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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라 Nov 07. 2023

내 삶의 주제

나는 기억한다.

초등학교 5학년, 늦은 밤 침대에 누워있을 때 엄마가 집에 들어왔던 날을

언제부턴가 엄마는 매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가 들어오는 날을 기억하고, 스티커를 달력에 붙였다.

오랜만에 엄마가 와서 내 옆에 누웠을 때 나던 담배 냄새가 불쾌했다.

그래도 엄마의 체취가 그리웠기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중학교 때까지 간헐적인 엄마의 부재와 빚쟁이들의 독촉이 뒤따랐고,

얼마 후 엄마는 일본으로 떠난다고 했다.

등교를 하기 전 엄마가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집에 오면 엄마가 없겠지? 하며

엄마를 한참 동안 바라봤었다.

그래서일까? 내 꿈에는 엄마가 누워서 자는 모습이 종종 나왔다.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달라고 말하지 못한 아쉬움.

아니 아쉬움 보다 더 깊은 그리움과 외로움은 내 삶에 뒤따라오는 주제였다.


그 기억의 흔적은 연애를 할 때 제일 많이 드러났다.

애인과 만날 약속이 미뤄지거나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나지 않으면 불안했다.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길 바랐기에 상대방은 지쳐갔던 것 같다..

결혼을 하면 외로움이 가시지 않을까 싶어 결혼에 집착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항상 먼저 헤어지자고 통보를 하고 나서 후회하고, 다시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다 애인과 결혼이 뜻대로 되지 않는 좌절이 극에 다 달았을 때 헤어짐을 통보했다.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났다.

길을 걷고 또 걸으며

 ‘그녀는 사랑을 하긴 하지만 자신이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만은 도저히 허락하지 못한다.’

라는 책의 문장이 퍽 와닿았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내 갈증과 결핍을 누군가가 채워주길 요구하다가

나를 더 외롭게 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 엄마가 왜 떠났는지 하나하나 이해해보고 싶어 물어보았고,

이혼에 대한 이유를 듣게 되었다.

IMF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아빠의 외도로 인해 방황했고,

파산신고를 한 후 일본으로 갔다고 했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의 외도를 당연하게 여기고

참고 사는 외할머니 처럼 되지 않겠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아빠를 떠났다고 했다.)

엄마의 히스토리를 듣고, 뼈아픈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아빠는 나를 떠나지 않았고, 함께 살며 버팀목이 되어주었기에 아빠에겐 고마웠고, 엄마를 많이 원망했었다.

비밀로 숨겨져 있던 아빠의 외도를 초등학생 때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상황을 이렇게 만든 아빠를 비난하고,

나를 떠난 엄마도 미워하면서 사춘기 시절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실을 몰랐다고 행복했을까?

엄마가 없던 사춘기 시절 항상 멍했고, 종교에 의지하며 내 외로움을 달랬다.

그리고 엄마를 탓하며 버림받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진실을 아는 타이밍은 내가 정할 수 없었지만

진실을 알게 된 후 하나씩 천천히 깨달아졌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떠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게 엄마와의 관계가 조금씩 달라졌고,

몇 번의 연애를 거쳐 마지막 연애를 했다.

내가 사는 집에 애인이 놀러 오기로 약속했는데

갑자기 애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고, 당연히 장례식장에 가야 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서운함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연락을 자주 해주고,

장례가 끝난 후 바로 나를 만나러 와주었다.

그는 내 서운함에 대해 물어봐주고, 들어주었다.

나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그 외로움을 받아주었던 그에게  

‘보고 싶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에게 했어야 할 말.

그 말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20년 넘게 걸렸다.


엄마의 부재로 블랙홀 같았던 외로움의 공간이

남편으로 채워지고 있다.

결핍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는 작은 틈만 있어도 엄마 탓을 했는데

안정된 삶이 이어질수록 엄마의 입장을 더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의 내 나이, 엄마는 30대 후반에 일본으로 갔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일본에 있으면서 내 학비를 대주고, 내 결혼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내가 외로웠던 시간을 채워주는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내가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

그게 엄마의 사랑이었다고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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