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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medy Sep 08. 2017

간만의 일기

일기

  

나의 가장 큰 문제점은 편안함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추구만 하면 문제가 없을 텐데 추구가 아닌 신처럼 떠 받들고 있다. 나에게 편안함이란 내가 추구하는 최상의 감정이며 그렇기에 "친구"란 편안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다른사람이 보기에 복잡한 방법으로 생각을 하는 나는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하는 것도 남들보다 많기에 이러한 생각들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했었다. 또한 나의 편안함은 나를 게으르게 만들었다. 집에 누워 유투브와 웹툰을 보며 가끔씩 게임을 하고 노는 생활은 얼마나 편안한가. 그러나 한 2달쯤 그렇게 살다보니 나의 모든 능력치가 1로 리셋되는 기분이 들었고, 곧 실전들을 통해 이것이 기분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편안함과 능력치 유지 및 상승은 양립이 불가능 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서있는 중이다. 나의 1년을 게으르게 보내며 다음 학기에 지금보다 더욱 망가진 모습으로 갈것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성장해 한번 더 부딫혀 볼 것인가.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이것을 들었을 때 별 생각도 않하고 당연히 성장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만큼 편안함의 노예이기에 발전과 퇴화를 진지하게 놓고 고민을 해보기 시작했다. 사탄은 나에게 조금만 더 뒤로 가면 낙원이라 이야기 하지만 신은 나에게 처량한 아이를 보듯, 망가진 장난감 보듯 측은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그래, 내가 뭘 하면 될까. 이 1년을 어떻게 보내야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만족 할 수 있을까. 나는 기준이 높은 편이라 나는 나 스스로 기준을 세우지 않는 편이다. 이는 나 스스로는 이 기준점을 죽었다가 깨어나기를 수십억번을 해도 지키지 못할 것을 이미 알기에 포기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이기려고 할때의 집착력을 보고 늘 놀라곤 한다. 나에게 그렇게 살면 네가 이루지 못할 것은 없을거라 말한다. 하지만 내가 그리 할수 있는 이유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내가 아닌 신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을 믿고 행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믿는 데에서 나오는 그 강렬한 힘은 "나"라는 존재에게는, 스스로 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이는 나의 죄책감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인이 된지 3-4년이 되어가는 지금에도 여전히 나 자신을 변화하지 않은 전처럼 생각한다. 신을 비방하고 다른 사람 짖누르기를 밥먹듯이 했던 그 시절의 나 말이다. 사람들은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신과 나는, 그리고 내 주변의 소수는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스스로 난 착하다라고 말하는 것, 혹은 그러한 말을 듣고 인정하고 기뻐하는 것은 나에게는 거짓 그 자체인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아마 웃어 제낄게다. 이놈이 착하다고? 얘가 이기적이지 않다고? 나는 그래서 무의식중에 남을 섬기려는 무언가가 있다. 그냥 단순히 섬기는게 아니다. 내가 뼈가 빠져 움직이지 못할때까지, 남은 멘탈이 가루가 되어 유골 흩날리듯 날아가 버릴때 비로소 섬김을 멈춘다. 이는 나에게 더이상 나의 감정이 중요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편안함은 중요하지만 타인의 감정은 나의 편안함 이상으로 중요하다. 타인의 삶은, 세상 그 어떤 사람도 나 보다는 나은 쓰레기일것이에, 나의 삶 보다 무한하게 더 중요한 것이다. 

  

