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순자의 성악설을 믿었던 순간이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심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교육과 수련을 통해 선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뭐, 열 살의 나이에 이런 성악설을 순자가 얘기한 것인줄 알지는 못했지만.
사실 그때의 나이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여덟에서 열 살 사이쯤으로 해두자. 아홉 살이 적당할 것 같다. 이전 글에서 말했던 다락방이 있던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서너집이 여유 있게 간격을 두고 함께 모여 있었는데, 우리는 각자의 마당을 가졌다. 당연히, 우리 집 앞에도 적당한 크기의 마당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아리 한 마리를 샀다.
내가 애정을 준 최초이자 마지막 애완동물이었던, 노란 병아리.
나는 그 병아리를 정말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동네 친구들은 내가 키우는 병아리를 한 번씩 만져보고 싶어했는데, 그러면 선심쓰듯이 한 번만 만져보라고 하고는 다시 돌려받았다.
대문을 나서면 긴 골목길이 있었고 골목길의 끝에는 도로가 나왔다. 반대쪽 골목길은 다른 길로 이어져 사람들이 사는 주택가가 있었다. 나는 골목길을 따라 동네애들이랑 도롱뇽,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고, 방학이면 놀러오던 옆집 할머니네 손주들과 담벼락을 뛰어 오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외출하고 돌아왔는데, 늘 있던 병아리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집안부터 마당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그것의 존재는 묘연했다. 골목을 뛰어다니며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내 병아리를 봤냐고 물었다. 다들 모른다고 했다. 그러다 어떤 아이 하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네 병아리, 놀이터 모래 사장에서 봤어.
OO가 모래에 묻은 것 같아.
나는 허겁지겁 우리가 자주 모여 놀던 놀이터로 뛰어갔다. 그곳에서 마주친 OO를 보고, 울며불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살려내, 살려내란 말이야. 내 병아리 살려내.
모래에 주저 앉아 한참을 울다가 깨달은 사실은, 생명의 온기를 잃은 것은....어떤 방법을 써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몇몇의 아이들이 병아리를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더 괴로워 해야만 했다.
타인에 의해 소중한 것이 짓밟힌 경험은 그후 다른 생명을 키우는 것을 두렵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병아리를 또 기른 적이 있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무료하고, 늘 집에만 있었던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인도에 살 때였다.
병아리는 보라, 파랑, 초록, 분홍, 노란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판매하는 이가 색을 입혔으리라...)
다섯 마리의 병아리를 새장 속에 넣어두었는데, 하루에 한 마리씩 죽었다.
자고 일어났는데, 한 마리가 보이지 않자 아이들은 병아리가 어디 갔냐고 물었다.
어린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자기 집을 그리워해서 집으로 보내줬다고 했다.
그렇게 다섯 마리가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일주일 안에.
추운듯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은 모습은
오래전 내가 만났던 어린 것의 죽음과 다를 바 없었다.
비닐 장갑을 끼고, 새장 속에서 죽은 병아리를 한 마리씩 꺼낼 때의 그 느낌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처음부터 병이 들어왔던 것인지, 내가 잘 보살피지 못한 것인지 모르지만
잘못된 보금자리로 찾아든 생명에게 미안했다.
처음부터 집으로 데려오는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아이들은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난 자신이 없다.
너희 둘 키우는 것으로도 엄마는 바쁘다. 그러니 나중에 커서 너희가 책임질 수 있을 때 키우면 좋겠다, 라고 얼버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