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신경 써서 숨을 쉬듯, 그렇게-
이상한 일이었다. 오후 3시경 강남 교보문고, 나는 책을 고르고 있었다. 에세이 서가에서 문득 계산대 쪽을 바라봤을 때, 책장 너머 벤치에 앉아있던 어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듯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서로를 인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고, 민망함에 나는 서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시 책을 고르다가 힐끗, 벤치 쪽을 훔쳐봤다. 찰나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얼빠진 듯한 표정도 그대로였던 것 같다. 어떤 위화감도 느낄 수 없었다.
집어 든 책 쪽으로 눈을 돌리며, 나는 혹시 아는 사람인가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기억 속에 매칭 되는 사람은 없었다. 내 행색에 뭔가 눈길을 끌만한 구석이 있나? 백팩이 혹시 열린 건 아닌지, 옷매무새가 흐트러졌는지 빠르게 살펴봤지만 딱히 문제는 없었다. 최근에 이발을 한 데다 전날 면도도 말끔히 했고, 하다못해 안경알도 깨끗이 닦았다. 들고 있던 책도 일반적인 에세이. 특별히 시선을 끌만한 건 없었다.
마침내 책을 고르고 계산대로 향하던 나는 다시 한번 벤치 쪽을 쳐다봤다. 그녀는 이번에도 날 보고 있었고, 예의 그 표정도 그대로였다. 보통 낯선 사람과 시선을 마주쳤을 때 그 사람이 자기 쪽으로 다가오면 당황하여 시선을 거두기 마련이다. 계산대를 향하며 성큼성큼 걷는 나는 분명 그녀에게 그런 낯선 존재일지언데,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뒤통수가 간질간질하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누르며 모퉁이를 돌아 계산서에 선 나는 결제를 하고 멤버십 포인트를 적립하는 와중에도 계속 의문 속에 빠져있었다. 대체 누구지? 왜 나를 그런 표정으로 본 거지? 아는 사람은 아닌데. 전 남자 친구랑 닮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그냥 젊은 놈이 일할 시간에 서점을 배회하고 있어선가? 설마 귀신이나 뭐 그런 보이면 안 될 존재인데 자꾸 시선이 마주쳐서 '넌 내가 보이니?'하는 놀란 표정이었나?
귀신이면 무슨 사연으로 서점 벤치에 앉아있는 걸까? 언제부터 내가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된 거지? 보통 이러기 전에 신병을 앓지 않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망상 끝에 그러고 보니 나란 놈은 서른몇 해를 살면서 여태 가위 한 번 눌린 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떠올려냈을 무렵, (그래서 나는 기가 강해서 신병이 비켜갔나라고 마악 생각했을 무렵) 점원이 내민 카드와 영수증이 날 다시 현실로 불러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너는 고등교육을 받은 지성인이야. tvN <도깨비> 후유증인건가. 귀신은 무슨, 그냥 허공을 보고 멍 때린 걸거야. 근데 우연히 나랑 시선이 부딪힌거겠지.
고개를 저으며 서점을 빠져나온 나는 얼굴을 때리는 겨울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어 총총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헬스장에 가면 하체운동을 해야겠다. 오늘 JTBC <뉴스룸>엔 안철수가 나온다지. 대통령은 내일 또 입장 표명을 할 거라던데.. 그나저나 슬슬 복직 절차를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밀려드는 현실적인 고민과 생각들에 한숨이 나왔다. 무의식의 영역이던 호흡을 자각한 그 순간. 한 호흡, 한 호흡 의식하며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생각했다. 아까 그 시선도 이 수동 호흡과 비슷한 거라고. 뜻 없이 언제나 뿌려져 있던 시선을, 오늘따라 우연히 민감하게 자각한 것뿐이라고.
그러고 보니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었다. 밀려드는 현실에 쓸려가며, 숨 쉬듯 당연스레 살아서인지 한동안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상을 할 기력이 영 없었던 것 같다. 가끔 호흡을 자각하고 신경 써서 숨을 마시고 뱉듯, 나와 주변에서 잊힌 것들을 예민하게 집어내고 느끼고 싶다. 틀을 벗고 여기저기 마구 얽힌 이상하고 실없는 생각도 잔뜩 하고 싶다. 그래, '프로공상러'가 되자. 그래서 풍부하고 생기 있는, 햄볶는 일상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