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deux, trois.(3)

사랑의 결 - 타인과 나를 통과하는 일

by 김여진


Un, deux, trois. - 03


말을 걸어온 남자가 아니더라도 난 워낙 할 일이 많았다. 자전거를 몰아 광안리까지 달려갔다 오거나 달맞이언덕을 올라가 해송들과 함께 발밑의 바다를 내려다보거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와 왁자함이 쓸려나간 게스트하우스의 조명을 뭉근히 낮춘 다음 빈 소라껍데기처럼 웅얼거릴 수도 있었다. 그날은 쓰던 일기를 마저 쓰고 마지막 체크인 팀을 방에 넣은 뒤 곧장 앞바다에 앉아 맥주를 몇 캔 마실 생각이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늦봄이었고 외국 애들을 연달아 안내하느라 목이 탔었던 것 같다. 시간을 재며 카운터 뒤에 앉아 노트에 글을 끄적거리는데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드니 아까부터 분주하게 자꾸 돌아다니던 남자애가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내 시야에 들어오려 무진 노력을 하다 마침내 포기하고 말부터 건네 보길 결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머리칼과 속눈썹의 색이 놀랍도록 밝았다. 그런데 키가 엄청나게 커서 눈동자가 잘 안 보였다.


-무슨 문제 있어? 도와줄까?
-아니 문제는 없는데. 너한테 궁금한 게 있어... 혹시 네 일이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있을까?
-엥? 나는 30분 정도 남았어.
-혹시 그 후에 약속이 없으면 너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체크인 때부터 리셉션 걸이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어. 너만 괜찮으면 내가 그때까지 기다릴게.


가뜩이나 의무교육 영어로 하루 종일 필사의 외국인 접객을 반복하여 목이 타던 차였는데 이제 나는 다른 의미로 목이 말라 왔다. 얼결에 대답부터 하고 그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잠시 본인의 방으로 사라지고서야 겨우 그의 생김새를 복기했다. 팔다리가 그만치 겅중하고 체모가 옅은 사람은 처음이었지만 이런 상황이 처음인 건 아니다. 빠른 결단이 필요했다.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내게 뿜어낸 몸의 언어들을 재빨리 나열해 보았다.


그런 상황에 난 대개 다음의 기준을 따랐다. 전반적으로 무해해 보이는지, 눈빛을 천진하게 빛낼 줄 아는지, 친근함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다루는지. 걔는 욕구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역겹지 않았다. 싱글싱글 잘 웃는데도 천박하지 않았다. 정강이가 좀 많이 길어서 얼굴을 보려면 고개가 거의 하늘을 볼 때만큼 젖혀지는 것만 빼곤 꽤 귀여웠다. 무엇보다 궁금했다. 내가 만나본 중에 아마도 가장 먼 곳에서 날아왔을 남자가.


우린 맥주를 들고 바닷가로 나갔다. 걔는 프랑스인이었다. 리셉션 걸이랑 얘기하고 싶어서 친구를 억지로 재웠댔다. 도무지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는데 놀랍게도 나와 동갑이었다. 서로의 나라에서 나이를 어떻게 말하는지 헷갈려 하다가 더듬더듬 아 워즈 본 앳... 나인틴... 나인티 투... 하면서 눈을 맞추고 깔깔 웃었다. 껑충한 그를 올려다보며 키가 몇이냐 물으니 피트 단위로 적어주었는데, 단위를 환산하니까 원 헌드레드 나인티 투 센티미터가 나와서 또 낄낄 웃었다. 상식 영어 구사자 프랑스인과 12년 경력 주입식 영어 구사자 한국인의 수다였다. 영어 대화는 금새 동이 나고 프랑스어 강좌가 시작되었다. 그는 내게 원, 투, 쓰리를 가르치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혀를 프랑스인들만의 방식으로 꼰 다음 앙- 드- 트ㅎ와, 를 우아하게 뱉다가 나도 와르르 웃었다. 걔의 목덜미에서 나뭇잎 냄새가 났다.


