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에게 숏폼 컨텐츠란,
올해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나만의 기준을 여럿 어겼다. 그러자 반응이 왔다. 인스타그램 릴스의 좋아요는 천 개를 넘었고, 댓글은 끊이지 않았다. 팔로워가 늘었고,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이게 무엇일까.
예술가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아직 채 익지 않은 생각을 쉽게 내보이는 일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스케치를 보여주는 게 뭐가 문제인가?’ 하지만 스케치가 충분히 멋지다면,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완성된 작품처럼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반응에 휩쓸려 나 자신도 이미 작품을 완성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완성을 향한 갈증은 사라지고, 성취감과 자극을 미리 얻어버린 나는 게으르게 남는다. 그래서 나는 조심하려 했다. 말을 아끼고, 생각을 아껴야 했다. 예술가에게 생각을 멈추게 하는 모든 것들은 위험하다.
같이 작업하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릴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요즘은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하이라이트를 가진 곡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 짧은 영상을 서른 개쯤 만들어야 바이럴이 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아무런 솔깃함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치욕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음악을 만든다. 그 안에는 시간이 있다.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이 천천히 스며든다. 한 번 듣고 쉽게 잊히는 것이 아니라, 들을 때마다 새로운 결을 발견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 글도 마찬가지다. 한 줄의 문장이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오래도록 맴돌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숏폼 콘텐츠는 모든 것을 단순하게 만든다. 의미는 압축되고, 감정은 즉각적으로 소비된다. 깊이 있는 여운이 아니라 순간적인 자극이 차곡차곡 쌓인다. 그리고 그 자극은 너무 쉽게 사라진다. 이것이 내게 해로운 이유다. 애써 쌓아 올린 감정이 너무 쉽게 흩어진다. 익숙해지면 나도 흐트러질 것이다. 오래 남길 수 있는 것을 만들겠다는 다짐이 무뎌질 것이다.
그런데 나는 결국 짧은 영상을 만들고 올렸다.
나의 두 번째 기준이 깨졌다. 그리고 예상대로 결과는 좋았다. 팔로워는 계속 늘었고,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들었다. 완성된 곡에 도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이 노래 풀 버전은 어디서 들을 수 있나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생겼다.
익숙한 이름들이 보였다. 처음부터 내 음악을 좋아해 준 사람들. 내 글을 읽고, 내 노래를 기다려 주던 사람들. 그들이 나의 변화를 기뻐할까, 실망할까. 무엇을 좋아했던 걸까.
새로운 해가 왔다. 새로운 사람들이 몰려오고, 새로운 반응이 이어진다. 나는 다시 많은 생각을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내가 바뀌고 있는 건지, 변질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흐름에 적응하고 있는 것인지.
이곳은 내게 해로운가. 아니면, 내가 이곳에서 살아남는 법을 찾아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