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과 아이스커피

-아이스커피에 녹아든 너의 땀방울에 대하여

by YeonJin

수능 시험 감독은 고등학교 교사 경우에는 자기 학교 학생들과 마주칠 것을 대비하여 소속 교육청이 아닌 곳에 배치된다. 계성여고, 성심여고, 동성고, 강서공고, 여의도고가 주로 내가 감독을 다녔던 학교들인데, 이 학교들은 산을 끼지 않은 평지에 있다. 특히 계성여고, 성심여고에는 가톨릭 계열 사립학교답게 아름다운 석조 건물과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어 감독을 하더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특히 성심여고 본관 뒤편의 성당과 본관 복도를 신비스러운 빛깔로 뒤덮던 스테인글라스를 통과한 햇빛, 그리고 그 복도를 지나가던 수녀님의 손에 올려진 귤 한 바구니는 지경사 명랑소설 시리즈에 나올법한 낭만적인 여학교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지금은 성북구로 이전했지만) 명동성당 안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계성여고 운동장 둘레의 은행나무와 그 너머의 고층 빌딩의 대비는 그곳을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이 몰래 숨겨놓은 성스러운 장소로 만들어주었다. 또 강서공고와 여의도고는 어떠한가. 이 학교들은 아파트 단지에 둘러 싸여 있어 오가기에 더할 나위 없이 편할 수가 없다. 언덕, 그런 건 뭔가 싶을 정도로 인도와 교문이 바로 연결되어 있고, 간선도로와도 멀지 않아 접근성이 좋다.


우리 학교는 학교가 설마 있을까 싶은 곳에 ‘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외통 골목길에 고개를 들어 저기 높은 곳을 보면 갈색의 일자형 건물, ‘아, 남고구나’ 싶은, 남고처럼 생긴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절대 직관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출근 첫날, 택시 기사님과 내가 함께 길을 헤매다가 새로 오신 선생님 소개하는 시간에 늦고 말았다. 교사는 무엇보다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는 교감 선생님의 쓴소리를 들으며 역시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또 한 번은 좋은 구경시켜준다고 내 친구를 데리고 학교에 온 날, 친구는 ‘네 차가 올라갈 수 있긴 하냐’며 돌돌돌 잘도 올라가는 내 경차를 마냥 신기해했다. 우리 학교에는 제설차도 있다. 이처럼 궁벽한 곳에 우리 학교가 있다.


우리 반 창문 밖 풍경


차를 타고 언덕을 올라오는 입장에서 언덕길을 3년 동안 꼬박 걸어 다닌 이들에게 ‘너희는 철근도 씹어 먹을 나인데 뭐 그러냐’라고 너스레를 떨 수 없을 정도로 언덕은 가파르고 길다. 교지편집부에서 직접 언덕 경사도를 측정했는데 15도가 나왔다. 이 가파른 언덕이 100여 미터 이어진다. 아침마다 아이들은 땀범벅이 된다. 등교 시간도 빨라서 7시 40분까지 이 언덕을 올라와야 한다. 날이 더워지기 전에 올라와야 해서 등교시간을 이렇게 빨리 잡았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우리 학교 학생들은 이른 새벽 등산과 유사한 강도로 에너지를 소모하며 등교를 한다. 졸업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이유로 이 언덕을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기 위함을 꼽을 만큼 이 언덕에서 아이들은 벗어나고 싶어 한다. 나도 외출 신청하고 밖에서 맛있는 점심이나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지만 이 언덕과 골목을 벗어났다가 다시 올라 올 생각만 하면 그냥 저 멀리 북한산 바라보며 급식을 먹는 것이 최적의 효율이라는 생각에 외출을 포기 만다.