그 애의 이름은 루카스였던가, 뭐 그 비슷한 거였다. 본인이 나고 자랐다는 빨간 지붕들이 예쁜 산골마을 혹은 수많은 루카스들처럼 보이는 우글우글한 가족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국의 바다와 이국의 여자 앞에서 퍽 설레어 얼굴색이 발그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고 걔의 팔을 만지작거렸다. 그 애는 너무 충실히 무-드를 형성하려고 했다. 아, 어차피 말도 잘 안 통하는데 그냥 몸이나 쓰러 가자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런 양아치 같은 대사를 생생히 전달하기엔 영어 실력이 후졌기 때문에 대신 이렇게 말했다.


-너 혹시 옐로 피버나 뭐 그런 거니?
-어... 아니. 난 그냥 네가 예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동양인이 아니었어도 예뻤겠지.
-그래? 그럼 슬슬 들어가자.


그러자 그는 몇 초간 뭔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겨드랑이를 잡고 날 들어 올려 백사장 나무데크에 앉혔다. 비로소 그의 눈이 정면에서 보였다.


-이따 우리가 뭘 하던, 오늘 우리가 나눈 시간과 대화가 그걸 위한 건 아니야.


그가 말을 걸었을 때부터 궁금했던 그와의 키스는 뾰족한 코가 자꾸만 볼을 찔러댄다는 것 외엔 내가 아는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바다 내음이 섞여 약간 짰다. 먼 바다를 건너 내 침대까지 도착한 남자와 한데 묶어 기억하기에는 썩 어울렸다. 그날 밤 내 방엔 마침 투숙객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 달빛이 깊숙이 들어왔다. 그 애는 길쭉한 사지를 어떻게든 구겨 내 침대에 눕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그가 침대 모서리에 이마를 세게 박았을 때 난 어떻게든 웃음을 참으며 내 침대가 충분히 코지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느리고 상냥한 밤이었다. 아침이 밝고 침대 곁에 떨어져 있는 그의 양말을 보면서 나는 그냥 양말이 뭉쳐져 있는 장면이 이렇게까지 이질적이어도 되는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전 생애를 통틀어 봤던 중 가장 큰 남자 양말이었다. 그에게 난 한국의 어느 휴양도시에서 만난 여자로 기억되겠지만, 사실 나도 여행자였다. 그도 여행자가 만난 여행자였다. 그곳은 그리고 여행지, 그 방은 여행자의 숙소, 우리가 보낸 밤은 충실한 여행자의 밤. 이질감에도 언젠간 익숙해질 것이다. 마침내 이 나날들이 여행보단 생활에 가까워질 때가 올 것이다.


일어나면 조식을 차린다. 조식 뒤처리를 하면서 동시에 간밤의 식솔들을 체크아웃 시킨 뒤 사람이 난 자리들을 다듬고 누구도 재워본 적 없는 방처럼 보일 때까지 싹싹 닦고 편다. 사람을 재우는 장사가 얼마나 내밀한 반복의 일인지 가르쳐 준 시간들은 지금까지도 마음 한켠을 채우는 귀중한 양식으로 남았다. 먼 곳에서 먼 곳에 도착한 이들을 위해 매일 밤 아늑한 잠자리를 준비하고, 더러 잠자리를 나눠 쓰기도 했지만, 해운대의 생활을 잠시 임대한 동안 제일 빛나던 기쁨은 리셉션 걸에서 퇴근하여 여행자로 잠들 때까지의 사이에 있었다. 아무도 몰려들거나 놀자고 보채지 않는 시간의 해운대는 은밀한 표정 아래 홍조 대신 달무리를 일렁일렁 띄운다. 무엇과도 쉽게 바꾸기 싫은 풍경이었다.


장소들이 아직 멀 때엔 모든 게 바짝바짝 다가왔다. 자꾸 서둘러 가까워지자 했다. 내게 전혀 다른 규칙이었던 시간의 흐름이 마침내 주거지와 비슷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자 나는 돌아왔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집이어서 오히려 한 번도 가깝다 생각한 적 없는 곳으로. 마치 짠 키스와 상냥한 밤을 남긴 루카스가 물거품 같은 쪽지만 남기고 사라졌듯이.


-Good place, good vibe... and good staff! - lucas




사랑은 이해와 회복 사이에서 흔들린다.

멀수록 선명하게. 가까울수록 어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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