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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medy Nov 07. 2017

물음표 - 수수께끼

일기

보통 신을 믿는 사람들은 그 신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두려움과 고통과 고민을 벗어버린다.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나를 보호해 주고 이해해주고 곁에 있어준다는 것으로 위로를 받는 것이다. 

나에게는 신의 존재가 두려움의 대상이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두려워 할 것이 없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이 공허하고 두려워하고 자만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곤 한다. 근데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당당하다. 자신의 의에 스스로가 맞추면 되기에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고통스러워 할 필요도, 그가 뭘 원하는지 생각하는 고민도, 그가 나를 어떻게 괴롭게 할지에 대한 두려움도 그들은 느낄 필요가 없다. 


물음표라는 제목을 지어줬다. 왜 물음표 일까. 나의 믿음은 굳센 것이고 내 감정은 명확한 것이여야만 하는데 하루하루 늘어만 가는 붉은 물음표와 거꾸로 서있는 푸른 물음표는 다가서지도 못할 냉소와 딱딱함으로 나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이런 두려움들은 비단 내가 신을 믿기에 있는 것이라. 


사람을 믿는 다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건 분명한듯 하다. 티 없이 맑은 사람 어디 하나 없나 둘러봐도 글쎄. 내가 의심이 많은 건지 그저 사람을 잘 아는 건지 이제는 명확히 알수조차 없다. 뻔한 무언가가 뻔하지 않았음을 바라는 나의 뻔한 마음은 그들의 뻔한 거짓말로 돌처럼 굳어진 무언가에 생채기를 남긴다. 

신비로움은 그저 겉치레였던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완벽하지 못함을 믿기에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었고 다시 믿었고 어떻게든지 붙잡아보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이 자만인지, 아니면 그저 합리화와 과소평가가 섞여 가공된 무언가인지 점점 헷갈리기 시작한다. 

아 피곤하다. 


보이던 것들이 모여 보이는 것 이상의 텍스트를 이루어 낼때, 그것을 잡을때, 그것을 볼때 나는 극도로 피곤함을 느낀다. 허구의 것들이 형상을 만들고 나의 고통이 실제가 되어 그 피곤함, 그리고 그 형상과 함께 춤을 출때, 나는 허탈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실소가 미친듯이, 태풍안의 물고기들처럼 뿜어져 나올때 나는 부정하던 것들을 비로소 인정하게 된다. 


난 옳았어. 


신을 믿는 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신비한 종교에 몸 담은지 몇년만에 알게된 것이가. 누군가는 바뀌어도 결국 그들은 바뀌지 않기에, 나는 바뀌어도 결국 다른것이 없기에 그것아닌 무언가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희망은 없다.

 

나는 내가 틀린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곤 했다. 나는 보아야하고 견뎌야하며 옳아야 하고 알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틀리고 싶다. 틀려서, 제발 이번은 틀려서 내가 나 아닌 무언가에 희망을 찾을 수 있으면. 

그럼 무언가가 달라지긴 할까. 


최근에 나는 뛰어나다는 소리를 여러군데에서 들었다. 아니, 내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나는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뛰어나다는 칭찬을 사모하고 즐기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칭찬이 나를 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칭찬, 그 수백개의 의미없는 칭찬들은 나를 나의 자리에 못이 박혀 서서히 죽어가게 할 뿐, 나를 한걸음도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수수께끼이자 물음표이다. 내가 하는 것, 내가 보는 것, 내가 느끼는 것, 내가 아는 것, 보는 것, 읽는 것, 쓰는 것, 보는 것. 


그리고 보는 것. 


보지 못하기에 희망이 있었다고 생각을 했다. 모르잖아. 내가 모르기에 다르다는 착각으로 뒤집어 씌울수 있었다. 느끼지 못하기에 아닐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고, 알지 못하기에 예상과 다를거라는 불안감을 즐길 수 있었다. 


난 쉬운게 싫다. 어려우면 좋겠다. 그가 어렵고 또 어렵고 어려워서, 그저 어려워서, 그러나 행복해서 어려웠으면. 어려워서 행복했으면. 쉬우면, 답이 정해져 있으면, 사람은 다 그런거면, 그가 쉬운거면, 사실 답은, 희망은, 믿음은 그냥 없는거다. 


난 쉬운게 좋다. 내가 쉬웠으면 좋겠다. 내가 쉽고 또 쉽고 쉬워서, 그저 쉬워서, 그러나 즐거워서 쉬웠으면, 쉬워서 즐거웠으면. 어려우면, 답을 모르겠으면, 내가 항상 그런거면,  내가 어려운거면, 사실 답은, 행복은, 편안함은 그냥 없는거다. 


사실 사랑 노래라는건 가사가 무엇이던 상관 없는 법이다. 욕이 가득해도, 슬픔이 타고 흘러도, 분도가 터져나와도, 서러움이 뿜어져도, 아픔이 삐져나와도 그걸 사랑 노래라 이름 붙인다면 그건 그냥 사랑 노래다. 김이 빠져도, 그저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붙잡지 못해도, 알수 없어도, 떨려도, 무서워도, 그저 이름만 그럴싸하게 붙이면 애절하고 불쌍하고 처절한 하나의, 한 막의, 한 극의, 한 절의 처량한 사랑 노래가 된다. 


불안함, 두려움, 슬픔, 우울함, 괴로움, 그리고 허탈함은 그저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기에 존재하는 무언가이다. 그가 원하는 것을 보았기에 불안하고,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 두렵고, 그와 내가 맞지 않아 슬프고, 그가 나의 기쁨을 앚아가기에 우울하며, 그의 괴로움 때문에 괴롭고,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어 허탈하기에, 이는 그가 없다면, 차라리 내가 그를 몰랐더라면, 차라리 내가 어둠안에 그대로 있었다면, 밝은 빛을 몰랐더라면, 그저 무지한 쓰레기통안의 썩어가는 무언가 였다면. 


옛 사람이 가도 새 사람이 온다는 말은 옛 사람이 의미가 없어졌기에, 앞에 더 중요한 무언가가 사라졌기에 아무런 위로도, 희망도, 간절함도 없는 무의미한 말일 뿐이다. 중요했던 무언가가 중요하지 않아지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중요하지 않은 무언가가 중요해지는건 한 세월이기에, 다시 한 세월을 보내며 중요한 무언가를 만들기엔 그 모든것이 결국 으스러져버릴 것들이기에 나는 흩날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린 그 무언가를 알수 없는 표정으로 하염없이 바라만 본다. 나와 그것 사이에는 이젠 내가 건널수 없는, 그리고 그건 건너오지 않을 실체 없는 어두운 벽이 생겨버린다. 그저 바라보다가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천천히 뒤로 물러선다. 마치 물러섰기에 그것이 돌아올것이라는 헛된 망상을 하듯이, 미련을 하나도 버리지 못한채 개미 한걸음만큼, 개미 두걸음만큼 느릿느릿, 발을 끌며, 팔을 휘저으며, 그러나 고개는 그것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뒤로 돌아선다. 뒤에 무언가가 있을것이라는 희망 따위는 없기에, 이젠 그저 한참 황량한 곳을 바라만 봐야 함을 미리 알기에 앞을 보고 걷기 보다는 뒤로 걷는걸까. 돌아왔을때, 그도 나도 건너지 못하는 벽을 건너주었을 때 뛰어 안길수 있게 준비하려 뒤로 걷는걸까. 그는 먼저 가버렸지만 나는 가고 싶지 않는다는걸 그가 보았으면 해서 뒤로 걷는걸까. 


물음표, 나의 수수께끼다.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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