나는 또한 나약한 사람이다. 사람을 너무나 쉽게 믿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 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에게 몇천번을 속은 것 처럼, 인간의 죄송해요를 기억도 못하실 만큼 들으셨음에도 인간을 믿으시듯 나도 저 인간이 거짓을 말하는 것이 눈에 보이면서도 그들을 믿게 되는 경우가 생겨버렸다. 아, 수십번이다. 최근에도 나는 나에게 호의를 베푸려는 듯한 누군가를 믿어 뒤통수를 오지게 쳐맞았다. 뒤통수를 맞았으니 그래, 화는 내지 말고 조용히 연을 끊자 했지만 이놈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 바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다. 나의 평판은 좋으니 나와 사이가 안좋아지면 무슨 구설수가 생길지 몰라 마치 나를 걱정하는듯한 뉘앙스로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 한 것이다. 음 그래. 만일 내가 저 녀석의 굳은 입술과 일부로 움직이지 않는 뻔뻔한 눈동자를 보지 못했다면, 당당하다 말하려는 듯한 저 들어올린 팔꿈치를 보지 못했다면, 일부러 조금 딱딱하게, 일부러 자연스레 굴린 말투를 못들었다면, 그래 내가 그냥 병신이였다면 아 이녀석이 나와의 관계가 망가지는 것을 무서워 하는구나 하고 넘어가줬을텐데. 자신을 걱정하는 다른 사람을 통해 내가 나쁜놈이다, 내가 피하는 놈이다 라는 인식을 주고 스스로의 안위를 챙기는 짓거리나 하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이녀석의 진정성이라는 코빼기도 없는 사과를,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 하는 사과를 나는,아 제기랄 나는,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뻔뻔함을, 그 이기적인 마음을, 그 과시욕을, 뻔히 보고 또 보고 느껴도 나는 여릴대로 여려져 그래 저놈도 자기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어린 강아지가 되었다. 

  

내가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계획을 할 때 모든 것은 간단하지만 복잡한 생각과 계산을 걸치게 된다. 그렇게 나온 결정은 나에게, 또한 타인에게 완벽한 상황을 만들어주게 된다. 하지만 신은 나에게 이것을 그만둘 것을 요구했다. 나보고 자기가 나한테 준 달란트를 쓰지 말란다. 그 달란트를 벼르고 벼르라 말할 땐 언제고 이제와서 포기하란다. 신의 변덕은 목사님들도 아마 모르실게다. 그러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이끈다느니, 합하여서 선을 이룬다느니, 신은 멀리 보게 하지 않고 바로 앞만 보게 한다느니 하는 말만 하시지. 나에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란 공포 그 자체라는 것을 잘 앎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생각과 계산함을 포기하시기를 요구하시다니. 

  

나는 내가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이 일종의 스킬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나의 멋진 연기를 보고 반하는 것이다 라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한다 말했던 나의 모습은 가짜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수련회에서 그들은 나의 한 부분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의 한 부분을, 신의 한 조각을 보고 다가오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기에 그들이 말하는 나는 내가 아님 역시 알고 있다. 아마 내가 기독교인이 된 이후 여자친구를 사귀게 됨 역시 우연이 아닐것이라는 농담아닌 농담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비록 그 이유가 죄책감이라 해도 나는 그들을 섬겼고, 그 섬김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은 섬김에서 그들은 신의 형상을 본 것이라. 나는 아무나와 친해 질 수 있다는 자신감, 아니 자만감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는 나의 모습이 아닌 신의 모습을 보고 가까워 진 사람들이기에 나의 모습만 온전히 남았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벌거벗겨진 아이와도 같은 꼴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수련회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나는 스스로 이룬 것이 없다는 것 정도일게다. 걍 하라는 대로 했는데 쨘 하고 받은 것이 대부분 이라는 사실은 나를 짜증남과 동시에 두렵게 만들었다. 세상은 스펙과 능력을 요구하지만 난 내 개인의 능력이라곤 코빼기도 없는 놈이다. 이래서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나보다. 아무것도 없는 자가 무언가를 이룰 때 비로소 그것이 신께 영광이 됨이니. 

  

