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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Jin Mar 16. 2020

우리가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마스크를 쓰고 교무실에서

 예년 같으면 학부모 총회와 아이들 상담으로 한창 바쁠 때다. 11 공교육의 과정에서 지칠 대로 지쳐 이제 선생이 누구인지도 궁금해하지 않을  같은 3 아이들도 이때만은 '행여나', '혹시나' 하는 기대로 교실에 들어오고, 선생 역시 이번에는  제대로   해보겠다는 열망을 안고 교실에 들어간다. 그렇게 나의 열망과 너의 기대가 부딪혀 기분 좋게 팽팽한 기운들이 출렁인다. 때마침 찬바람 속에도 따뜻한 기운이 묻어나 송편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한 목련 봉우리를 한번 건드린다. 겨울 방학  청소 아주머니들과 기사님들의 수고로 반들반들 윤기를 머금은 책상과 바닥, 모든 것이 3 학교에서 서로 감응하며 우리는 함께, 시작한다.


 한낮에 잠깐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 아래  퍼진 엉덩이를 내보이며 운동장에 누워 후배들 축구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봄날의 '같은 3학년 아이들도,  고등학교 올라간 아들을 생각하며 다렸을 누군가의 다림질이 새긴 칼주름이 선명한 교복을 입은 1학년 아이들도, 분주하게 이리저리 뛰어나며 새로  선생님들께 이름과 자리를 묻는 교사들의 기분 좋은 발걸음도, 급식판을 받아들고는 이제서야 제대로  밥을 먹는다며 제일 신나는 나와 동료 주부교사의 한탄도 없는 학교는 죽어가는 공룡같다.


죽어가는 공룡, 학교.

지난 몇 십 년 간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그래도 근대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제도인 학교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교육은 언제나 억업과 재생산의 수단임과 동시에 임파워먼트를 통한 저항과 프락시스의 가능성을 지닌 활동이었다. 그 아슬아슬한 틈바구니 속에서 많은 교육학자들은 아직 실현되지 못한 잠재성에 희망을 걸고 공교육을 지키고자 했고, 또 누군가는 학교는 필요없다는 급진적인 선언을 통해 획일화되고 개인화된 근대 교육에 지독한 독설을 퍼부었다.  우리 교육의 역사 또한 이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학부에서 펴낸 <소학독본>을 비롯한 독본류 교재만 보더라도 교재가, 공교육이 억압과 재생산의 도구이자, 당시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민'과 '현모양처'를 길러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권위를 지닌 제도인 학교에서 교재를 사용해 교육을 하는 방법이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 아름다운 내 모교의 중정에는 이승복의 동상이 있었고,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 (나는 아직도 이 한 단락을 다 외운다) 으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번호 순대로 일어나 외워야만 했다. 다 외우지 못하면 예외없이 몽둥이로 맞았다. 가끔 쓰레빠를 벗어 따귀를 때리는 선생도 있었다. 운동장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다가도 오후 5시가 되면 조례대 위에서 펄럭이던 태극기를 향해 모든 것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88올림픽을 할 때에는 성화 봉송길에 코스모스를 심으러 나갔다. 땡볕 아래에서 코스모스를 심고, 물을 주면서도 한번도 내가 왜 여기서 코스모스를 심어야 하는지 생각하지 못했다. 하라고 하니 해야하는 것이 당연했고, 그것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학교가 제시한 틀에 잘 맞춰진 신체와 정신을 갖고 졸업장을 받고 진학을 하면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이 보장되었다.


