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통의 이름
- (1)에 이어서 -
https://brunch.co.kr/@tannenbaum/27
직원들끼리의 여름 갈무리 파티가 있기 며칠 전.
여느날처럼 르떼는 출근하자마자 마치 커피 머신 앞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자리를 잡고 섰다. 숨가쁘게 바쁘던 한여름의 템포 속에서, 르떼는 아메리카노-플랫화이트-카푸치노를 숨 한번 쉬지않고 연달아 만들다가, 일순 머리를 감싸쥐고 주저 앉았다. 주문을 받다 놀란 나 또한 멈춰섰다. 다른 동료는 익숙한듯 빠르게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와 르떼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르떼의 귀에만 차분히 닿을만큼의 주파수로
"숨에 집중해. 우리 여기 있을거야. 도움이 필요하면 말 해."
라고 말한 후, 두 발치 떨어져 르떼에게 어느 공간을 내어주고 자기의 일을 이어나갔다. 르떼는 이 영겁의 순간이 얼른 생에서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라듯 눈을 꽉 감고 미간을 꾹 찌푸리고 (르네의 고통은 언제나 미간에서 드러났다). 그 데일듯 차가운 얼음을 맨손으로 굴리고 매만지고 꽉 쥐고.
어찌할 줄 몰랐던 나는 르떼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가볍고 지속적인 스킨십이 그러한 패닉에 도움이 된다던 친구의 말이 어렴풋 생각났다. 그래서 르떼의 시간을 방해할 서투른 이국의 말보다는, 그냥 그렇게 곁에 존재함으로써 '나또한 너의 고통이 지나가길 바라고 있어' 라는 말을 건네고자 했다. (돌이켜보면 그또한 이기심이었을지 모른다.)
3분정도 지났을까. 르떼는 이제는 괜찮다고, 고맙다며 다시 일어나 커피를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주문을 오래 기다렸을 누군가를 위해 '오트밀크 플랫화이트 시키신 분! (Flatwhite with Oatmilk!)' 이라고 외치며 자신의 일을 끝마쳤다.
르떼가 휴게실로 올라간 틈에 동료에게 그녀가 혹여 공황장애가 있느냐 조심스레 물었다.
동료는 그건 아니지만, 르떼에게 '어떤 것'(난생 처음 들은 단어였기에, 내겐 이렇게 들렸다)이 있다고 했다. 애-로 시작하는 어떤 것.
애필락시? 애나필락시스? 애포칼립스? 빠르게 내 머릿속에서 '애-'로 발음되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주저앉힐만한 힘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단어들을 빠르게 흝었다. 동료에게는 알아 들었다는듯 거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서 챗 지피티를 귀찮게 굴었다.
스무고개를 하듯, 내 물음에 몇가지 단어를 펼쳐내었으나 내가 목격한 일과 맞닿아보이는 증상을 포괄하는 단어는 영 없어보였다. 답답했다.
그러다 포기했다. 그래, 세상에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이 있나보다. 이 도시에는 워낙 다양한 서사와 상처가 있으니 내가 구태여 그 모든 것을 파헤칠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 그냥 그 순간이 오면 오늘처럼 곁에 있어주면 되는거지.
그렇게 안일하게 그 순간을 지나쳤다. 후회한다.
그리고 그 여름파티는, 말하자면 정말 여름이었다.
새하얀 빛깔을 내세우는 북유럽 브랜드의 '트렌디'한 스토어팀과 그 브랜드의 이미지를 위해 만들어진 베지테리언 카페팀이 드물게 함께하는 자리였다.
알전구와 초록으로 장식된 야외의 비어가든 속 아일랜드식 큰 테이블 하나를 빌려 다같이 둘러 앉았다. 그 곁에는 라이브 음악이 끊임없이 연주됐다.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스파클링 와인과 퍼석한 한낮의 햇빛같은 드라이 와인을 끊임없이 주고 받으며, 이름을 교환하며, 너의 셔츠가 맘에 든다며. 다함께 꿈 꾸듯 몽롱해지는 듯 했다. 순백의 '종이 한 장' 이라는 뜻의 브랜드 이름을 오늘 하루는 다함께 배신하자고 약속한듯, 여름의 진득한 밤공기와 와인을 들이키며 다들 예쁘게 엉망이 되어갔다.
