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를 읽고
“그런데 00님은 어리고 예쁜 편이잖아요?”
지난 회에 취미로 탱고 추는 건데 너무 경쟁적이거나 강박적으로 열심히 할 필요 없고, 더 나아지려는 지향은 긍정할만한 것이지만 그 과정도 즐겁고 행복해야 하니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 너무 무리하지 않고 실천해가는 편이 좋겠다는 요지의 글을 썼다. 이런 생각을 탱고인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나눴는데, 듣고 있던 한 탱고인이 대뜸 내 외모를 언급한 것이다.
나는 “그런…가요?”라고 반문하며 웃었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 어리고 예쁘면 남자들이 우호적이므로 ‘탱고 생활’하기 유리하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실력’을 쌓는데도 도움 될 것이다. 더 많은 경험을 수월하게 쌓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외모, 실력, 인성 중 뭐 하나라도 갖추지 않은 사람은 다른 탱고인들이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며, 이 씬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는 탱고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열변이었다. 듣다 보니 ‘그것이 당신이 그토록 훌륭한 탱고 실력을 쌓은 배경이로군요….’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뱉지는 않았다,고 기억한다(아닌가? 술 취해서 뱉어버렸나?).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따져봤다. 그의 말이 진실인가? 나는 ‘어리고 예쁜’ 여성인가? 그리고 그런 여성은 ‘유리한 삶’을 살며, 탱고에서도 그 규칙은 통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주어진 현실 속에서 개인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 외모 강박과 ‘더치 페이스’
먼저 나에 대해 돌아봤다. 고령화 현상이 심각한 탱고 커뮤니티에서는 30대인 나를 어리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스스로는 ‘이제 좀… 늙다리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늘어난 새치와 깊어진 팔자주름을 보며 노화를 느끼기 때문이다. 외모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만족하는 편 같다. 살면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외모를 칭찬받은 일도 적지 않다.
그러나 칭찬이 긍정적인 효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 외모에 대한 칭찬은 강박을 낳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에 대해 연구해 온 심리학자 러네이 엥겔른은 그의 저서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이하 ‘거울 앞’>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 그 외모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묶이게 된다. (...) 시간이 갈수록 다른 사람이 언제 어디서든 외모를 평가하고 있다는 인식을 내면화 한다. 결국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자신의 외모에 가장 밀접한 관찰자가 되고 가장 끈질긴 감시자가 된다.
나도 마찬가지다. 외모에 대해 그럭저럭 만족하는 편이라고 앞서 밝혔지만,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상태’를 위해 강박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다. 입술이 생기 있어 보이는데 도움 주는 제품을 주기적으로 바르고, 타인과 대면하는 일정이 있을 때 안경을 쓰지 않고 반드시 콘텍트 렌즈를 착용하는 일이 강박에 가까운 행동이라고 자각한다. 그리고 체중. 3kg 이상 급격히 증량한다면 위기의식을 가지고 뭐라도 하려 들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신체를 감시하고 단속한다. 아름다움을 칭찬받고, 그것이 부재한다고 보여질 때는 비난받은 경험의 결과라고 본다.
몇몇 남자들이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부친이다. 그는 비만한 사람들이 눈에 띌 때마다 그들을 깎아내리며 내게 “너는 저렇게 되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주입했다. 결국 그 일이 벌어졌을 때, 나는 상처 입었다. 장기간 해외체류 중 우울감을 느껴 상당히 체중이 늘은 채로 귀국한 일이 있었다. 부친은 나를 볼 때마다 내 몸을 언급하며 질책했고, 그가 다른 사람과 있을 때 내가 눈에 띄자 나를 농담거리 삼았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우울한 상태였는데! 지금은 따로 살고 있는데, 안부전화 때도 TV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한 내 외모를 평가하며 번번이 기분 상하게 한다.