그러나 이 언덕을 올라와 땀을 식히고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면 땀을 흘려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찾아온다. 교실 창밖 너머 펼쳐진 북한산 봉우리, 앵봉산에서 내려오는 알싸한 아침 공기, 그리고 밤의 고요는 뻐꾸기 소리와 아카시아 향으로 깊어진다는 것을, 매미 울음과 사각사각, 스스슥 쓰고 지우는 소리가 백일홍을 붉게 한다는 것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된다.


2020학년도 수시 원서 접수를 앞둔 8월 말이었다. 20여 명 넘게 수시 원서를 접수하다 보니 수시철이 되면 예민해진다. 학생과 학부모의 말 한마디에도 바르르 신경이 곤두서고, 9월 모평 전에 마무리 해 놓아야 하는 일들, 예를 들면 원서 6개 중 고정시킬 것과 9월 모평 성적을 보고 조정할 것들, 그리고 내가 써야 하는 추천서 초안까지 정리해 두어야 한다. 재수생, 삼수생 것까지 섞여 있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어리바리 끝판왕인 내가 또 어떤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나를 긴장시키느라 신경이 바짝 곧추선다. 그리고 접수기간이 되면 나는 자소서에 내 모든 열정과 능력을 다 들어붓기 때문에 그전에 신변정리(?)를 해야 해서 내 아이들까지 달달 볶는다. 그런 폭풍전야와도 같이 나 혼자 속이 시끄러운데, 그때 이 언덕길을 올라 그들이 왔다.


한 손에 스타벅스 아이스커피, 또 한 손에는 공차 밀크티를 들고서 그들이 서 있었다. 안 그래도 목이 마른데, 10년이 지나도록 이 언덕을 내려 아이스커피를 사러 가 본 적이 없는데, 종례 마치고 나와 속이 타는데, 그들이 활짝 웃으면서 보기만 해도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저 아랫동네 사거리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서, 길을 두 번 건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려 다시 100미터 언덕을 올라, 3층에 있는 교무실까지 그걸 들고 온 것이다. 얼음은 거의 녹았고, 종이 홀더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공차는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날도 더운데 그냥 한 곳에서 사 오지 굳이 다른 걸 사 왔냐는 내 물음에 중국어 선생님인 2학년 담임 선생님은 왠지 공차를 마실 것 같고, 나는 스타벅스를 마실 것 같았다고 한다(반대지만). 얼음 하나, 남길 얼음도 없었지만,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쪽쪽 빨아서 그들이 뻘뻘 땀을 흘리며 사들고 온 거피를 세상에서 가장 시원하게 마셨다.


그들에게 내가 해 준 것은 별로 없다. 수시 원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애들처럼 몇 번씩 두꺼운 책자에 같이 머리를 박고 이 대학 저 대학을 찾아보지도 않았고, 자소서를 앞에 두고 같이 고치지도 않았다. 지각한다고 야단이나 쳤지, 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에 내가 뭐 도와준 것은 별로 없다. 한 명은 일문과에 가기는 했지만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작곡 레슨을 받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만든 음악이라고 나에게 몇 번 보내주긴 했는데, 막귀인 나로서는 EDM이 그저 낯설기만 할 뿐) 레슨을 받기 위해 식당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그냥 학교를 때려치우고 싶다고 했다. 또 한 명은 겨울부터 미용 기술을 배워 국가자격증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미용학원도 다니고 알바도 하고, 영어학원도 다니는데, 자신은 공부 빼고 못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미용학원 우등생이자, 최고의 알바생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내가 가보지 않은 길들이다. 소심하게 담배나 좀 펴본 게 일탈이라면 일탈이랄까, 부모와 사회가 만족할 만한 과정을 차곡차곡 밟으며 성실하게 주류의 삶을 살아오는 교사가, 내가 이들에게 어떤 조언 따위를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이 가는 길, 갈 길을 그저 나는 온 힘을 다해 응원할 뿐이다. 내가 마신 아이스커피에 그들의 땀방울 섞여 들어가 있을지 모르겠다. 기꺼이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마셔주는 것만이 아무 것도 모르는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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