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같은 일상
친구의 결혼식 참석을 겸해 짧은 서울 여행을 했다. 오랜만에 간 서울은 그대로였다. 그대로인 서울을 그대로인 친구들과 누비며 나무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그대로 서 있을 뿐인데 철마다 무성해지고 누르스름해지다가 야위고 마는 시간에 대해서 생각했다. 늙어가는 엄마 아빠의 늙어 가는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한창 아이를 키우고 출산을 앞두며 제법 어른스러운 모양을 한 철부지 소녀들을 만나 저마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가운 곳 반가운 이들과의 재회에 즐거웠고, 그럼에도 집 떠나온 고단함을 숨기긴 어려웠다.
늦은 오후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공항버스를 시간 맞춰 타기 위해 서둘러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승무원이 이런 인사를 하는 것 아닌가.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서울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즐거운 여행이라니. 아무렴 제주행 비행기에는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설렘과 흥분이 흘러넘치니 마땅한 인사말이었다. 이제야 보금자리로 돌아온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에게나 생경하게 들렸을 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은 그 인사는 '네 일상이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란다'는 아주 다정한 주문처럼 들렸다. 가슴에 신선한 공기가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육지에 사는 엄마는 제주에 오면 평범한 길만 달려도 환호성을 터뜨린다.
"어머, 저 돌 좀 봐!"
"어머, 저 밭 좀 봐!"
아니 돌이 뭐라고 저리 감탄인가. 그러든지 말든지 엄마는 길에 널린 돌만 봐도, 풀만 봐도 좋다며 탄복했다.
내가 매일 걷는 길에서 공들여 사진을 찍고 감탄하는 관광객들을 보면 부럽기까지 했다. 여행해서 좋겠다 하며.
제주에 온 지 만 3 년 되었다. 나도 처음엔 아파트 단지의 야자수를 보고도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이제는 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하는 마음으로 산다. 얼마 전에는 바닷가로 캠핑을 갔는데 숲 안에서 먹고 쉬고 할 뿐 바다에 한 번 안 나가봤다. 이 좋은 가을날 제주로 물밀듯 관광객들이 들어오는데 막상 바쁘다는 핑계로 산책 한 번을 못한 것이 아쉬워 오늘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자마자 바로 길을 나섰다.
귤이 벌써 노랗게 익었구나. 동백 필 때 이 집 마당 참 예뻤는데... 아직도 봉숭아꽃이 피네?
곳곳에 눈을 두며 가볍게 걷는다. 제주에 살면서 '사는 곳'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제주에 살면 매일이 여유롭고 편안할 것 같지만 막상 살아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물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설렘은 금방 익숙함으로 변하고야 마니까. 그게 간사한 사람이니까. 사는 곳이 어디든 사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이 좋은 제주에 살며 새삼 느낀다. 매일 여행자의 마음으로 산다면 어디서든 반짝이는 것들을 발견하게 될지도.
제주에 살면서 자주 서울을 그리워했다. 이번 서울 여행에서는 직장 다닐 때 수 없이 누비던 광화문 광장을 걸었다. 그토록 그립던 곳. 여전히 많은 사람이 우르르 길을 건넜고, 여전히 미국 국기를 들고 다니는 미스터리 한 이들이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었다. 어제 온 것처럼 익숙했다. 그렇게 익숙하게 누비던 길을 두고 다시 제주에 도착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하는 인사를 들으며. 사는 곳을 매번 바꿀 수는 없더라도 생활인과 여행자 사이 그 어디든 마음대로 살아보자며 익숙한 공기를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