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epsy(뇌전증), 푸른 멍도 이 곳에서 함께
'
이야기를 마치기에 앞서
그 날 내가 기필코 찾아냈어야 할 단어는 에필렙시(Epilepsy), 뇌전증이었다.
뇌전증은 수천억의 뇌신경세포 중 일부가 일시적으로 과도한 전류를 방출해 뇌조직의 전기적 질서가 깨지며 발생한다. 어느 연령에서나 선천적-후천적으로 발병할 수 있으며 불치병이나 정신병으로 분류되지않는다. 적절한 치료와 사회의 몇가지 안전망이 부재하지 않는다면, 뇌전증 환우또한 무리없이 그들의 지적활동과 신체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그런 세상에 다다르기 위해 이곳에 나 또한 용기를 내어 적는다.
- (3)에 이어서 -
https://brunch.co.kr/@tannenbaum/28
계단에서 내려 온 르떼는 나를 보고는 '같이 늦게 오기로 했잖아' 라며 배신자 보듯 눈을 흘겼다. 이 회사는 네 것이 아니며, 너는 제발 그 놈의 책임감을 내려둘 필요가 있다고. 볼멘 소리를 했다. 르떼의 염색된 금발 사이사이엔 전 날(이라지만 듣자하니 출근 4시간 전까지)의 찐득한 와인과 알전구들이 엉켜있었다. 어쩐지 아직 영혼의 절반은 몽롱한 듯 했으나, 그녀의 출근만으로 제 몫을 다해준 것이다.
각종 페스트리를 야무지게 준비해야하는 오프닝 시프트를 싫어하는 르떼였다.
근데도 왔다.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쏟아지는 다른 동료들의 무책임한 병가 메세지를 못 본 체 할 수 없었다는 것. 이불 속에 숨으려던 몸을 구태여 일으켜 나왔다는 것이다. 르떼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불공평'한 상황에 나 '혼자' 놓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거봐, 우리는 말만 안통했지. 늘 같은 선택을 했다.
눈을 반쯤 뜨고 뭐부터 해야하냐 묻기에, 내 기준에선 가장 쉬운 '프레첼 사이에 크림치즈 바르기' 를 시켰다.
내딴에는 간단하고 재미난 일을 쥐어준 것이었는데. 커피 만드는 일만 고집하던 르떼는 프레첼을 반으로 가르는 법 조차 몰랐다. 심지어 크림치즈를 바를 틈 없이, 화장실을 오가며 계속 개워냈다. 맥주와 와인을 섞어먹지 말았어야 했다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정신을 바짝 잡고 어떻게든 프레첼을 잘 갈라보려다가, 자신이 프레첼을 망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는 듯 입꼬리를 삐죽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이 상황이 르떼에게 너무 가혹한 듯 보였다. 그래서 물 한컵 쥐어주고 아무것도 하지말고 저어기 가서 앉아있으라며 깔깔댔다. 혼자일뻔 했던 가능성에 비하면 모든 것이 나았다. Fucking Hangover 망할 숙취 를 겪으면서도 굳이굳이 이 곳에 온 르떼가 사랑스러워보였다.
다행히 비상사태임을 인지한 카페 매니저로부터 늦게라도 출근하겠다는 문자가 왔다.
나는 이전 회사에서 쌓인 극한의 멀티태스킹 능력으로 다행히 모든 샌드위치와 페스트리의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엉망진창이었으나 먹을 수 있는 정도면 괜찮았다. 10시가 되어 손님을 받기위해 밤새 달구어진 유리문을 열자 르떼도 이제는 제자리로 돌아가야겠다는 듯 일어섰다.
아, 근데 월요일이었다.
