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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Jul 07. 2021

제주도 이 습기야

습기


"엄마 이것 봐." 아이가 젓가락을 들어 눈앞에 들이민다. 뜯어 놓은 조미김이 미역처럼 흐물거린다.

빨래 - 건조 - 쉰내 - 빨래. 세탁 노선은 순환선이다.

하루에 몇 통씩 물이 가득 찬 제습기를 비운다.

나와 딸을 비롯한 사람들의 머리가 부실 부실하다. 곱슬곱슬 이마께 머리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장마가 왔다. 올 해는 지각 장마라고 한다. 조깅에 '조'가 아침 '조朝' 라는 농담에 약 5초간 고개를 끄덕이던 한자 무식자는 왠지 장마에 장은 길 장長 에, 마가 꼈다 할 때 그 마귀 마魔(비 싫어함)라고 내 멋대로 유추하곤 했다. 그런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한자 길 장長 에 물을 뜻하는 옛 우리말 '맣'을 합쳐 부르다 장마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단다. 장마는 '긴 물'인 것이다.


사방이 바다인 제주로 이사 온 후에야 습기의 무서움을 알았다. 비라도 때려 부으면 눈에 보이니까 물기를 실감할 수 있지만 장마라고 매일 비가 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비 없이 흐린 날은 더 축축하게 느껴진다. 제주생활 초반에는 제습기를 틀자마자 뜬 80%라는 숫자에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서귀포민이다.

실체 없는 습기란 놈은 몸이며 가구, 이불, 방바닥까지 느적느적 달라붙는다. 강력히 밀봉된 과자나 김에도 스며들어, 열었을 때 그 축축한 상태를 보자면 실망스럽기도 하고 피차 축축한 존재(?)로서 동병상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때에 종일 실내에 있다가 밖에 나가면 흡사 어항에 들어앉은 기분이 든다. 집 앞 매실나무 모과나무는 수초요, 돌담은 수석이다.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느적느적 길을 가는 다른 물고기들을 마주치면 서로 공감과 응원의 눈빛으로 뻐끔대 본다. 맥없이 흐물거리는 과자나 채 20m도 안 되는 가시거리... 육지인으로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습기다. 서귀포 살다가 습기 때문에 이사 간다는 사람도 봤다. 들어보니 제주시보다 서귀포가 습기로는 한 수 위란다. 마 그곳에 내가 있다. 이 습기야 저 습기야 온갖 저주를 퍼부어도 지지 않고 창문 너머로 마수를 뻗는 무서운 놈이다. 제주에 와서 첫 해는 제습기 없이 에어컨으로 버텨봤지만 택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생각에 제주도 필수 가전은 제습기와 건조기다. 제습기만은 꼭 구매해야 한다. 다음 해에 세간살이 반쯤 버리고 싶지 않다면.




이토록 비실비실 힘을 쓰지 못하는 인간들과 다르게 푸른 것들은 더욱 신이 난다. 다소 자연친화적인 환경에 살다 보니 자연이라는 게 신비한 한편 무섭게도 느껴진다. 특히 이 여름의 제주는 무엇이든 살아 숨 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소름이 돋도록 왕성하다. 온갖 풀과 나무, 벌레들... 얼마 전에는 집으로 들어가다가 타란튤라급 거미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이와 산책을 하다가 뱀 허물을 보는 일은 예사다. 겸손의 미덕을 기르고 싶다면 섬으로, 산속으로 들어가 살아보자. 온갖 멋지고 웅장한(?) 생명체들이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는 세상에서 인간은 겉절이(?)라는 것을 조용히 인정하게 될 것이다.


나의 제주 생활에서 이 긴 비는 고비다. 비가 그치면 바다로 풍덩할 날들이 이어지고, 더위도 지고 나면 제주의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가을이 온다. 그러나 아직 장마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습기와의 긴 싸움이 될 것이다. 몸이 축축하면 마음도 축축해지기 때문에 명랑함을 애써 끌어올려줄 것들을 찾는다. 방바닥에 누워 배 긁으며 볼만한 가벼운 만화를 빌리고, 청량한 보이 밴드의 노래를 찾아 듣기도 한다.


여전히 철이 없지만 사회생활도 해 보고 아이도 낳으며 세상에 쪼금 굴러본 나는 요즘 무슨 일이든 '지나간다'는 생각에 위로받는다. 때론 지나가는 것에 아파하기도 하지만. 긴 비가 지나면 반짝 나는 해 아래서 뭐든 말려야지. 이불도 바삭바삭 나도 바삭바삭. 과자도 바삭한 것만 먹을 테야. 촉촉한 초코칩 따위 저리 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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