나는 성경을 많이 읽지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많이 찾거나 강해를 읽는 편도 아니다. 내가 성경에 시간을 쏟는건 이젠 1주일에 한 1-2시간 밖에 안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게다. 하지만 나보다 신앙생활을 훨씬 더 오래한 사람들은 나보고 대단하다고, 성경을 뭘 그렇게 깊이 파냐고 놀란 거북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원래는 아니 하나님을 사랑한다 기독교인이다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깊게 안파? 라며 그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의문을 가지곤 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어쩌면 이들은 나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탄탄하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 믿음은 성경을 읽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을 앎에서 오는 것임으로, 또한 나의 믿음은 지식이 베이스 임으로 지식이 아닌 관계가 베이스인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러니까 월등치 못하고 열등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도함을 등한시 하고 성경 찾기를 중요시 하는 믿음은 직접적인 관계가 아닌 간접적인 관계만을 추구하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보지 않고 믿는 자에게는 복이 있는 것이다. 성경을 보고 관찰해야 비로소 신과 대화를 할 마음이 생기는 사람과 성경보다는 신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 하는 사람의 믿음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믿음의 준비, 그러니까 복음을 전할 준비는 애초에 인간이 하는게 아니다. 머릿속에서 성경구절이 울렸던 것이 몇번이고 모르는 성경구절을 외운 적은 또 몇번인가. 올바른 관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 순종 이야 말로 언제든지 신에 대한 질문을 올바르게 답할 수 있는 최상의 "준비"인 것이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하고 딱히 기도는 하지 않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쩗. 

  

나는 이상하게 "순장을 때려치다"라는 표현이 입에 착 달라붙는듯한 느낌이 든다. 그냥 그만둔다거나 새가족 팀으로 옮겨갔습니다 라고 온순히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려치다"라는 그 강렬한 어구가 참으로 맘에 든다. 

  

이번 수련회에서 나는 울며 새가족팀에서 내가 섬김에 순장할 때보다 더 긴장되고 두려움을 알게 되었다. 10명 남짓한 사람들도 못챙겼는데 100명을 무슨 수로 챙긴단 말인가. 압도적인 두려움, 내가 그 누구에도 표현하지 않은 답답함이 분위기와 피곤함을 통로삼아 미친듯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업드려 빌고 또 빌었다. 제발 나를 사람 없는 곳에서 평생 지내며 조용히 죽게나 해달라고. 미쳤다고 나를 사람들에게 보내시냐고. 내가 교회에 폭탄을 숨겨 새가족들을 폭파시킬지 어떻게 아냐고. 아마 기도를 하면서 제일 많이 했던 말이 난 망한 새낍니다, 두번째는 난 못해요, 세번째는 도대체 뭔 생각으로 나에게 여기를 가라 하신겁니까 일테다. 웃기게도 신은 나에게 딱히 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뭔가 피식 웃으신다는 느낌, 마치 내가 대빗에게 처음으로 계산하는 것을 보여주기 직전에 지엇던 "넌 아직 나를 모르는구나" 하는 자신감에 찬 웃음을 느꼈을 뿐이다. 나의 이 능력은 신에게서 받은것이니 아 그는 나보다는 훨씬 잘하시지 않을까 하는 진정한 깨달음, 그러니까 말로만 하는 우리 하나님은 대단해! 가 아닌 믿음이 생기게 되었고 나는 그 후 기도를 감사로 시작해 감사로 끝내게 되었다. 

  

나에게 신은 구원자니 사랑이시니 하는 것 보다도 보스에 가깝다. 갑질하는 사장같은 느낌이랄까. 신이 까라면 까야지 라는 깨달음은 사회에서 가장들이 사장이 까라면 까야지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게다. 아무것도 안시키고 안굴리시면 내가 이런 말을 안하지. 미친듯이 굴리시잖아. 이상하게도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이런 글을 쓸때 그가 호탕하게 웃으시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가 궁시렁 대면서도 나름 열심히 하는 츤데레, 츤레미라는 것을 아셔서 인지, 아니면 너가 뛰어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같은, 그니까 튀는 손오공을 인자히 내려다보는 삼장법사 같은 느낌이랄까. 하하하 튀어봐 이새꺄 하하하 하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마치 도망치는 3살짜리 아들을 못잡는 척 느려 터지게 걸어가는 다리만 2미터인 아버지 처럼 말이다. 아이쿠 우리 아들, 너어어무 빠르네 하.하.하.

  

핀적 없는 맥주는 여전히 땡기고 마신적 없는 담배는 여전히 나를 유혹한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쓸게 많았지만 그냥 훈훈하게. 그러니까 결론으로는 신을 의지하며 그의 뜻을 알아가려 하는 것이 계획이라는 매우 기독교적이면서도 나의 마음 반푼어치를 대변하는 문장으로 오랜만에 쓴 일기를 끝마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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