월요일은 각종 식자재가 배달되는 날이었다. 그리하여 유리문을 가장 먼저 열고 들어선건 손님이 아닌 배달원이었다. 누군가는 얼음, 치즈, 채소, 과일, 냉동생지 등등을 윗층의 냉장고와 냉동고에 분류해야만 했다. '누군가'는 르떼가 될 수 없고, 매니저는 아직 오는 길이며,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나여야만 하는구나. 빠르게 계산 후 르떼를 쳐다보며 혼자 괜찮겠느냐 눈으로 물었다. 르떼는 한아름 쌓인 박스들을 보며, 언제나의 말버릇처럼 '지저스 퍼킹 크라이스트' 라고 외쳤다. 그래도 괜찮겠냐며, 자신을 창고로 보내지 않아주어 고맙다했다. 저 상태로 혼자 주문을 받고 커피를 만들고 샐러드와 빵을 맡아야하는 르떼가 걱정되었으나 그게 우리를 위한, 나의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1시간은 걸릴 일을 30분만에 끝냈다는 자부심을 안고 다시 카페로 돌아왔다.
르떼는 돌아온 나를 보며 잠시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사라졌다. 널부러진 것들을 보아하니 이 곳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구나. 그래그래. 이제 마음 편히 다녀와. 모든게 안정의 궤도에 올라섰다. 파티는 이제서야 끝이났고 간신히 일상을 되찾은 듯 했다.
어쩐지 르떼가 한참 돌아오지 않았으나, 어디서 개워내고 와인 탓을 하며 휴게실 소파에 쓰러져있겠거니 생각했다.
이 매장 어딘가에 그녀가 있기만 하다면 안심이었다. 발등에 떨어졌던 불도 열심히 털어냈기에 심지어는 두 배로 뿌듯해하며 손님과 플랫화이트에 대한 스몰토크나 즐기고 있었다.
그 때 ,르떼가 돌아왔다. 발개진 얼굴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찾아야한다는데. 뭉개진 발음과 작은 목소리 사이에 갇힌 르떼의 말을 난 도무지 듣지 못했다. 찾고자 하는걸 찾지 못하자, 르떼는 이제 집에 가야겠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술기운이 다시 올라왔나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맞은 편에 서있던 손님이 괜찮은거냐고 르떼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그에 너스레를 떨며 '숙취야. 우리 어제 파티했거든' 하고 웃었다. 그런거였냐며 손님도 그 웃음을 따랐다. 매니저도 오기로 했으니 괜찮다고, 이제 집에 가보라고 넌 너의 일을 다 해냈다고 칭찬까지 얹으며 르떼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의 한쪽 신발이 없다는 것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온 매니저는 이 난장판에 나를 혼자 두고 르떼가 무책임하게 떠났다며, 화를 냈다. 그녀는 그녀의 최선을 다했다고 항변했으나 충분치 못했다. 아무래도 졸지에 르떼의 대타가 된게 억울해보였다. 매니저는 자신도 힘들지만 결국 이 곳에 책임을 다하러 늦게라도 왔다며 르떼에게 문자를 적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 르떼로부터 온 답장을 읽고 매니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는 말을 덧붙였다.
솔. 그렇게 보내면 안됐어.
숙취가 아니였어. 에필랩시였어.
에필랩시. 전엔 그 발음조차 잘 들리지않았던 것이 그 순간만큼은 이미 알고있던 단어처럼 섬세하고 명확하게 귀에 닿았다. 바로 핸드폰을 키고 에필랩시를 검색했다.
뇌전증이었다.
윗층에 올라갔던 르떼가 발작을 겪은 것이다. 발작의 전조증상을 느낀 르떼는 남들이 보지않도록, 그래서 보지 않음으로써 놀라지 않도록. 스스로를 창고에 두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르떼는 안개 속을 걸었다. 남들을 다치게 하는대신 스스로만을 다치게 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 곳에서 홀로 벽에 얼굴을 찧고, 신발을 잃고, 자신을 잃고.
