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onJin Oct 08. 2019

너에게 biutiful한 세상이라도 보여주고 싶었어

- 영화 '비우티풀'

내가 예찬했던 바로셀로나는 없었다. 만화 속 이미지들이 현실로 금방 뛰어나온 듯한 원색의 공원과 건축물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기만 하늘 아래에서 활기차게 웃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 나오는 잘생긴 남자와 섹시한 여자들, 그리고 월계수와 영광의 몬쥬익 언덕은 묵직하고 어두운 석조건물과 삶의 비루함에 찌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불안과 외로움의 과격한 몸짓으로 변해 있었다. 바로셀로나가 변한 것은 아니다. 여행자의 좁은 뷰파인더에 붙잡힌 한 두 개의 이미지만으로 도시 전체를 보았다고 착각했던 것 뿐이었으니,  도시를, 스페인의 경제위기를 탓할 바는 아니다. 결국 완벽한'beautiful'은 없다.   


때마침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를 읽은 직후였다. 어떤 것으로도 존재를 증명할 수 없었던 이탈자 로기완이 맞닥뜨리는 불안과 외로움, 어머니의 몸값과 맞바꾼 탈주에서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무엇보다 강력한 당위에 눌려있던 로기완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고, 존재하기 위해 존재를 감추어야 하는 로기완과 같은 역설적인 존재들이 바로셀로나 곳곳에 망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세네갈에서 건너 온 흑인들,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저 머나먼 나라에서 온 검은 머리의 중국인들, 사랑을 찾아 떠나온 게이까지. 주어진 영토에 안전하게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온 이들을 우리는 '불법 체류자'라고 한다. 그어진 선 안쪽에 요구하는 무엇인가가,- 대개 그 무엇인가는 돈이지만, -없어 체류허가를 인정받지 못한 이들은 선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삶을 이어간다. 그들도 새끼를 품어 키우고, 노동을 하고, 사랑을 한다. 이렇게 본다면 바로셀로나를 서울로,안산으로 그대로 치환시켜도 무방하다. 결국 감히 쳐 올라다 볼 수 없는 파밀리아대성당의 높이에 가려진 바로셀로나의 어둠은 전지구적인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붙어서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법적체류자'들도 있다. 영화 속 주인공도 그런 인물이다. 영화 속 아버지는 아버지가 없어 많이 배우지 못해서 이방인과 정착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삶을 이어나간다. 흰얼굴에 스페인어를 쓰지만 욱스발은 내부에서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지 못했다. 아마, 그는 어떤 영토도 물려받지 못했거나 영토를 확보할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기 때문일텐데, 그 원인을 또 따져보자면, '아버지의 부재' 때문일 확률이 크다. 프랑코 정권에 맞서 싸운 아버지는 부패하지 않은 시신이 되어 아버지가 된 '욱스발'과 만난다. 아버지의 부패하지 않은 얼굴을 마주했을 때, 욱스발은 이미 말기암에 걸려 죽음을 얼마 두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부패하지 않은 아버지의 얼굴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대신 욱스발은 아버지 없이 '내부의 이방인'으로 살아야했던 자신의 삶이 아들 '마테오'에까지 유전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거나 노벨상을 받을 확률은 적다. '라고 말했다. 괜히 자존심이 상했던지 아이들은 왜 그렇게 무시하냐면 날뛰었다고 나는 '김만중은 아버지가 죽은 후, 피난 가는 배 위에서 태어났고, 양소유 역시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다. 히틀러도 일찍 아버지를 잃었고, 오바마도 어려서 아버지와 헤어졌다. 김대중도 아버지 없이 자랐다. 봐라. 역사에 획을 긋는 비범한 인간들은 아버지의 권위, 아버지가 주는 안정감에서 벗어난 곳에서 탄생하는데, 너희들은 너무 안전하지 않느냐?"라고.(그냥 생각나서 한 말이지만 하고 나서 많이 후회했다). 이처럼 아버지 없는 이들은 주어진 규범과 기득권에서 탈주하여 새로운 무엇인가를 이루어낼 에너지를 가질 수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욱스발과 같은 길을 갈 확률이 크다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아버지가 없는 욱스발, 아버지를 두고 떠나온 모든 이탈자들은 beutiful한 곳을 바라보며 살기 어렵다.



 그래도 욱스발은 이생에서 벌여 놓은 시시껄렁한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삶이 유전되지 않도록 있는 힘을 다한다. 추방된 흑인의 아내와 아이를 돌보고, 창고 찬 바닥에서 자는 중국인들을 위해 난로를 들여놓아주고,(그 난로 때문에 중국인들은 몰살되지만). 조울증에 시달리는 아내를 병원에서 치료받도록 하고, 아이들을 위해서는 마지막 돈을 마련해 놓는다. 하지만 이런 선의와 그 돈만으로 아이들이 아버지의 삶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이 위태한 세계에서 안정적인 자신들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그래도 욱스발은 믿으려고 애쓴다. 아버지가 엄마한테 준 다이아반지(아마 가짜일 것이다)를 진짜라고 믿으며 만지작거리고, 20대의 얼굴을 한 아버지가 죽음을 따뜻하게 마중나왔듯, 자신의 딸도 자신이 물려준 다이아반지리를 진짜라고 믿으며 자신을 추억하고, 아이들의 고단한 삶의 끝을 따뜻하게 맞아주리라고.



딸이 물었다. '뷰티풀' 철자가 어떻게 되냐고, 욱스발이 말한다. 'biutiful'이라고. 이글어진 현실이고, 뭔가 부족해 보이는 삶이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못난 아비, 욱스발의 마음이 이제는 제법 와 닿는다. 'beautiful'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너에게 짝퉁 다이아반지라도 주고 싶었다. 욱스발과 나의 마음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자들, 수많은 로기완과 세네갈 흑인과 중국인들과 욱스발의 아이들은 결국 biutiful하게라도 살아보고 싶은 우리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연민할 수밖에 없다. 아닌 척해도 우리는 서로가 불쌍하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 옆을 스쳐간 소녀의 이름은 - 최은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