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사랑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영화 '벌새'를 보는 나,-

by YeonJin

은희, ‘가장 보통의, 가장 보편적인 존재, 은희’라고 영화 홍보 전단에 적혀 있다. 영원불멸할 줄 알았던 ‘붉은 돼지’ 김일성이 죽고, 수학능력시험이라는 새로운 시험이 2차례나 치러지고, 관측 이래 가장 더웠던 여름이 지나마자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1994년, 대청중학교에도, 내가 나온 지방소도시 여고 3학년 7반 교실에도 ‘은희’는 있었으니, 가장 보통의, 가장 보편의 존재로서 ‘은희’는 참 어울리는 이름이다. 어디에나 있어 잊히기 쉬운 이름 은희,


원준희의 ‘사랑은 유리같은 것’을 부르던 대청중학교 ‘은희’는 오빠에게 맞는다.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따귀를 맞는다. ‘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거나 악을 쓰며 개새끼라고 오빠를 욕하는 것이 고작이다. ‘일단 대원외고를 가고, 3년 후에 서울대를 가자’는 아버지의 강압에는 아무 대꾸도 없이 밥술만 뜨던 중3 오빠, 그 말을 들으며 밥 먹는 내내 등만 웅크리던 오빠가 ‘은희’에게는 그 등을 활짝 편다. 그리고 힘껏 은희를 향해 내리친다. 왜 은희에게, 왜 아버지께 말하지 못하고, 왜 은희에게. 왜 은희에게.


은희 언니가 외박을 했다. 아버지는 언니를 야단치다말고 엄마를 나무란다. 자식 단도리를 제대로 못한다고 화살을 엄마에게 겨눈 아빠를 엄마는 램프로 다리를 내리친다. 깨진 램프조각이 숨어 있는 소파 위에서 다음날 아빠와 엄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텔레비전을 보며 웃는다. 15살 어린 나이에 혼자 병원에 다년 오 날 ‘은희’는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안 듣는), 엄마의 낯선 뒷모습을 본다. 깨진 램프가 침범할 수 없는 일상의 이면에는 ‘엄마’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그녀가 있었고, 15살의 은희는 그것을 보았다. 또 다른 ‘은희’였을 ‘은희의 엄마’.


1994년 여름과 가을을 통과하는 소녀의 성장을 농밀하게 담아냈다고 평해지는 <벌새>에서 내가 ‘본’ 장면들이다. ‘가장 보통의, 가장 보편적인 존재’의 소녀들은 아빠, 오빠의 폭력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매일매일 스스로를 무디게 만든다. 오빠는 아버지의 강압에 고개숙여야만 했다. 그 길이 성공과 출세의 길이라 해도 오빠가 선택하지 않았음만은 분명하니 오빠 역시 가부장의 피해자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은희 곁에 서는 대신 쁘디 가부장이 되어 은희를 내리친다. 그러므로 가장 밑바닥에 ‘보통의, 보편의’ 존재는 은희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은희’를 보면서 스스로 두려웠다. 나는 왜 이렇게 보는가, 감독조차 특정한 폭력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는데, 내 눈에 왜 이런 장면들만 보이는 것일까,


교원평가에서 “가끔 페미같아서 당황스럽다”다고 했다. 페미같은 건 또 뭐고 그래서 당황스럽다는 건 또 뭘까. 학생들이 가끔 묻는다. “선생님, 메갈이에요?” “선생님, 실망이에요. 페미같아요.”, “선생님 페미니스트세요?” 글쎄, 페미니스트일지도 모르겠네라고 답하면 그럼 군대 가세요라고 말이 관용구처럼 따라 붙는다. 한 순간 ‘페미년’이 되는 이 상황이 불편하고, 힘에 부친다. 여성, 가까이 있는 여선생, 여동생, 심지어 친구의 부모까지 성적 대상화하여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 일종의 문화로 여겨지는 이 남고에서, 그래도 가끔 그들이 주는 따뜻함과 지혜로움과 슬픔과 사랑에 빠지는 남고의 여교사로서, 나는 어떤 위치에 서 있어야 하는지, 근속 10주년이라는 이즈음에 생각해본다.


“남고생을 사랑하는 행복한 페미니스트”라고 나를 소개할 수 있을까, 교무실 밖 운동장이 비안개에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