그 모든 일이 이미 홀로 놓인 무의식의 한 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사람이 벌이는 일이 아니라, 머릿속의 전기들이 벌이는 혼란이었다. 그러니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니 집에 가야한다는 르떼를 붙잡아 다시한번 한 구석을 내어주고 물 한컵을 쥐어줬어야 했다는 걸.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정말 알지 못했다. 단 한번도 뇌전증이라는 단어 곁에 살아본 적이 없던 탓이다.
집에 와 침대에 몸을 눕혀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르떼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매니저에게 답장을 보낸 것을 보니 위험한 상황속에선 벗어난 듯 했다. 집을 찾았을까. 안전할까. 다쳤을까. 그렇게 물을 수 없어, 물음을 대신하여 어제 찍은 파티 사진을 보냈다. 르떼가 고양이를 찍어왔던 날 처럼 우리는 어긋날 때엔 언제나 말보단 사진을 택했다.
사랑스러운 사진들이다. 사진으로 남겨줘서 고마워.
르떼로부터 그런 답장이 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르떼와의 근무일이 돌아왔다.
긴장한 마음을 안고 카페에 들어서자 역시나 커피머신 앞에 살짝 가려진 르떼가 보였다. 곧장 그녀에게로 갔다. 왼쪽 눈엔 새파란 멍이 있었다. 살면서 그렇게 푸른건 본 적이 없었다. 왈칵 눈물이 났으나 울기엔 그 멍이 너무 서슬퍼랬다.
'르떼' 하고 부르자 고개를 들어 활짝 웃으며, 내 눈 더 예뻐졌지? 그날 널 혼자두고가서 미안해.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하다고. 그렇게도 말했다. 그 말로 하여금, 내가 그녀를 혼자 둔게 아닌 것처럼. 지나간 시간에 대해선 이야기 하지 않았다. 다만 손님이 없는 한적한 시간을 골라내어 물었다. 다음에 같은 순간이 온다면, 내가 어떻게 하는게 좋겠는지. 마침 한참을 무언가 적어내리던 르떼가, 나이스 타이밍이라는 듯 적고있던 포스트잇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마치 요리 레시피를 보여주듯 차분히 설명을 시작해나갔다.
*앰뷸런스를 부를 필요는 없어.
*주변에 날카로운 물건을 치워줘
*네가 너무 두렵지 않다면, 발작이 지속되는 동안 그냥 구석에 눕혀줘
*발작의 지속 시간을 재주면 좋아. 치료에 도움이 되거든. 만약 네가 두렵지 않다면 말이야!
*발작 시간이 길어진다면 그때는 119를 불러줘.
*혹시 네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거나 무섭다면, 뭘 하지 않아도 괜찮아.
여기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의 번호가 있으니 여기로 전화해주면 좋아.
*발작은 아마 몇분이 지나면 끝날거야. 발작동안은 머리에 안개가 낀 느낌이라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
상황이 지나가고 내가 자신감도 있고 편안해 보이면, 그땐 집에 보내도 괜찮은 상태야.
집에 돌아와 메모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1번, 2번, 3번, 4번. 끝나면 다시 1번으로. 그리고 다시 5번. 르떼가 발작을 설명할 때에 적는 비상연락망이 되었을 그녀의 친구들에 대해 생각했다. 독일이라는 이국의 땅에서도 르떼가 적을 번호가 있어 다행이었다. 동시에, 내게 다음이 온다면. 그때의 나는 눈치챘어야 할 상황을 눈치채고, 르떼와 같은 이가 창고 문을 열고 나왔을 때 그 앞에 마중 나가 있을 수 있는 사람일까. 누군가의 손끝에서 안전망으로서 적힐 수 있을까. 그렇게 오랜시간 자문했다.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며,
그날 밤 나는 그 곳을 관두기로 맘 먹었다. 도망치는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가 줄 수 있는 방식의 사랑과 가까웠다. 나의 혼자 다-하겠다는 책임감. 감정의 고저 앞에서도 유지하려던 차분함. 가진 상처를 읽어보려던 진심같은 것들. 나의 그런 노력들을 르떼는 하나도 빼놓지않고 눈치채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걸 사랑하고 예뻐하는 사람이라서. 우리는 그런 면이 닮아있었던터라 그녀에게 나의 존재가 일종의 강박이 되어가고 있었다는것을 나 또한 알아차렸다. 그날 파티가 끝난 후, 내가 정시에 와 제 몫의 일을 해낸 탓에. 르떼는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게 잠을 내려놓고, 약의 복용시간을 놓쳤을 것이다.
