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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라 Nov 15. 2023

어른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건 가치 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왜 그때 그 말을 했는지 조금 알 것 같고, 세월이 지나야 겨우 그 심정을 알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이해하려고 애썼던 사람은 엄마였다.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엄마에 대한 원망에 비틀거렸다.

번쩍번쩍한 밥상에서 인스턴트 밥상으로 바뀌어버린 것처럼 넘칠듯한 과보호가 하루아침에 없어져버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채 청소년기를 흘려보냈다.

엄마를 지독하게 미워도 했다가 붙잡아도 봤다가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억눌렀던 감정들을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다 보니 엄마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내 불안과 지독한 외로움에 대해 상담받으며 내 문제에서 빠져나오려는 시절에 결혼을 준비하게 되었다.


결혼 전 6년간 독립해서 살았던 집의 보증금은 엄마가 준 돈이었다.

그 보증금을 결혼준비자금으로 쓰게 되었다.

신혼집의 가전, 가구 등을 알아보고, 시가에 드릴 예단 등을 혼자 알아보면서 결정하는 족족 엄마에게 보고했다. 그래야 엄마가 서운해하지 않을 거 같았다.

엄마의 돈으로 하는 결혼이다 보니 아빠와 새엄마와 의논하긴 꺼려졌고, 빠짐없이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서 스트레스는 한층 쌓여갔다.

결혼 준비에 힘들어하는 나를 토닥여주고, 마음 편히 준비할 수 있게 격려해 주길 바랐지만 엄마는 케케묵은 아빠에 대한 분노를 나에게 쏟아냈다.

‘너네 아빠는 너 결혼할 때 얼마 준다고 하니?'

'오빠가 결혼할 때도 내가 돈을 다 대줬는데 너 결혼할 때도 나만 다 해야 되니?’라는 말을 할 때

엄마의 억울한 심정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나에게 준 결혼자금을 아까워한다고 느껴져 너무 치사했고, 서운했다.

그러다 문득 엄마가 준 돈을 아끼려고 애쓰거나 고마워하기보다 

당연한 것처럼 다 쓰고 싶었던 마음을 발견했다.

‘엄마가 나와 함께하지 못한 시간 대신 돈으로라도 해줘야 되는 거 아냐?’

 그랬다. 그 돈은 나를 버리고, 일본으로 떠나버렸던 엄마가 주는 보상금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보상금으로 사랑을 확인받고 싶었다. 

내 행동의 이유가 깨달아지고, 내 심정을 알아주었더니

엄마가 주는 돈을 당연하게 쓰고 싶은 싶은 맘이 덜어졌다.


결혼자금에 대한 일은 일단락 됐지만 몇 차례 고비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쟁점은 엄마와 새엄마 두 분 중 누가 혼주석에 앉을 것인가였다.

아빠가 재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땐  엄마가 혼주석에 앉는 게 당연했지만

그 후로 6년이 지나며 새엄마를 엄마라고 부르게 될 만큼 새엄마와 도톰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결혼할 상대가 나타나기 전에 새엄마와 혼주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때 

혼주석에 앉고 싶으시지만 선택은 나에게 맡기겠다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듣고, 눈물이 찔끔 나면서 내 고민에 짐을 얹지 않고, 배려해 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앞으로 명절이나 어버이날 등 가족모임은 아빠와 새엄마와 함께 하게 될 테고, 

시가 식구들과 자리를 갖게 될 때  두 분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보일 테니

새엄마가 혼주석에 앉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면 내 마음이 편했다.

엄마가 혼주석에 앉는다면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결혼식 전에 두 분을 만나게 해서 어색하지 않게 해야 하고,

새엄마는 내 결혼식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민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선택이든 두 명의 엄마가 사이좋게 혼주석에 앉지 않는 한 최선은 없었다.


혼주석에 새엄마가 앉는 것에 대한 고민을 이모에게 털어놓았을 때

이모는 엄마로 빙의되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며 엄마가 서운해할 거라고 했다.

그러다 이모의 말실수로 내 고민을 엄마가 알게 됐다.

