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져 나가 앉은자리는 눈에 띄기 마련이다. 삼삼오오 창문에 매달려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아이들 틈에서 한 발치 떨어져 나가 앉은자리에 서 있는 이의 웃음에는 눈물기가 서린다. '종 쳤어. 빨리 들어가'라고 소리 지르며 등짝을 내려칠 수 없게 만드는 슬픔이 등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감히 손댈 수 없는 슬픔의 기운이 나를 그의 옆에 서서 말을 걸게 한다.
이제 들어가야지. 무슨 일 있어? 힘들겠지만 시간은 지나가고, 끝은 나니까 조금만 힘내자.
이토록 무신경한 말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당사자가 아닌 타자가 떨어져 나가 앉은 그의 자리에 어찌 감히 들어갈 수 있겠는가. 고 3.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의 흔들림에 휩쓸리며 스스로 지나와야 하는 시간. 가장 실존적인 시간.
선생님. 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할아버지가 폐암 말기예요. 좋은 대학 가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의 눈은 단풍 든 앵봉산을 향하고 있지만, 그는 떨어진 대학과 그 떨어짐으로 인한 후회와 죄책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옆 반 아이다. 그 아이의 할아버지는커녕 부모님이 누구신지, 수시 원서를 어디에 썼는지도 정확히 모르는데,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마침 비밀번호를 눌러야만 들어갈 수 있는 회의실이 반대편에 있어 아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흐흐 흐흑, 그의 울음은 격하게 커졌다. 선생님, 할아버지는 내년을 못 보실 수도 있어요. 정말 좋은 대학 가는 모습, 마지막으로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허허허 허, 흐흐흐흐흑, 불 꺼진 어두운 회의실에서 점점 격해지는 울음 옆에 앉아 있는 방도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없었다.
울음이 잦아들자 3년 동안 간절히 원했던 대학에 떨어진 이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뒷바라지해 준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연민, 잘하고 싶은데 노력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잘하는 것도 없어 보이는 자신에 대한 자책이 한참 이어졌다.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이 된 화장지를 돌돌 마는 그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내가 치른 대입은 특차와 정시로 나눠져 있었다. 특차는 내신과 수능 점수만을, 정시는 수능, 내신, 본고사 성적을 요구했다. 특차는 12월 말에 당락이 결정 나고 모든 것이 끝나지만 정시는 길게는 2월까지 시험의 긴장을 끌고 가야 하는 고단하고, 지난한 전형이라, 자신감 없던 시골의 여고생들은 어떻게든 특차로 대입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생님들은 우리를 정시까지 이끌고 가려고 온갖 채찍질을 하셨다. 그때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 논술, 때론 제2외국어까지 서술형으로 봐야 하는 본고사는 서울 아이들만 볼 수 있는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그 결정이 많이 안타까우셨는지 본고사를 볼 만한 성적대의 아이들을 불러 모아 사설 고사를 보게 하곤 특차 원서를 높게 쓰라고 하셨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온 세상이 거지 같아 보여서, 대학이고 나발이고 모든 것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수능 이후 본고사 준비반에 오라는 제안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 내팽개친 것도 모자라 담임 선생님께 꽤나 대들었다. 왜 대들었는지, 무슨 이유로 담임 선생님과 그토록 격하게 대결했는지 사실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3학년 교무실에서 담임 선생님이 화를 내며 나를 향해 손을 올리셨고, 그 순간 '옆반 선생님'이 나를 끌고 그 교무실을 나오셨던 기억만은 선명하다. 팔토시를 하던 수학 선생님, 그 선생님이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고, 그곳에서 펑펑 울었다.
내 엄마보다는 친구 엄마가 좀 더 반갑고 편안할 때가 있듯, 담임 선생님이 아니라 옆반 선생님이라서 그 덩치 큰 놈이 화장지를 돌돌 말고 바들바들 떨면서 그 많은 이야기를 뱉어냈을 것이다. 25년 후, 내가 우리 옆 반, 팔토시를 차던 8반 담임 선생님을 이렇게 생각하듯, 이 아이도 옆 반, 2반 선생님을 불쑥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는 옆 집 아줌마, 옆 반 선생님, 옆 자리 동료들과 얽히고 얽힌 가냘픈 망 위에서, 흔들리며 자신의 집을 지어나가는 것 아니겠는가. 오늘, 그 아이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그 아이에게 주려고 그 반 모두에게 미니 초코바를 선물했다. 옆 반 선생님의 마지막 선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