 내가 도시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효성물산에 들어가서 야간부 학교를 다니거나(신경숙의 '외딴 방' '나'의 길), 조금 더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가는 방법, 이 둘이었다.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믿기지 않겠지만 당시 우리반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한 여학생은 5명도 되지 않는다) 후자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역랑과 노력뿐 아니라 이를 지지해줄 부모의 경제적, 문화적 자본이 있어야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 하숙이나 자취, 또는 기숙사에 들어가 생활을 해야 했고, 그 밖에도 책 값, 보충수업비 등등을 감당했야하니 딸 아이에게 저 정도 투자(이걸 투자라고 해야하나?)를 할 마음을 먹지 못한(안 한) 부모들도 상당수 있었다. 힘들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고 해서 원하는 도시에 가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 경우를 예로 들자면, 일단 부모와의 갈등을 최소화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공부를 '좀' 잘해서 인근의 국립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부모마다 기준이 달랐지만, 그래도 부모가 딸을 혼자 서울로 보낼 수 있다고 여기는 대학의 하한선을 넘지 못하면 인근 광역시(내 경우에는 경북대) 국립대에 가야 했는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그 대학 진학에 실패하면 바로 간호 전문대로 직행해야 했다. 대구에서 4학년 때,  1명 뽑는 물리 중등임용시험을 한방에 통과한 내 친구는 전문대 나와서 빨리 취직하라는 엄마를 언니들이 눈물로 호소해서 물리교육학과에 진학했고, 바로 물리 교사가 되었다. 그 친구는 초등학생때부터 시골 장터에서 생선을 손질했다. 홀어머니가 어물전에서 생선장사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공교육은 말 그대로 신분 상승(?)을 위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쓰레빠로 맞고,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선생에게 성희롱을 당하며 '장미'나 '거북선'을 사러 다녔어도 이 학교가, 교육이 우리를 배반할 거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하고 안했다. 안 하고 싶었다. 기댈 데가 여기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도망가고, 발작을 하고, 대들고 찢고, 발악을 했지만 그대로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선생님이 내준 똥종이 프린트물을 풀었다. 물리교사가 된 그 친구는 난방도 안 되는 추운 교실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공부를 했다. 학교란, 이런 거대한 공룡이었다. 그 긴 목위에 올라 타고 쿵쿵 다른 세계라고 믿었던 곳으로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코로나의 시기, 죽어가는 거대한 공룡, 학교란 무엇인가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학교는 무엇인가, 나와 어물전의 내 친구가 기댔던 학교는 이제 EBS와 온라인 강의가 대체하고 있다. 악명 높았던 '한샘국어'처럼 밑줄 치고, '하늘'이란 '인간 본연의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사회'라고 설명을 달아놓은 책을 EBS에서 "수능연계교재 사용설명서"라는 막강한 권위를 달고 내놓았고, 온라인 강의들도 수능연계교재를 분석한 교재를 내놓고 있으니, 학교 선생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나 역시 '하늘'은 인간 본연의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사회라는 텅빈 기표만 내 입으로 내뱉을는 일이다. (인간 본연의 자유와 평화? 이게 뭘까? 이런 게 있기는 있을까? 쓴 사람은 뭔 말인지 알고 쓴 걸까? 본연의 평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왜 '하늘'이 그것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저 맥락에서는 불필요하다) 그러니 개학이 연기되어도 수능 준비에는 별 지장이 없다. EBS와 온라인 강의, 그리고 소규모 그룹과외와 학원수업은 이미 수능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까. 나 역시 학교가 쉬자, 방임했던 아들에게 '연산 2페이지', '독해 한 회'를 꼬박꼬박 시킨다.


문제는, 이런 아이들이 아니다. 나름 배울 만큼 배우고, 벌 만큼 버는 집 아이들은 선량한 그들의 부모가 아이들을 챙기면서 이 시기를 슬기롭게 잘 버틸 것이다. 사회적 거리가 멀어진 만큼 가족들은 단단해지고, 그 안에서 아이들은 역설적이게도 좀 더 안전하게 소소한 행복할 거리를 찾는다. 같이 요리를 하고, 아이유의 음악을 듣고, '아무 노래' 춤을 같이 추면서,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함께 맞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은 어떨까? 학교에 가서 친환경 급식이라도 한끼 제대로 먹고, 선생님과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축구도 하고, 방과후수업도 해야 하루가 가는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옆집에 또래 친구가 없는 시골 아이들이나, 부모가 집에 없는 아이들은 정말이지 고립무원에서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을지 모른다. 오세연, 김학범(2019) 연구에 의하면 농촌지역 아이들의 핸드폰 과사용은 조손가정과 맞벌이 가정이라는 가정적 환경과 오프라인에서의 빈곤한 놀거리 때문이다. 자연에서 뛰어노는 것도 같이 할 친구와 누나, 언니, 오빠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어린 아이일수록 지켜봐주는 어른이 있어야 덧셈 뺄셈도 신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에게는 살뜰히 챙기는 부모가, 어물전의 친구에게는 공부시키려는 언니들이, 그런 '어른'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고약한 공룡이라도 그 공룡 목 위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이니, '모든 게 자기 할 냥'이라고 퉁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지해주는 '어른'들이 없는 아이들은 이 코로나의 시기를 어떻게 지나가고 있을까, 학교가 그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이때, 고맙게도 온라인 강의와 수백억 대의 인강 강사들의 틈바구니에서 학교가, 내가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학생을 지지하고 인정하는 것은 나에게 부여된 권력이자, 억압 기제일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이 권력 또한 그 학생이 없다면, 나를 필요로 하는, 혹은 나에게 감응하는 학생이 없다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니, 그리고 그러한 교사의 인정과 지지조차 받지 못하면 그저 메말라 시들어갈 아이들이 있을 것이니, 학교와 교사는 보다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너무 뻔한 이 말만이 죽어가는 공룡, 시들어가는 가장 낮은 곳의 아이들을 살리는 일일 것이라는 생각을, 교무실에서, 마스크를 쓰고, 앉아서 해본다. 한때 학교는 나와 어물전의 내 친구를 다른 세상으로 옮겨놓아 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지만, 이제 학교가 하지 않아도 수많은 입시학원들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으니, 우리는 '봄날의 곰들'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이들이, 내가 그가 아는 몇 안 되는 '어른'일 수 있는 이들이, 소란스럽게 어울리며 부딪히는 장소였으면 좋겠다. 몸에 각인된 흔적으로 남는 장소, 그곳에 우리가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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