그 위로는 청사과 나무가 그늘을 이루고 있었고, 술에 취한 사람들은 눈치도 보지않고 사과 몇개를 베어먹었다.
비눗방울 같은 밤이었다.
서양 영화에 들어온것 마냥 꿈 같았으나 그게 그다지 내 것 같진 않았다. 어차피 일생에 딱 한번 벌어질 이벤트였다.(그렇게 예감했다) 그랬기에 가능한한 그 자리에서 자꾸 떨어져 나가려는 내 몸과 맘을 가능한한 오래 그 자리에 머물게했다. 내가 내게 '네가 언제 또-' 라며 경험토록 했다.
머물렀으나, 술을 워낙에 잘 못마시는 체질이었으며 다음날 아침 7시 오프닝 근무로 배정된 탓에 다른 직원들을 남겨두고 몇시간은 일찍 그 자리를 나섰다. 사람들과 굿바이 인사를 하던 중 카페 매니저가 슬금 다가와 술을 잔뜩 품은 목소리로 '최대한 늦게' 출근하라고 속삭였다. 매니저가 스케쥴을 잘못 짰다며 자기 탓을 하라고.
그랬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 순간을 많이 되돌아보았다.
집에 오자마자 전부 개어내고 나니 (물론 많이 마시진 않았으나 알콜분해효소가 떨어지는 이의 숙명으로) 정신이 말똥말똥 했다. 심지어 아주 개운한 컨디션으로 새벽 5시에 저절로 눈이 떠졌기에 정시에 출근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프닝 근무는 실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울리는 알람을 못들은체하며 선잠을 자는 도시, 그 속의 어느 하얗고 고요한 유리건물 안에서 혼자만 그날의 첫 햇빛을 독차지하는 것. 북유럽에서부터 꽁꽁 얼려져 베를린까지 온 프레첼과 시나몬번의 생지를 트레이에 하나씩 올린 뒤, 그 위에 소금이나 사과를 올려 그들을 천천히 깨우는 일. 고요히 잠든 아기들에게 이불을 한번 더 덮어주고 그 옆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기다리는 기분과 같았다. 빵의 유모가 된 감각.
그랬기에 아침근무는 내게 핑계를 대며 미뤄야할 일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날 아침은 몇 시간전까지 존재하고 사라져버린 파티를 곱씹으며, 그 곳에 한 귀퉁이를 차지해봤다는 자부심으로 나름 으쓱해하고 있었다.
환상적인 기분과 함께 잠 든 빵들의 마지막 트레이를 오븐에 밀어넣었다.
커피원두-쿠키-우유. 모든 오프닝 준비를 다 마치고 다른 직원이 올 때가 되었는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들었으나, 알림창엔 르떼를 제외한 모든 직원이 컨디션이 안좋아 병가를 내야겠다는 구구절절한 메세지들이 쌓여있었다. 한눈에 봐도 다들 이불 안에서 적어보낸 듯 했다.
진절머리. 진절머리가 났다.
여름파티의 스파클링와인은 3초의 버블과 그 후의 고통으로 혼합된 것이구나. 그래 여기 베를린이지. 내가. 나만 나이브했다. 회식 후 숙취로 병가를 내기도 하는 사회였다. 그게 이 곳에선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마땅히 합법이었다. 원래대로면 곧 출근 할 르떼와 함께 카페 문을 열어야하는데, 그녀가 올지 안올지 도무지 장담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빠른 판단으로 카페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스토어 매니저에게 알려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차에, 금발의 머리카락을 민들레 홀씨처럼 나풀나풀 흔들며(비틀거렸다는 말이다) 계단을 내려오는 르떼를 보았다. 구세주였다. 어쩌면 자극에 취약하고 감정에 따라 사는 것 처럼 보였던 르떼였기에 그녀또한 당연히 안오리라 넘겨짚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랬던 탓에 그렇게 오래도록 죄책감에 시달렸을까. 그녀는 나를 그 비상사태 속에서 구해냈으나 그 날의 나는 이름 모를 어떤 것 안에 갇힌 르떼를 구하지 못한 탓에
- (3)에 이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