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적 체벌과 기독교인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찰

-3편

by Remedy

왜 성경은 아이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할까? 이것은 성도가 성도에게해야 하는 의무에서부터 나온다. 성도는 다른 성도가 믿음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은 상대방이 화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며, 좀 더general 하게 가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아이는, 십계명에 의하여, 부모를공경해야 한다. 그 뜻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그 순간아이는 죄를 짓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죄이고 남의 것을 보고탐하는 순간 죄인 것 처럼, 부모에게 순종치 아니하는 마음을 품는 순간 죄를 짓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아이가 화가 나서 부모를 해하는 생각이나 짜증난다, 혹은어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한다면, 부모는 아이를 “노엽게” 함으로써 아이가 죄를 짓게 만든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부모에게는내 아이를 죄 짓게 한 죄가 생기고, 아이는 십계명을 어긴 죄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가 노여워지는 순간,아이와 부모 둘 다 죄를 짓게 된다. 기독교는 죄를 짓지 않으신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기에, 이러한 행동은 “기독교인 답지 못하다”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항상 부모에게, 아버지에게,어머니에게 “이상적인” 것을 요구하곤 한다. 이 “이상적인” 것들을인간의 한계로 보고 인간의 한계로 끌어내려 버리면, 결국 기독교인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것이 있나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기독교인이란 애초에 “하나님과같이 되기 위한” 사람들인데, 그 “하나님과 같이”라는 이상을 “인간과같이”로 바꿔버리니 행동에 다름이 없는 것 아닐까? 인간인데어떡해, 화나는데, 짜증나는데 어떡하라고 라는 말은 결국자신이 기독교인을 부정하거나, 아직 멀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 일 뿐이다. 당연히, 하나님은 “완벽” 하시기에, 인간은 웬만하면 절대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 지는 유일한 초점을 끌어내리라는 뜻은 아니지 않는가.

두 번째로 완전히 다른 것을 이야기 해보자면, “관계”와 “관계의 명칭”은 완전히다른 것이다. “사귀는 사이” 라는 것은 말 그대로 “사귀는”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이지 그것이 좋은 관계, 혹은 나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누구의 “남자친구”, “여자친구”, “남편”, “아내” 라는 말도 마찬가지다.그 말 자체는 당사자들이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누군가와 가지고 있는 관계의 “명칭” 일 뿐이다. 이명칭들이 소중해지고 중요해지는 이유는, 그 명칭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명칭 안에서 가지고 있는 그말들의 추억, 행복, 편안함 등 이다. 평생을 바람둥이 남친, 학대하는 부모, 왕따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살던 사람에게 와 친구 있어서, 남친 있어서, 부모 있어서 좋겠다 라고 해봐라, 바로 얻어 맞을 것이다. (해봤고, 실제로 맞았다.) 결국 “부모”와 “자식”, 더 나아가서 “가족”도마찬가지다. 부모라는 말은 “나를 낳으신 분”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말도 포함 되지 않는다. “가족” 또한 “비슷한 DNA로엮어진 사람들” 외에는 별 의미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부모가, 가족이, 동생이, 형, 누나가, 아빠가,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촌동생이의미가 있는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추억과 행복 등등의 좋은 감정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단어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면, 앞에 형용사를 붙이면된다. “엄한” 아버지,“착한” 엄마, “바보 같은” 동생, “귀여운” 사촌동생, “믿음 있는” 남친, “사랑스러운” 여친 같이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부모가 단순히 “부모”가 아닌 “좋은부모”, “격려하는 부모”, “길잡이 부모”로 표현하고 있다. 즉, “나를낳아주신 좋으신 분”, “나를 격려해 주시고 나를 낳아주신 분”, “나를낳아주시고 길잡이가 되어주시는 분” 등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육체적 체벌을 하여 좋은 수식어를 가질 수 있는 관계를 좋지 못한 수식어, 예를 들어 “엄한”이 아닌 “두려운”, “착한”이 아닌 “미운”, “바보 같은” 이 아닌 “미친”, “귀여운” 이 아닌 “메스꺼운”, “믿음 있는”이 아닌 “믿음따윈 개나 줘버린”, “사랑스러운”이 아닌 “증오스러운”의 수식어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절대로 기독교 적인 “관계”가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모든 육체적 체벌이 옳지 못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아니다. 다만 지속적이고, 상황을 악화만 시키는, 아이는 납득을 할 수 없는 식의 처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수학은 몇 학년 까지 밖에 못 배웠길래 잘못 = 매 라는 식을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또 정말로 어이없는 케이스가 참으로 많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옳은 이유로, 적지만 efficient하게 아이를 처벌하는부모도 있다는 것을 인정 하기는 한다. 그럴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것은 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않으니까.

내가 쓰고 싶은 것을 다 쓰지는 못했다. 만일 시간이 되고 생각이조금 더 정리 된다면 여기에 더하여 좀 더 많이 쓰고 싶다. 부모와 아이 중 왜 성경에는 아이가 지켜야할 것이 더 많은지, 내가 방금 쓴 것은 전부 문제점에 대한 것이니 어떤 해결방안이 있을 수 있는지등등,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내가 매우 오래 전부터 생각 해온 것이기에 정말 많다. 다만 아직 모든 것을 깨닫지 못했고, 배우지 못하였기에 이만 여기서줄이려고 한다. 원래 15페이지의 괴물이 될 것 같았지만굳이 여기서 줄이는 이유는, 더 쓰면 재미가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도 있지만, 나는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하여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간나는 내가 위에서 언급한 이유들로 인하여 육체적 체벌이 아이들의 행동을 바꾸게 하려는 Primary Source인것은 비기독교적이며, 그러므로 육체적 체벌을 합리화 하는 식의 설교는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다. 물론, 내가 언제나 말하듯, 이것은나 혼자만의 생각이며, 그렇기에 틀릴 수도, 물론 옳을 수도있다. 그렇기에 혹시 지적할 것이나 반발 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메시지를 날리던 코멘트를 달던 상관없다. 틀리면 고치고, 옳으면 배우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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