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결 - 타인과 나를 통과하는 일
Un, deux, trois.(2)
부산은 어딜 가나 짠 내가 조금씩 났다. 대체로 고소하거나 축축한 기분이었다. 대도시와 산과 바다가 모두 인접한 광경들은 낯선 곳이라면 외국뿐인 줄 알던 나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자갈치시장 할매 돌연 궁디 착 때리듯이 태연히 두드려댔다.
나는 해운대에 눌러앉고 몇 가지 신분을 새로 얻었다. 첫째로 게스트하우스 안내 양, 둘째로 주크박스, 셋째로 장기여행자. 게스트하우스 안내 양은 방긋방긋 곧잘 웃으며 공간의 규칙들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안내함과 동시에 여 방문객에겐 다정을, 남 방문객에겐 환상을 판다. 주크박스는 나의 전공과 관련된 것이었다. 내 기본적 신상을 알게 된 사장의 회유와 나의 마지못한 동의 후 난 종종 게스트하우스 파티가 무르익을 때 기타를 가지고 등장해 대중이 모를 가능성이 최대한 낮은 선곡 리스트 중 몇 곡을 불렀다. 여행자들의 마음이 적당히 부풀어 오르면 역할은 끝난다. 그 뒤론 부푼 마음들과 알코올을 연료 삼은 긴긴밤만이 남았다.
바람만 살짝 넣어주면 대개의 풍선들은 기운차게 앞바다로 휩쓸려 나갔으나 언제나 일부는 낙오되었다. 얌전히 숙소로 들어가거나 저희들끼리 시간을 보내려는 자들이었고, 그리고... 더러 의도된 ‘낙오 선택자’들이 몇, 이들은 높은 확률로 내게 왔다. 보통은 체크인 때부터 내가 판 환상을 너무 진지하게 믿어버린 이들이었다. 당연히 대부분은 남자였다. 더더욱 당연히 나와 자고 싶어 하는.
어쩌면 모처럼 일상을 등진 자들이 여행 내내 일상과 동떨어진 이벤트를 가능한 많이 경험하고픈 욕구에 충동질당하는 건 당연했다. 여행에는 일상의 자신과 동떨어진 사건일수록 그 내용은 더욱 극적이길 바라게 하는 힘이 있으며, 여행자만의 특권 중에는 개방성도 크게 한자리 차지한다는 걸 나 또한 익히 알았다. 그들이 자고 싶어 하는 게 게스트하우스 안내 양인지 나인지 알 길 없었지만 나도 어차피 절반은 여행자였기 때문에 흥미만 동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묵게 된 숙소에 머무르는 여자와 하룻밤이라니 얼마나 물거품 같은 낭만인가. 그런 열린 마음의 안내 양 모드가 꽤 유혹적이었던 모양이다. 개중 한 명은 거듭된 거절에도 부득불 내가 머무는 방까지 밀고 들어오려고 했으니까.
매일 밤 마지막 체크인 가능 시인 오후 11시가 지나면 근무시간이 끝나 나는 비로소 세 번째이자 가장 개인적 신분인 여행자 타이틀을 되찾았다. 이후의 시간을 타인과 나눠 쓸지 말지 고민해보는 일은 퇴근 뒤의 스케줄을 물어 오는 남자가 나타날 때마다 일어났다. 많은 경우 내 시간이 못 견디게 아까울 법한 애들이었지만 드물게 대화나 눈빛에서 전류가 흐르고 걷는 속도가 편안히 맞춰지는 애들에겐 곁을 나눠주곤 했다. 그런 밤들에 우리는 그야말로 먼 곳이기 때문에 나눌 수 있었을 가장 가까운 거리를 만끽하며 일상과 전혀 다른 규칙으로 흐르는 시간을 가지고 놀았다. 누구보다 가까웠던 타인들. 무엇보다도 낯설었던 긴밀함.
게스트하우스 스태프가 되고 가장 먼저 주지 받은 규칙은 ‘객실에서 손님들 사이 남녀관계가 일어나지 않게 잘 체크할 것’ 이었는데 나는 날라리 스태프였어서 보란 듯 내 방에 갓 만난 친구들을 초대하곤 했다. 그 대신 손님들의 객실은 아주 꼼꼼히 단속했다. 이 반쪽짜리 직무유기는 포기하기 힘든 쏠쏠한 즐거움이었다. 그날은 10시부터 연한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주변을 맴돌았다. 한 번씩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게 말을 걸고 싶어 몸살을 앓았고, 마침내 10시 반을 넘기면서는 퇴근시간이 언제인지 궁금하다며 말을 걸어왔다.
사랑은 이해와 회복 사이에서 흔들린다.
멀수록 선명하게. 가까울수록 어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