이를 따라가느라 할머니는 기분이 내키는 대로 분위기에 휩쓸려 돈을 다 써버리셨다.
할머니는 늘 자녀들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하셨다. 자녀들은 이전처럼 “괜찮아요 어머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들인 아빠도 할머니를 점점 만나기 불편해 했다.
시어머니에게 용돈을 드리느라 가족여행을 가려다 취소하고, 바꾸려던 냉장고 구매를 포기하던 엄마는 계속 반복되는 시어머니의 돈 요구에 폭발했다.
왜 다른 형제들보다 아빠가 더 돈을 많이 드려야 하냐고 엄마는 화를 냈다.
이미 전세금을 2년마다 올려 드리는 것도 버거운데 언제까지 어머니가 돈을 막 쓰시는걸 그냥 보기만 할거냐고 호통쳤다.
아빠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저지른 일들 때문에 돈이 나갈 때마다 엄마에게 이미 일이 이렇게 된 걸 뭐 어쩌겠냐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근데 사실 이것도 엄마 입장의 이야기여서, 처음에는 아빠도 미안해하다가 점점 엄마가 지랄 맞게 괴롭히니, 아빠도 나중에는 화를 냈을 것 같다.
근데 아무리 엄마가 지랄 맞게 괴롭 혔어도, 이건 아빠가 엄마에게 계속 미안해해야 하는 건 맞다. 생활비도 모자라 계속 돈 들어갈 이벤트가 생기는 시댁, 그리고 자녀들이 준 용돈으로 아끼고 저금을 하는 게 아니라,
옥 장판과 이상한 쇼핑몰 물건들을 사는데 돈을 생각 없이 쓰는 어머니를 제대로 통제하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그 문제 해결을 엄마에게 떠 넘긴 적도 많으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인자하고 따듯한 시부모였다면 그래도 엄마가 좀 참을 수 있었을까?
내가 목격한 것만 해도 두 분은 엄마에게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하지 않고 생각 없이 말을 건내는 분들이었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늘 엄마에게 "나 같이 좋은 시어머니가 어딨니?" 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약간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얄미운 시어머니 스타일이었다.
할머니는 엄마를 질투해서 엄마가 가진 옷이나 가방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고,
“그거 모피 진짜니 가짜니? 너는 모피 좋아하니? 나는 모피 싫어하는데. 좀... 야만 스러워서.” 와 같이 엄마의 옷이나 물건에 대해 교묘한 돌림화법으로 깎아내리며 본인은 현명한 척 했다.
할머니는 늘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는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 부탁을 했다.
엄마는 상냥한 목소리로 할머니에게 네~ 네~ 하고 통화를 끊고 나면 늘 소리를 지르면서 분노했다.
아빠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서 답답해진 엄마가 경제적인 이야기를 꺼낼 때 마다 할아버지는 발끈 하셨다. 재산이 없는 사실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좋은 시부모님 들은 다양한 이유로 좋은 분들이지만, 별로인 시부모님들은 굉장히 비슷한 이유로 별로인것 같다. ㅎ
그래서 고부갈등 관련 드라마가 그렇게 인기가 많은 거 아닐까 ㅋ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두 분은 비관적이어야 할 때 낙관적이었고, 낙관적이어야 할 때는 비관적이었다.
자신들이 사업 실패나 투자 실패를 했을 때는 그 사실에 대해 비관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을 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더 나은 상황으로 만들기 위해 낙관적으로 미래 계획을 해야 할 때에는 오히려 비관적으로 인생을 한탄하며 자기 연민에 빠졌다.
두 분은 자기 연민을 하다가 기분이 우울해지면, 비싼 음식을 사 드셨고 여행을 갔으며 중 저가의 물건들에 충동적인 쇼핑을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더더욱 아껴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재 삶이 너무 힘들다는 핑계를 대며
굳이 필요하지 않은 물건과 여행에 자잘하게 돈을 써 가면서 자신들은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사람이라고 좋아했다.
나중에 물가가 오르고 자녀들이 준 돈으로 정말 딱 생활만 가능한 시기가 오자, 할머니는 쇼핑과 소비가 주는 도파민을 느끼지 못해 매우 슬퍼하셨다. 할머니는 있지도 않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만들어 내서 자녀들에게 돈을 받아서 원하는데 돈을 쓰시기도 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된 자녀들은 명절에 모여 그 누구도 어머니에게 직접 추가로 생활비를 드리지 말자고 회의를 통해 합의했다. 병원비와 같이 정말 필요한 경우에는 어머니와 동행을 해서 결제를 해드리자는 결론을 내렸고, 그 동행은 대체로 며느리들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큰 돈을 부탁하는 전화를 할때마다 늘 내가 일찍 죽어야지, 그저 80이 되면 가고 싶어. 라고 말하셨다.
할머니는 92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입관을 지켜보러 갔는데 우리 아빠를 포함해서 우는 자녀가 한 명도 없었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7년 동안 중풍으로 앓으시다가 돌아가셨을 때는 그 모습을 보고 가족 모두가 울면서 슬퍼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모두가 드디어 끝났다는 분위기였다.
장례식장에서 고모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말씀을 하실 수 있을 때 이런 말을 하셨다고 했다.
"내가 사업을 했으면 뭐를 했더라도 아주 크게 되었을 텐데! 내가 돈만 많았으면 정말 돈을 멋지게 잘 썼을 여자야!"
아빠와 다른 형제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한숨을 쉬었다.
아빠는 그 누구보다 노후 준비를 탄탄하게 하고 계시다.
아빠는 나에게 할머니 할아버지 처럼 되기 싫다고 하셨다.
나의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아빠와 이혼을 한 이후에도 늘 시댁 스트레스와 시부모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너희 아빠 부모님들은 정말 개념 없는 어른들이야! 돈이 없고 멍청하면 심성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나한테 바라는 것만 많고 배울 것도 없는 사람들이야! 증오해!"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면서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아빠를 보면서 자기 부모 보다 배우자의 마음을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엄마를 보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을 간직하고 살면 노안이 빨리 온다는 것을 배웠다.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