그밖에 ‘구(舊)애인 워스트 3’에 속하는 한 인물이 떠오른다. 화장을 하고 그의 눈에 예쁜 옷을 입은 날과, ‘편한 옷’을 입거나 화장하지 않은 날의 나를 대할 때 확연히 다른 남자였다. 이따금 화장품이 덮지 않은 입술을 보며 “아파 보여. 뭐라도 좀 발라”라고 화장을 종용하기도 했다. 돌아보니 분한 사실은, 그가 키 작고 배 나오고 탈모가 진행 중이었다는 거다. 신장이야 타고난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 부분은 너무 방임한 것 아닌가? 자기 외모에 손 놓은 주제에 연인의 외모는 감시하고 관리하는 거, 양심 있다면 할 수 없는 짓 같은데….
이런 양심 없는 사람을 비꼬기 위해 몇 년 전 ‘더치 페이스dutch face’라는 말이 생겨났다. “데이트 비용을 공평하게 부담하는 ‘더치페이’를 원하면 더치페이스부터 해라(외모에서도 공평함을 추구해라)”라는 주장에서 주로 쓰인다. 성별 간 미모 격차가 큰 현실의 방증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은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어려보이는 외모가 중요하다. 남자는 외모 보다 다른 것이 더 중요하지만”이라는 메시지가 꾸준히 송신돼왔고, 또 받아들여졌기에 벌어진 상황이라고 인식한다.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의 저녁 공중파 뉴스에서도 이런 메시지가 읽혔다. 두 앵커의 나이, 그리고 외모의 결의 기괴할 만큼 달랐다. 20대로 보이는 여성은 뽀얀 미인이었지만, 50대로 보이는 남성은 어떻게 봐도 미남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단지 그는 안경을 착용했고, 날카롭고 지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듯 보였다. 이쯤 되면 글을 읽는 당신의 머릿속에 단 번에 떠오르는 풍경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지나치게 낯익은 구도다. 이런 구도가 2023년에도 흔하다는 사실이 애석할 뿐이다. 2023년쯤 되면 지적인 50대 여성과 20대 청순미남이 진행하는 뉴스쇼가 대중화 될 줄 알았는데….
- 외모에 대해 덜 말하기
이런 사회에 문제의식을 가진 나의 대응은 “아닌데? 남자도 외모 중요한데? 남자도 좀 관리하면 좋겠는데?”라고 호통 치는 것이었다. 일상에서 꾸준히, 신념 어린 실천을 이어갔다. ‘못생긴 남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지속적으로 표출하고, 남자 외모에 대한 취향을 떠들고 다녔다. 여성의 외모가 빈번히 얘기되고 더 높은 기준을 요구받는 비틀린 상황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보편적인 한국 남자들이 좀 더 외모에 신경 쓰게끔 만드는 것으로부터 가능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대상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외모에 대해서는 가급적 말하지 않는 편이 사회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겠다고 마음먹었다. 외모에 대해 말할수록 ‘외모가 중요하다’는 틀을 갖고 세상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거울 앞>의 저자는 '스키마 Schema'라는 인지 심리학 용어로 이 현상을 설명한다. 스키마는 경험을 조직하고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는, 우리가 내면에 가지고 있는 틀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 주의를 쏟을지, 그리고 불안정하거나 모호한 정보를 어떻게 메울지를 돕는다. 예를 들어 강력하게 발달된 ‘외모 스키마’를 가지는 경우, 대상의 여러 특질 가운데 신체적 외모에 가장 먼저 집중하며 외모를 성격과 도덕성, 훌륭함, 성공까지 연결 지을 가능성이 크다. 내 생각을 말했을 때 그것을 외모와 연결시킨 탱고인도 외모 스키마를 가지고 있던 게 아닐까?
