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당신을, 나를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1월 30일 밤부터 31일 새벽까지 아들이 접어놓은 종이비행기가 나뒹구는 거실을 수십 번 오갔다. 발에 걸리는 종이 비행기를 발로 걷어 올리면서 올해의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했다. 작년 아이들에게 했던 말이, 그 전에 했던 말이, 또 그 전에 했던 말이 아니라, 그렇게 죽은 말이 아니라, 꼭 '이 아이들'에게 '지금의 나'만이 할 수 있는 그런 말을 해야했다. 생각은 나지 않는데, 시간을 이미 새벽 3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작년에는 할 말이 너무 많았다. 미안하다, 죄스럽다, 자랑스럽다, 잊지 말자, 사랑한다, 너희들이 있어 숨쉴 수 있었다, 제대로 못 해줘서 미안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너희들이 이렇게 어른인지 몰랐다,
수많은 말들이 내 마음 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강당에서의 졸업식을 마치고 교실에 들어왔을 때, 꽃다발이 놓인 그 책상을 외면하지는 않기로 했다. 외면할 수 없는 그 자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우리 각자의 방식으로 친구를 기억하고, 잊으려 애쓰지 말며, 그렇게 우리가 겪은 고통과 슬픔, 그리고 서로에게 기댄 그 감촉도 우리의 삶이므로 그저, 아름답게 살아가자는, 너무나 추상적인 말을 했다.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나에게 하는 말에 가까워, 나는 그 말들을 끝내기가 쉽지가 않았다. 울먹이며 나 자신에게 하는 추상적인 말들이었지만 이 말들에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더해져 아이들에게 흘러갔다. 열려 있는 몸들, 열려 있는 말들, 그 말들은 지금 어디에 흐르고 있을까.
먼저 간 아이의 졸업장과 졸업앨범, 교지, 동창회보, 그리고 친구들이 놓고 간 꽃다발을 챙겨 그 아이의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부모님을 기다렸다. 여름이면 짙은 녹음이 차 앞 유리창까지 드리우는 자리였다. 나는 그 아파트에서 아들을 키우고, 딸을 낳고, 딸을 엎고 밤산책을 했다. 여름이면 문을 열어 놓고 살던 복도식 아파트에서 내가 젖먹이가 딸린 애엄마로 살 때, 그 아이는 매일 아침 교복 입은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흐뭇하게 웃었을 것이다. 그곳에 학생을 먼저 보낸 선생이 되어 돌아왔다. 눈 오는 졸업식날에. 눈발이 짙어지고, 주차장에서 챙겨간 물건들을 건넸다. 눈 속에서 졸업장을 매만지는 어머니의 손등에 차가운 눈이 앉았던가.
올해는 할 말이 없었다. 담임교사로서 나는 아이들에게 지치고 메마른 모습만을 보였다. 놓쳐서는 안 될, '다시 없을 소년들'이라는 걸 매번 가슴에 새겼지만, 모든 것을 놓고 잠만 자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고,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넘쳐나지가 않아 괴로웠다. 다시 나에게 해야할 말을 꺼냈다. 1995년 2월, 길원여고 3학년 7반 교실에서 우리 담임 선생님이 20년 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코웃음을 쳤는지, 그런데 어제 새벽, 그 거실에서 20년 후에 만나자고 한 그 선생님의 말이 갑자기 생각났는데, 그 말을 한 선생님의 마음이 지금의 내 마음일 것 같아, 오늘 나도 여러분께 다시 20년 후에 만나자는 말을 건넨다고, 각자의 알아서 받아들이라고. 그리고 신영복의 '새로운 출발선에 선 당신에게'의 한 구절을 읊었다.
나는 지금 당신이 좁고 어두운 골목을 걷고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기로 하자 보다 가볍고 관대한 마음으로 졸업식에 오지 않은 몇몇 아이들에게 전화를 할 수 있었다. 몇 년만에 깨알같은 글씨가 한바탕인 손편지를 받았다. 선생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오직 학생뿐이기에, 나는 당신을, 나를,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