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치료 완
2025년...
하...
다사다난 했지...
1. 2025년은 내가 형사사건의 피해자가 된 해였다. 가까운 사이로부터의 폭력이었다. 그가 던진 물건이 내 얼굴로 날아들었고, 나는 일시적인 시각 장애를 갖게 됐다. 완전히 눈앞이 암전된 것은 아니었다. 앞의 사물이 식별되지 않도록 흐릿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통증은 굉장했다! 안구뿐만 아니라 오른쪽 안면 전반에 타박상으로 인한 통증을 느꼈고, 입 안에부터 은은한 피맛이 감돌았다. 불행 중 다행은, 걱정과 달리 각막이나 망막이 박리되진 않았다는 사실이다. 의사는 안구 내부 출혈이 시야를 가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해자는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비방하고 다녔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 “ADHD라서 사람 돌아버리게 해” “걔 아스퍼거 증후군일 수도 있어.” “피해자 코스프레” “그 모양이니 부모와 사이도 나쁘지.” “또라이년.” “병신년.” “페미년.”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인가? 그리고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와 함께 나를 비방한 사람들 중에는 내가 나와 마음을 나눴다고 여긴 이들도 있었다. 나는 사람을, 상황을 제대로 못 보는 사람일까. 이런 내가 앞으로 관계에 대해, 사람에 대해 믿고 살 수 있을까. 내 안에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2. 가해자는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기도 했다. 내게는 분명한 기억과 흐릿한 기억이 있었다. 그는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사실까지 부정했고, 그건 나를 답답하고 억울하게 만들었다. 반면 흐릿하게 번진 기억은 고민하게 만들었다. 다시금 떠올렸다. 기억은 어떤 입장에서 어떤 감정과 태도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임을. 이래서 라쇼몽 라쇼몽 하는구나….(<라스트 듀얼>도 추천함)
같은 순간을 경험한 사람들 사이의 기억이 엇갈릴 때, 우리는 어떻게 진실에 다가설 수 있을까. 적어도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억하는 바를 진술하고, 혼란스러운 지점은 혼란스럽다고 인정하는 일이었다. 필요하다면 거짓말탐지기를 써도 좋다고 말하며.
3. 벗들에게 사건과 혼란에 대해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을 때 그들은 나를 걱정하고 어떻게든 도움 주려 애썼으나, 한 편으로는 내 태도를 지적했다.
“내가 네 상황이면 슬퍼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너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여?”
“왜 너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앞으로 뭘 어떻게 할 건지만 말해? 네 감정이 어떤지는 별로 말하지 않는 것 같아.”
뭐… 슬픔을 억지로 쥐어짜내 전시라도 해야 하나? 피해자답기 위해? 그 일 또한 내게 상처로 남았(었)다.
4. 애써 좋게(?) 생각하면, 그간의 일들이 강의 자원이 될 수도 있겠다. 예술인 성희롱 성폭력 예방강사로 N년 째 활동하고 있는데, 강의 중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커뮤니티에 있을 경우 떠나야 하는 대상은 가해자고, 피해자를 불편하게 여기거나 따돌려 끝내 떠나게 만드는 일은 2차 피해를 야기하므로 지양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문화예술계가 워낙 좁은 사회이고, 가해자가 선배나 강사일 경우 피해자가 오히려 커뮤니티를 떠나는 일이 안타깝게도 적지 않다고도 덧붙였다. 알고 있다고 믿었다. 머리에만 담은 것이었다. 이번 기회에 직접,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와 나도 좁은 취향의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사이였고, 그는 일종의 선배였다. 커뮤니티 사람들 대부분이 나 보다는 그와 알고 지낸 기간이 길었고 또 깊었다. 그와 함께였기에 나와 가까워진 사람들의 경우, 나와 그가 멀어진 걸 알고 달라졌다. 어색한 표정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나…. 그들은 적은 말수로 나를 대했고, 일부는 건네는 인사를 무시하기도 했다. 결국 그와 겹치는 커뮤니티에서 지워지는 것은 나였다. 이 사례도 추가해 더욱 생생한 강의를 할 수 있겠군!
5. 폭행 관련 법에 대해서도 전보다 잘 알게 됐다. 형사, 민사, 가사. 불송치, 약식기소, 구공판. 폭행, 상해, 폭행치상, 특수폭행, 특수상해…. 이런 법률용어들과 친숙해졌다. 특수상해가 폭행죄 중, 중하기로 상단에 놓이는 범죄임도 이번에 알게 됐다. 그래서 검찰이 그를 특수상해로 기소한 것을 알았을 때 좀 놀랐다.
검찰에 기소되자 그는 사과문을 보내왔고 공판일이 정해지자 중재자를 통해 합의금을 논하며 내게 처벌불원서 제출을 청했다. 복잡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 피해가, 내 진술이 인정받았다는 일종의… 성취감? 뒤늦게라도 내가 사람 대우 받는구나, 하는 안도감? 나에게 있어서는 이 사건이 일단락됐다는 후련함.
6. 일단락만 됐다. 2025년 하반기 내내 내가 겪은 일과 그것이 남긴 화두에 대해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 둘을 둘러싼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피해자다움’에 대해, 기억과 진실에 대해. 그의 입장에도 서보려 노력했다. 소설 워크숍에 참여하는 게 도움이…됐나? 소설 속 인물들이 그와 나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 사건을 모티브 삼은 이야기를 자꾸 쓰게 됐다. 짐작컨대 합평에서 소설 속 폭력에 대한 반응을 들으며 내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사건을 해석 가능한 서사로 구성함으로써 내 고민들이 정리되고 명료한 무언가가 남길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어림없죠? 소설 쓰는 거 개어렵죠?
그래도 씀으로써 기억의 혼란 속에서 내가 취할 입장과 태도를 찾아갈 수 있었다. 이 글에서, 이 정도나마 그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거듭 쓰며 내 안에 남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고마움. 나의 어떤 면이 투영된 소설 속 인물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참 서툰 인간임을 새삼 떠올렸다. 형사 사건에서는 가해와 피해를 가르는 기준이 비교적 명확하지만, 일상의 사적인 관계에서는 그 경계가 종종 흐려진다는 것도. 물론 흐림이 폭력을 용서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채로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나 역시 언제든 누군가에게 참기 힘든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결점 많은 나를 귀엽게 봐주며 곁을 지켜준 벗들의 다정이 비로소 고맙다.
7. 당신들의 2025년은 어땠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