그가 던진 화두를 떠올려 본다. 그의 말처럼 어리고 예쁜 여성이 삶에서 유리할 때가 있을 수 있고, 탱고를 추며 좋은 경험을 더 많이 할 수도 있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마주할 때 빠르게 알아보고 기쁨을 느끼게끔 진화해왔고, 자신을 기쁘게 한 상대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가질 확률은 높으니까. 하지만 그런 현상이 ‘당연하다’고 믿고 말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적절한 현실을 고착화하기 쉽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인간이 설탕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수백만 년간 진화한 결과다. 인간은 천천히 진화해왔는데, 환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지금의 풍요로운 환경에서 무절제하게 설탕을 퍼먹다가는 병을 얻고 건강을 잃고 말 것이다. 아직 우리 몸이 지금 환경에 적절히 대응하게끔 바뀌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인공적인 환경에서 즉각적인 기쁨을 무절제하게 충족시키면 건강에 나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거울 앞>의 저자는 인간의 미모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을 배가 시키거나 없던 아름다움도 창출하는 기술의 시대, 무언가를 팔기 위해 아름다움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현대 문화 속에서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절제’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 다른 스키마를 가지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이 우리 자신의 삶과 사회에 중요한지 환기하며 그것에 더 집중하려는 노력 말이다.
실천은 쉽지 않다. 나 역시 예쁘고 빛나는 것을 보면 너무 쉽게 흥분한다. 스스로를 꾸미는 것도 때때로 즐긴다. 탱고를 출 때 더욱 그런 경향이 있다. 9cm 굽의 반짝이는 탱고슈즈, 몸의 선이 드러나며 맵시를 내는 신축성 좋고 감촉 부드러운 옷이 기분을 좋게 한다. 하지만 이로써 ‘여성성’을 재현하며 성별 이분법 강화에 일조하는 건 아닐지,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거울 앞>의 저자는 ‘꾸밈’ 전반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다만 행복한 중간 지대를 찾으라고 조언한다. 아름다움을 즐기되 적당한 자원을 배분하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바에 방해되지 않도록 균형 잡는 것이다. 의복의 경우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편안한 움직임이다. 하의의 길이는 충분한지, 옷을 입는 동안 계속 신경 써야 하거나 숨을 참아야 하거나 불편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살피자는 것이다. 편하지 않은 옷은 우리 머릿속의 소중한 공간을 차지하고 일을 방해할 것이므로. 그렇다면…탱고를 추기 위해서는 움직임이 편한 옷을 지향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 문제는 일단 그냥 넘어가볼까?
다른 문제는 아름다움에 대한 칭찬이다. 나는 아름다운 대상을 보면 벅차올라 “정말…아름답네요…”라고 표현해버릴 때가 많다. 대상이 사람일 때도 그랬다는 게 문제다. 앞으로 자제하겠다고 다짐한다. 외모 칭찬이 결과적으로 억압이 될 수 있음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늙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고 ‘어리고 예쁜’ 상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런 일시적인 상태에 대한 칭찬은 강박만 부추길 뿐, 다정한 관찰 끝에 건네는 상대의 본질과 닿은 칭찬의 효과와 다르다.
나 역시 다른 칭찬이 더 기분 좋다. 당신의 관점은 신선하다, 당신과 대화하는 게 즐겁고 재밌다, 당신의 글에 공감했다, 당신의 활동을 보며 영감 받는다 등등. 탱고 추는 상대로부터는 “그동안 꾸준히 노력했나 보네요?” “당신과 같이 추는 탱고가 즐거워요”와 같은 칭찬을 들으면 기쁠 것이다. 내가 바라는 바를 타인에게 먼저 해봐야지.
올해는 거울을 덜 보고, 외모의 아름다움을 덜 추구하겠다. 못생긴 남자들도 덜 구박하겠다. 그것이 ‘나는 이 정도 노력하는데 너는 이것도 안 하냐’며 얄미워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제는 안다. 내가 좀 더 내려놓으면 상대에 대해서도 내려놓을 수 있겠지(대신 ‘님’들도 적당히 양심 있게 행동하십쇼). 한 인간으로서, 더 성숙하고 내실 있는 사람이 되는데 역량을 집중하자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