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본 무법자들

관계의 기술 - 함께 자라나는 법

by 김여진


나를 돌본 무법자들


하늘이 먹음직하게 익어갈 시간이면 많은 오빠들이 대문을 박차고 쏟아져 들어왔다. 외향적이기로 명성 자자한 손위 형제가 꼭 저처럼 덩치도 목청도 큰 소년 여럿 몰며 들어오는 그런 날이면 어린 여진은 멍하니 코끝에 걸치듯 커피 향을 떠올렸다.


오빠들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브라운 계열 교복을 입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마이는 모카빵 껍닥이고 셔츠는 그 속의 빵결, 뺀질하니 윤 나는 궁둥이들은 영락없이 잘 볶아 둔 커피콩 같았다. 멋들어진 남색으로 얼핏 은행원이 연상되는 내 교복보다 오빠들 옷이 훨씬 좋아 보였다. 뭘 하든 대체로 손위 형제 것이 멋져 보이는 나이였다. 은행원보다 모카빵이 좋은 나이이기도 했다.


달달한 모카빵 껍질 벗겨 먹듯 재킷 훌렁 벗는 데에 1초, 셔츠 앞섬 풀어헤치는 데 2초, 그리고 아무리 더 걸려도 1분 안에 남자애들은 엄마에게 인사하고 나에게 인사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소파에 누웠다 일어났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가장 가까운 과자봉지를 터서 우적우적 먹어댔다. 이 모든 일이 언제나 순식간에 일어났다.


나는 남자도, 외향인도 아니거니와 내가 아직 못 살아본 4년을 앞서 사는 중인 미지의 존재들이 냄새나고 시끄러워서 미간을 찌푸리며 좁은 집 구석구석으로 꽁꽁 도망쳤다. 그럼 소년들은 속도 없이 깩깩 웃으며 기어이 날 찾아내고 귀여워했다. 질색할수록 더 귀여워하는 것 같았다. 일종의 공동 여동생이었다. 내가 모르는 오빠가 나를 아는 일, 길에서 우연히 오빠를 만나면 패거리의 모든 소년이 내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는 일에 익숙했다. 많은 오빠를 만났고, 그중엔 손 큰 엄마의 고봉밥에 법석떠는 오빠도, 내 형제의 나이키 후드티를 어떻게든 훔쳐 입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도둑놈 오빠도 있었다.


어쨌건 짜증스러울 법한 놈투성이였으나 왠지 내 오빠는 그 틈에서 시종일관 많이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웃을 기회가 있을 때 충분히 웃어둬야 한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웃거나 웃지 않을 때를 항상 내 맘대로 선택할 수만은 없음을 이미 배운 나이였다. 나보다 앞서 살아낸 4년이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같은 배움이 내게도 막 옮겨붙던 참이었다. 오빠들이 내가 찡그리든 웃든 항상 똑같이 귀여워했기 때문이고, 어떤 훌륭한 어른도 그리 하긴 쉽지 않다는 걸 나도 알았기 때문이다. 때로 부모가 가르치지 못한 부분을 오빠들은 웃기면서도 다정한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은 10대에게 허용된 무엇이든 120% 만끽함은 물론, 금지된 일까지도 전부 했다. 커피와 담배는 기호식품, 연애와 외박은 사교활동, 무면허 오토바이 운전은 좀 익사이팅한 오락행위였다.


내 오빠 윤, 레쓰비 캔에 빡세게 꽁초를 채워 넣던 골초였으나 공부를 곧잘 해 괜찮은 대학에 갔고, 허구한 날 싸우고 다니던 얼굴 벌건 규 오빤 예나 지금이나 엄청나게 성실하여 직업군인이 되었다가 가장 먼저 유부남이 됐다. 친구들에 꼴통이라 놀림받던 휘 오빤 그림을 기깔나게 그려 미대를 나와 인테리어 사무실을 열었고, 술 취해 낙오된 일로 몇 년 내내 삐지던 소심한 락이 오빤 아름답고 섬세한 커피집 사장님이 됐다. 왁자지껄하고 입체적인 패거리를 구경하며 내 10대와 20대도 퍽 다채롭게 자라났다. 발밑이 질퍽이거나 코끝이 시릴 때에도 종종 먼 거리의 어른들보다 빨리 오빠들이 달려와 주었다.


서로 미워하다 못해 얼굴도 마주치기 싫다며 내 졸업식 참여 여부를 놓고 싸우는 부모의 빈자리를 채운 것도 오빠들이었다. 낳아준 부모가 어린아이의 탈을 쓰고 바닥에 퍼져 떼쓰는 와중에 사뭇 어른 같은 정장들 빼입고 달려와 준 그들이 내겐 어른보다 어른이었고, 가족보다 가족이었다. 정작 군 복무로 불참한 친오빠 윤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눈 씻고 찾아봐도 오빠가 7명이나 온 애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아무에게도 혼나지 않고 커피든 술이든 마실 수 있는 어린 청년들이 공동 여동생을 가운데 끼고 웃었다. 그들을 한껏 거느린 나 역시 사진 속에서 마치 조폭 집안의 고명딸처럼 웃고 있다. 왠지 찡그리는 듯 아닌 듯, 미묘하게 활짝.




우리는 타인의 곁을 빌려 성장한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과정에서만 배우는 것들이 있다.

상처와 유머, 결핍과 회복이 뒤섞여 나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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