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팬이 되기로 마음먹었어

by YeonJin



수술실에서 나온 문경을 데리고 나는 연극을 보러 간다. 병원에서부터 극장까지 가는 내내 나는 어설프게 문경을 챙기고 문경도 나의 이러한 챙김을 어색하게 받아들인다. 이불 맡에서 베개싸움을 하던 시절을 지나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만난 쌍둥이. 쌍둥이라 하지만 받아쓰기를 하고, 구구단을 외우기 위해 낑낑대고,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다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가 낯설게 덮치는 시간들을 건너뛰어 다시 만났다. 이제 이 둘만 남은 자리, 사고로 시력을 잃은 문경이 핀 조명을 느끼러 가는 길, 내가 더불어 간다.


이 이야기를 만든 신인 작가는 자신의 쌍둥이 동생에게 수상소감을 썼고, 추천자는 다른 후보작을 읽는 것은 이 작품의 가치를 다시 한번 점검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는 무자비한 극찬을 했다. 무드와 톤을 유지하는 감각은 생래적인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21살 신인 작가의 이름으로 검색을 하니 또 다른 소설이 뜬다.


그래서 그 종이는 쓸모없게 되었지만 난 그걸 계속 가지고 다녔다. 비록 별 볼일 없긴 했지만 아버지 일생의 전부가 그 종이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딱히 아버지를 존경하거나 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냥 그런 가벼움이 좋았다. 인생 전체를 종이 한 장에 요약해서 집어넣을 수 있다는 그 가벼움이, 왠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가난한 아버지는 다리를 저는 딸과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들을 따사롭게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처럼 ‘다 살기 마련이라’ 나사에 볼트를 조였다 다시 풀 듯 꾸역꾸역 살아나간다.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죽고, 아버지는 자동차 정비에 관련된 노란 종이 한 장을 나에게 외우게 하고 그 겨울 죽는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누나는 나를 태우고 바닷가에 가서 한 시절을 보내고는 사라진다. 배터리가 약한 차에도 이런저런 방법으로 시동을 걸 수 있듯, ‘나’에게 시동을 걸어준 것들이 여럿이 있었으니, 그 기억에 매달려 누나를, 아버지를 이해해본다.


‘생래적인 감각’은 거저 드러나지 않는다. 스무 살에 이 소설을 쓴 신인 작가는 19살에도 민음사 클래식 시리즈를 번호 순대로 모조리 읽고, 매일매일 읽고, 쓰기를 반복했다. 주말에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산책을 했다.

H는 맨 앞자리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별 대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 수많은 남자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특별히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 않았는데, 담임선생님께서는 H가 자퇴를 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 자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H가 말없이 소설 한 편을 나에게로 들고 왔을 때부터 나는 H가 자퇴하겠다고 한 말이 빈말이 아니었을 거란 짐작을 했다. 그 당시 입학과 관련된 업무를 맡고 있던 나는 덤으로 각종 백일장과 글짓기 대회와 관련된 공문도 처리했다. 아이들을 지도하거나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는 그런 일이 아니라 말 그대로 대신 응모하고, 추천 평이 필요하면 기계적으로 추천 평을 국어 선생님들께 부탁드리는 그런 행정적인 일을 매년 해오고 있었다.


그때 H가 대산청소년 문학상에 응모하겠다고 나를 찾아왔다. 두고 가라고 하곤 그 반에 수업을 들어가는 교사로서의 ‘의리’로 한 번 읽어보았다. 그러곤 얌체처럼 이 아이의 추천 평은 내가 쓰고, 다른 글들을 다른 선생님께 보냈다. 아무도 오르지 못한 산을 오르는 한 남자의 여정을 고등학생이 썼다, 그것도 한숨에 읽히는 글을,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는 글을 내가 ‘가르치는’(가르친 것이 없지만) 학생이 썼다. ‘생래적인 감각이 드러나도록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의 손이라도 닿게 해주고 싶었다. 한참 연락이 끊긴 '한때 친구였던 ' 소설가 J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늦은 가을 저녁에, 이 높은 언덕을 올라 우리 학교 학생들을 만나 달라고, 그래도 우리 한때는 친하지 않았느냐, 나는 네 작품과 네 기사는 모조리 다 읽는 팬이니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J가 온 밤, 3시간 동안 나의 학생들과 J가 대화를 나눴다. 귤과 과자를 까먹으면서 J는 자신의 글과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의 학생들은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하느냐’, ‘왜 글을 쓰느냐’,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질문을 했다. J는 조곤조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의 학생들도 그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그때 J가 그 아이에게 ‘당신은 글을 이미 많이 써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한다’고 했다. 21살이 되어 등단을 할, 18살의 그 아이는 J의 말을 기억할는지 모르겠지만, 선생으로서 나는 가슴이 설렜다. 나는 운이 좋은 친구이자 선생이다.


갈 곳이 없어서 사무실에 그냥 남아 있었는데 J도 그때 옆 사무실에 남아 있었나 보다. 우리가 친구였던 그때, 우리는 가난했고 갈 데도 딱히 없는 사람들이어서 사무실에서 공짜로 제공해주는 맥심 모카 골드만 주야장천 타마셨다. J가 A4 한 뭉치를 나에게 조심스럽게 꺼내 주면서 한 번 읽어봐 달라고 했다. J가 소설을 쓰는 습작생이라는 것은 사무실을 오가던 모든 사람들에게 풍문처럼 전해진 이야기였지만 J의 글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J가 이렇게 유명해질 줄 알았다면 좀 더 꼼꼼히 읽고 메모라도 해둘 걸. 그때의 J나 나나 뭐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J의 어두운 글을 재미있게 읽을 힘이 없어서 가볍게 읽고 말았다. 어떤 여자가 지하철 보관함에 물품을 넣었다가 찾는, 뭐 그런 이야기였는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J와 나는 프랑스 소설을 좋아했고, J가 나에게 일본 전공투 세대의 후일담과 같은 ‘그래도, 우리 젊은날’(시바타 쇼)을 추천해줘서 사서 읽었던 기억은 선명한데, J에게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J의 팬이었듯, 앞으로 H의 팬이 될 것이다. 18살 5월 달에 H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팬이었지만 이제 H의 이름이 적힌 책들을 ‘사서’ 읽는 진성 독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팬으로서 J의 출판되지 않은 글을 미리 읽었듯, H의 글도 미리 읽었으니,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두 작가의 사이에 내가 서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운이 좋은 팬이다.


H가 앉아있던 자리 바로 앞에 책상을 놓고, 자습 감독을 하며 이 글을 쓴다. 행운이다.

이전 09화 목수가 되고 싶다던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