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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Jin Oct 08. 2019

당신 옆을 스쳐간 소녀의 이름은 - 최은영

아이에게 엄마의 구멍을 찢고 나오는 순간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으며, 비루하고 추악한 삶의 시작이었다. 그녀에게 온전히 행복했던 순간은 ‘그녀’와 한 몸이었던 순간. 따뜻하고 몰랑몰랑한 물속에서 꼼지락거리던 때, 그 시절뿐이었다고 하니, 한 아이를 세상으로 밀어내는 일이 과연 장하고 축복받은 일인지 의심이 갔다.


시시때때로 일어나 젖을 물려달라고, 나를 먹이고 안아달라고 우는 아이를 옆에 두고 이 책을 읽었다. 좀 오래 재우기 위해 내 젖 대신 분유를 타서 먹여 놓고 애가 잘 때 새우잠이라도 자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수면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갓난쟁이 애가 딸린 ‘어미’라는 사실을 잠깐 옆으로 제쳐두고 밤을 새워 읽어 내렸다. 그만큼 이 소설은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읽기 쉬우며, 가장 재미있는 것이었으며, 호르몬 이상으로 이래도 눈물, 저래도 눈물, 소변으로 빼내는 수분보다 눈으로 빼내는 수분이 더 많을 갓난쟁이 어미의 눈물을 힘들이지 않고 쏙 빼놓을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대사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에 대강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다고 해서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속에 기쁨과 행복, 사랑이 있었다’라는 내용의 대사가 나온 적이 있다. 아마 고시생이 친부모를 찾은 일이 기적과 같다는 이유리에게 한 말인 것 같다. 소설 속 아이의 성장은 바로 이 말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술 마시고 폭력만 일삼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폭력에 무기력한 엄마를 ‘가짜 부모’로 여기고 이것과 반대되는 ‘진짜 부모’를 찾아 떠난 소녀는 노숙자, 유랑자, 가난한 노인, 다방아가씨, 철거민, 폭주족, 탈학교 청소년 등 우리사회의 주변인들을 차례대로 만난다. 이 만남은 우리 사회에 고학력/ 저학력, 남성/ 여성, 젊음/ 늙음, 유랑/ 정착 등의 이항대립 속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억압과 착취의 문제를 까발리는 과정이자, 이를 통해 이 세상에 ‘진짜’란 없을지 모른다는 현실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만약 이 소설이 이러한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와 별로 새로울 것 없는 현실인식을 독자에게 제공해주는 데 그쳤다면, 아기에게 분유를 타 먹이고 밤새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이 책을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뻔한 여로형 구성과 예술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써먹는 ‘주변, 경계, 소외’ 얼마나 진부한 조합이란 말인가.


하지만, 내 마음과 내 몸을 움직인 것은 이것이 아니라  역시나 뻔하지만 새로운 생명을 내 몸으로 만들어서 밀어내고 난 자로서, 자식에게 “애야, 그래도 괜찮은 순간이 있지 않니?”라는 변명을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기 때문이다. 소녀가 만나는 비루하고 추한, 질퍽거리는 진흙탕 같은 삶 속에서도 ‘노란 원피스’처럼, ‘초코파이’처럼 화사하고 달달한 무엇인가가 끼어들었다. 콧등치기 국수 할매가 짜준 노란 원피스, 장날의 달달한 솜사탕, 영달이 아저씨의 넉넉함 품과 폐가 남자가 알려준 책과 음악의 세계, 다방언니가 알려준 향긋한 샴푸향. 그 감각이 소녀를 버티게 했고, 소녀를 눈물나게 했고, 소녀를 어른으로 만들었다. ‘진짜 부모’를 찾는 대신 자신이 부모가 되게 될 때까지 소녀를 키운 것의 8할은 그 화사함과 달달함이었다. 그리고 질퍽한 진흙 속에서 연꽃 한 송이를 발견하는 눈을 가지는 게 바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연꽃이 거기 있다 하더라도 아무 때나 아무나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드랍고 아름답고 따뜻한 것은 무조건 가짜라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날을 세우던 때, 배낭여행을 갔었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8월의 해지는 로카곶에 서게 되었다. 대서양이 은빛으로 빛나고 세상은 고요했다. 막차는 아직 오지 않았고, 관리소는 문을 닫았다. 짙푸른 대서양과 손잡은 태양, 그리고 바람, 마른풀, 그리고 나만 있었다. 로카곶의 해지는 광경이 별 볼 것 없는 풍경일 수도 있다. 나 또한 다시 그 광경을 보려고 포르투갈로 날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십 년 전 그때처럼 알 수 없는 분노와 설움이 내 몸을 짓누를 때마다 로카의 풍경과 내가 만나던 그 서정적 순간을 떠올린다. 나를 있게 해준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한다고, 이 세상을 살아 여기 올 수 있게 해 준 모든 것들에게 감사하며 흘리던 눈물을 떠올린다.


자는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하곤 했다. 그때의 나처럼 “왜 나를 낳았느냐”라고 이 아이가 눈에 칼을 번뜩이며 대드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맞닥뜨리고 싶지 않지만 그런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절대 화내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이런 지독한 분노와 설움을 잠재울 그런 화사한 순간이 내 아이에게도 찾아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 소설의 소녀처럼 나도, 내 아이도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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