훗날 알게된건, 내가 그 곳에서 일을 시작했을때에 적응하지 못했던 속도들(1화에 적은)과 생태계 또한, 실은 르떼를 위해 짜여진 것들이었다는 점이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르떼의 친구가 되기로 마음 먹은 결과였다. 전부 그녀를 위해 새로 엮어낸 세상이었다. 그녀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엮어낸 완전히 독립된 생태계. 그 곳은 그렇게 같이 함께 하기 위해 촘촘히 짜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르떼는 마침내 '집' 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는 것을. 리투아니아로부터 날아와 아일랜드, 네덜란드를 통과해 그렇게 베를린에 도착했다는 것. 'Love(사랑)'와 'Mess(엉망)'를 오가다, 마침내 나라나 도시라기보단, 곁에 머무는 이들을 집으로 삼았구나. 나는 나를 바꿀 수도 없었으며 그녀가 찾은 집 또한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떠나는 수 밖에는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르떼는 내가 관둔다는 소식을 듣고, 왜 우리를 떠나느냐 며 장난섞인 진심으로 물었다. 그냥 베를린에서 살 시간이 얼마 안남았단 느낌이 들어 여러가지를 더 경험해보고 싶다고 둘러댔다. 난 9년 살았잖아, 너무 긴 여행을 한 것 같아 라고 덧붙였다. 이해한다는듯 끄덕이며 르떼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 긴 여행의 끝에서 어때? 여전히 베를린이 좋아?'
좋냐구? 아니 나는 베를린 사랑해. 라고 답하자 르떼는 눈을 동그랗게 떠내었다.
Same here, 자신 또한 그렇다며 다시한번 젖은 눈을 했다. 마지막 근무날엔 르떼를 안으며, 너는 정말 몰랐겠지만 네가 나의 '페이보릿 펄슨'이었다고 전하자 르떼는 마침내 눈물을 쏟아냈다.
사랑은 그 자신의 눈에 푸른 멍이 든 채 앞에 선 이를 껴안는 일이며, 엉망진창은 그들을 안개 속에 홀로 걷도록 내버려두는 일이란 것을. 그리하여 그 날의 사랑은 르떼였으며, 엉망진창은 나였음을 고백한다.
예의를 갖추어 글을 마무리하는 일이 내겐 너무 중요했다. 그때문에 세 계절이 지나서야 비로소 적는다.
베를린 파트타이머 일기의 연재 또한, 언젠가 내가 이 글을 기필코 용기내어 써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이 곳이 모든 시작점이며 도착했어야 할 종착지이다. 잘 해내었는진 여전히 모르겠으나, 해야만 했다. 이런식으로라도, 그날의 르떼가 갇혔을 창고로 돌아가 문을 두드린다.
다음은 2023년, 대한뇌전증학회에서 뇌전증에 관하여 작성해 배포한 책자이다.
https://www.kes.or.kr/file/info/230120.pdf
매년 2월 둘째주 월요일은 세계 뇌전증의 날이다. 이를 앞두고 마침내 글을 마치게 된건 순전히 우연이었으나, 그래도 그 등에 업혀 뭐라도 실어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르떼는 현재 발트 3국(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내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철폐 운동에 참여중이다.
그녀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생에 섞인 슬픔을 어루만지며 살 듯, 나 또한 나의 방식으로 그럴할 수 있길 바란다.
엉망진창은 외면하는 마음의 결과이고,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나아갈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으며 마침내 이 글을 닫는다. 그녀의 안녕을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