엄마는 서운함을 넘어 그렇게 된다면 내 결혼식에 오지 않을 거라고 하며

 한동안 내 연락을 받지 않기도 했었다.

나는 엄마가 이런 격한 반응을 보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가 아빠의 재혼사실을 알고 나서 

내 결혼식 때 아빠의 재혼상대가 혼주석에 앉아야 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문화에 익숙한 방식으로 아빠가 재혼했으니 

아빠의 재혼상대가 내 결혼식 혼주석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펄쩍 뛰면서 무슨 소리냐고 엄마가 혼주석에 앉아야 한다고 하며 되려 내가 서운해했었다.

알고 보니 그 말은 내 마음을 떠보기 위한 말이었을 뿐 

엄마는 엄마의 자리가 희미해지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난생처음 엄마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혼주석에 엄마가 앉아야 하고, 엄마가 속상해하는 거에 대해 이해한다고 설득하여

 결국 혼주석에는 엄마가 앉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엄마의 반대로 새엄마는 내 결혼식에 오지 못했다.

결혼식 당일부터 신혼여행까지 내가 키우는 강아지를 돌봐주신 

새엄마는 나에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많이 서운했을 것이다.

두 엄마 사이에서 곤란하거나 아빠와 엄마 사이를 신경 써야 하는 일로 속이 들끓었던 7개월이었다.

속이 아무리 들끓어도 시간은 흘러가고 결혼식 날짜는 점점 다가왔다.


결혼식 당일, 아침 일찍 분주하게 움직였고, 화장이 맘에 들지 않은 것 빼곤 순조롭게 흘러갔다.

나는 신부대기실에 계속 있어서 밖에서 엄마와 아빠가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 알 순 없었다.

예식이 진행되다가 부모님에게 인사를 올리는 시간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감정의 울림은 없었고, 식이 잘 마무리되기만 바랐다.

아빠와 포옹을 한 뒤 엄마와 포옹을 할 때 

귓속말로 들리는 간결한 울음 섞인 한마디 

‘잘 살아라’

라는 말을 듣는데 울컥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살면서 엄마와의 주고받은 말 중에 이토록 기억 남는 말이 있을까. 

딸이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이 발끝 아니 저 깊숙한 땅 속 뿌리에서부터 올라온 것 같았다.


엄마는 일본에서 번 돈으로 한국에 있는 아파트를 사줬었고, 내 대학교 등록금을 대주었다.

아빠가 돈이 필요하다고 할 때 보내주기도 하고, 오빠가 결혼할 때 집을 사주는 등..

엄마가 한국에 있었으면 해주지 못할 경제적 도움을 많이 주었다.

 결혼자금에 대해서도 나에게 준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여태까지 고생했던 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고,

지나고 보니 엄마에겐 남는 게 없다고 느꼈을 것 같다.

딸의 결혼이라는 인생에 중요한 과업을 맞이하는 

엄마의 심정은 내가 헤아릴 수 없이 복잡했을 것 같다.

엄마를 이해해 보기 위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본다.

혼주석에 앉지 못하면 결혼식에 오지 않겠다고 한건 희

미해진 엄마의 자리를 되찾지 못할까 봐 아니었을까?

엄마에게 혼주석은 떠나온 엄마의 자리를 되찾고, 

최선을 다해 부끄럽지 않게 딸을 뒤받쳐오며 살았다는 걸 인정받는 상징이었을까?


엄마가 나를 떠났던 게 내가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걸

마음으로 믿기 위해 긴 시간 공을 들였다.

그래야 엄마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공을 들여 노력했던 시간이 무색해질 만큼

엄마의 ‘잘 살아’ 한마디가 이제 엄마사랑을 찾지 않아도 될 어른으로 만들어주었다.

결혼식이 끝난 뒤 엄마에게 내 상처 때문에 엄마를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엄마의 진심 어린 한마디로 내 힘들었던 과거가 눈 녹듯 사라졌다고 편지를 써서 내 마음을 전했다.

엄마는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 편지를 보고 펑펑 울었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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