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에 작성한 블로그(사실상 운영을 하지 않은) 글을 옮겨왔습니다.
참 많은 오해 속에서 산다. 이해했다 생각한 것들로부터 툭하면 뒤통수를 얻어맞고, 호의 뒤에 숨은 목적도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섣부른 착각은 실망으로 돌아오기 일쑤고, 갈수록 별다른 기대나 감흥 없이 일상에 묻힌다. 있던 관계의 끈은 희미해지고, 새로운 만남은 무미건조하다. 다름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모든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어진다. 일상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렇게 오해에 익숙해진다는 말과 다름없다.
<건축학개론>은 그런 오해에 관한 영화다. 영화 속 승민(이제훈, 엄태웅 분)과 서연(배수지, 한가인 분)은 어설프게 서로의 감정을 넘겨짚고, 결국 오해 속에 엇갈린 채 멀어진다. 영화는 90년대와 현재를 넘나들며 그런 둘 사이의 오해를 조심스레 풀어낸다. 십 수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마음과 꿈을 헤집고, 서로의 의미를 되새긴다. 마치 전람회의 노랫말처럼.
위선과 체념, 후회로 얼룩져있던 두 남녀의 과거는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마력 속에서 비로소 구원받는다. 제일 병신 같았지만 미치게 그리운 그날들. 찌질하고 답답해도 승민과 서연의 풋사랑은 그 자체로 눈부시고, 난 그들에게서 스무 살 내 모습을 본다. 불안하고 위태했던, 그래서 뾰족하고 미련했던 나를 이제야 이해한다.
거친 사투리에 촌스러운 패션, 감정과잉과 자기혐오. 내게 스물은 여느 신입생들과는 다르게 가장 초라하고 볼품없었던, 그래서 때론 지워버리고 싶은 시기였다. 입고 있는 GUESS 티셔츠의 철자가 틀린 지도 모를 정도로 둔감하고, 자는 척 그 상황을 회피하던 승민의 모습은 유약하고 염세적인 스무 살 내 모습 그대로였다.
제주도 피아노 학원 출신이라 무시당하고, 반 지하라도 ‘압서방(압구정, 서초, 방배)’에 집착하던 서연도 마찬가지다. 반 지하 방에 커튼을 다는 서연의 모습을 보며 나는 첫사랑과 함께 수강한 부동산학개론 수업을 떠올렸다. 우리 네 식구가 십 수년을 살아온 아파트의 공시지가가 친구의 자취방 전셋값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그 수업이 왜 이리도 생생히 기억나는 건지. 담배 연기에 켁켁대던 승민이 약혼녀 앞에서 담배를 뻐끔거리는 능글맞은 아저씨가 됐듯, 나 역시 빗나간 욕망과 결핍들을 잊으려 그간 참 부산스레 발버둥 쳤다.
하지만 결국 영화 속 승민과 서연이 그렇듯 나 또한 과거의 나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할 수는 없을 테다. 승민은 미국 행을 결심하고 마침내 구질구질한 정릉을 떠날 준비를 하지만 빠듯한 형편에도 자존심 때문에 처가의 지원을 거부하고, 서연은 압서방 반 지하 방, 아나운서 시험, 의사와의 결혼 등으로 계속해서 과거와 결핍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만 결국엔 실패한다. 못난 모습이라 해서 스스로를 외면하는 것으로는 결국 행복해질 수 없다. 집어 찬 양철 쪽문이 찌그러진 채 거기 그대로 있듯이, 중요한 것들은 잘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욕망일 따름이다.
그래, 나는 내 스물을 오해했다. 영화를 보며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후에야 깨달았다. 그렇게 주눅들고 못났던 내 스물이 사실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날이었음을. 아쉽고 싫었던 내 모습조차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 나를 사랑하는 방법임을. 그리고 그렇게 나를 일으킨 다음에야 정말 내가 원하는 것들을 깨닫고 쫓을 수 있다는 것을… 이불 속 하이킥을 유발했던 20대 초반의 기억들. 그때고 지금이고 변하지 않은 것들을 되새기며, 비로소 내 안의 사막을 들여다본다. 돌아보면 부족하고 찌질했을지 몰라도, 한껏 취해 무엇에든 흠뻑 빠져들던 그날들이 여태 나를 지탱해왔단 걸 스물 여덟에야 깨닫는다.
미래와 성장이란 구실을 붙여 세상을 욕망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어제 꿈꿨던 가치들이 새삼스럽다. 후회 대신 인정과 이해로, 미련 대신 믿음과 사랑으로. 내 결핍과 욕망들을 그렇게 보듬을 수 있게 되면, 그런 여유를 갖추고 나면 좀 더 멋있는 어른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스물의 첫사랑이 30대 남녀의 오늘을 구원했듯, 나 또한 내 스물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으로 다가오는 30대를 맞고 싶다. 20대를 긍정하는 그 힘으로 남은 청춘을 힘껏 살아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