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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medy Oct 11. 2017

The Imperfect Perfection

일기와 생각

나는 노래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노래를 듣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글을 끄적거리다보면 사랑노래가 참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이들은 완벽한 사랑을 노래한다. 자신만 행복한 사랑에 대해서, 이기적인 사랑에 대해서 자랑하듯 노래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달한,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서로이기에 사랑하는 그런 완벽한 관계를 노래한다. 불완전한 모든 부분까지 사랑하는, 아니 불완전 하기에 사랑하는 그런 불완전한 완전성을 노래한다.  


나는 사실 굉장히 어이가 없었던 것이 바로 남성이나 여성이 관계중에 있을 때 해야만 하는 말과 행동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의 "내가 왜 좋아?" 라는 질문에 정답은 "너라서 좋아"이지 "네 몸이 너무나도 육감적이여서 끌려"가 아니다. 이미 사람들은 육체적인 관계 뿐인 사랑은 더러운, 혹은 진실성이 없는 사랑이라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성적으로 끌리지 않고 편하기만 한 관계는 친구로 끝나지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몇년 동안 친구로 지낸 사람이 갑자기 이성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 사람이 성적으로 끌리기 때문이지 편해서가 아닌게다. 그러니 사실상 편하다는 것과 육감적이여서 라는 이유는 둘 다 관계에 정답이 아닌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섹시해서 좋아하면 쓰레기고 여성이 남성을 편안해 하면 어장관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만일 에로스도 사랑이고 플라토닉도 사랑이라면 왜 이것들이 각각 있을 때는 사랑이 아닐까? 아니 심지어 둘 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방적이라면 왜 틀린 관계라고 하는 걸까? 


여러 사랑노래를 듣다보면 나는 와 이노래는 차라리 찬양으로 쓰여도 좋을 것 같다 라고 생각되는 곡들이 많다. 사실상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여서 좋다"고 말한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완벽하고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그분이 주시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 하며 이러한 불완전한 사랑은 불행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러한 사랑을 요구하고 스스로 갈망한다. 그렇게 시작한 관계는 무조건 적인 사랑 보다는 집착이나 되려 무관심으로 변하기 일쑤이고 사람들은 스스로 불완전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를 "사랑이 식었다"라고 이야기 한다.  


만일 세상이 정말로 그들이 노래 하듯이 에로스 적인 사랑과 플라토닉한 사랑이 아닌 존재 그 자체의 사랑을 한다면, 그렇게 만인이 아가페적인 사랑을 한다면 그들은 되려 그러한 사랑을 노래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한 사랑을 꿈꿀 이유도 없을 것이다. 망가지는 관계도 없을 것이고 헤어지는 연인도 없을 것이며 상처받는 사람들은 현저하게 낮아질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는게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노래가 스스로 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봤을 때 너무나도 아름답고 멋진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호르몬의 장난, 그것으로 인해 머리가 뒤집히고 실수를 하게 된다. 그러다가 사고가 나던 늙게 되던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소훌히 하게 된다.  


나는 몇년 전에 한국의 외도하는 남성의 70%이상의 가족이 화평했다는 것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약 700명의 남성의 질문지를 가지고 통계를 낸 것이라 모든 남성이라 하기에는 어렵지만 세상에는 자신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방법으로 성욕을 풀어 욕구가 사라져서 더 화평하게 된 케이스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가 노래하는 사랑을 하고 있지 않는것이다.  


여성은 남자의 사랑이 식었다고 이야기를 자주 한다. 남자가 더이상 자신을 갈망하지 않고 편안하게만 대해주고, 열정적인 섹시한 에로스가 가고 늙고 재미없는 플라톤으로 바뀌니 더이상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아 서로의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필연적으로 식어버리는 에로스와 쭈구리 플라톤은 결국 그 어느도 인간이 갈망하는 사랑이 아닌것이다. 사람이 갈망하는 것을 사람이 아닌 신에게서 찾는 다는 것은, 그리고 그 신 때문에 인간이 갈망하는 에로스를, 쉬게 하는 플라톤을 과감히 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의 사랑을 느낀 사람이 다시 그 둘에게 반하지 않는 이유는 아가페가 그 둘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과 신의 사랑이 다른 또 하나는 플라토닉과 에로스적인 사랑은 일방적일 수 있으나 아가페적인 사랑은 관계 안에서 보여지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앞의 두 사랑은 일방적일 수 있기에 그것이 부담이 되고 모욕이 되는 경우가 있지만 아가페 적인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기에, 서로를 포함하는 것을 갈망하기에 그 누구에게도 부담과 두려움, 모욕을 주지 않는다.  


그러니 생각을 다르게 해본다면 사람들이 부르는 평생을 사랑하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모든 노래들은 사실상 하나님에게 부탁을 하는것이다. 내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 이를 신에게 고하느냐 관계를 끊어버리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불완전한 모습을 완전하다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러니까 그 불완전함이 누군가 안에서 온전해 지는 것은 신의 사랑 안에서 뿐이라는 말이 된다. 


끝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도 놀만큼은 놀았다고 생각을 한다. 큐피드와 거래를 하며 그에게 휘둘려 살았을 때로 돌아가지 않을거라 다짐할 수 있는 이유는 신 안에서는 그 화살이 옳은 표적을 향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내가 쏘는 것이 아닌 그가 조준해주고 쏘는 것 까지 대신 해주는 것, 그래서 수많은 표적 중 하나가 아닌 단 하나의 과녁에 단 하나의 화살이 영점에 정확히 맞기를 기도하는 것, 그리고 자신 또한 맞기를 주저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 배우자 기도라고 생각한다. 나 이러이러한 과녁은 좀 아닌거 같아요 가 아니라 일단 겨눠주시지요 라고 하는 것, 활을 살포시 내려놓아 두눈을 가리고 한바퀴 돌고 그가 멈추시는 곳을 향해 최대치로 달려가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관계이자 내가 도달하고 싶은 믿음이다. 


 나는 그 Perfect Imperfection조차사랑하기를 원하며 나의 그것 또한 사랑받기를 갈망함을 주저없이 기도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사랑이 아닌 그가 해주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 머리쓰고 보고 조절하는데에는 이젠 진절머리가 나서 가라는 대로 가고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 할 수록 닳아 없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채워지고 성장하고 굳건해지는 관계는, 수많은 노래들이 이야기 하듯이, 신의 사랑 밖에는 없기에 그의 사랑 안에서, 그의 사랑과 함께, 그로 인해 서로를 사랑하는 무언가를 느껴보고 싶다.  


아마 나의 이 글은 내가 여자친구를 간절히 원하는 구나 라고 생각이 들게 할 수도 있는 글일 수도 있겠다. 이는 틀린말도, 옳은 말도 아니다. 내가 깊은 관계를 갈망하는 것은 맞다. 세상이 생각하는 여친이기 전에 친구이고 싶고 친구이기 전에 동반자이기를, 기대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생기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는 아무나 사귀겠다는 말 따위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제는 그러한 미친짓을 하지 않겠다는 선포같은게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내가 만일 미친짓을 하려 하거든 대차게 싸대기나 때려달라는, 마치 그래, 입교식 같은 것이다. 내가 어긋나거든 나에게 모진 말을 해서라도 정신을 차리라 해달라는 구걸이자 부탁이랄까. 그래, 믿음은 나를 배신하지 않으니 나는 실패하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으시는 분을 차라리 믿으련다. 답 없는 관계를 맺기 보다는 계획안에 있는 무언가를 맺기 노력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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