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요즘에는 멋지고 튼튼해 보인다고 돌을 기계로 뽀딱허게(반듯하게) 잘라서 쌓기도 하지만, 그것이 좋은 것은 아니라. 오히려, 고망(구멍)이 영 싯고(이렇게 있고)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담이 더 오래가. 거난(그러니까) 비결은, 고망이 시난(있으니) 쓰러지지 않는 거. 게고(그리고) 뽀딱허지(반듯하지) 아니행(않고) 구불구불 쌓아 놓으니까 비바람이 불어도 견뎌내는 거라.
_ <할망은 희망> 중에서 (정신지, 가르스연구소)
내가 사는 제주에는 마을길 곳곳에서 무심한 듯 시크하게 올려진 돌담길을 쉽게 볼 수 있다. 제아무리 높은 돌담도 성인 흉부 정도의 높이니 이 낮고 성글어 보이는 돌담이 무슨 담의 기능을 할까 싶기도 하다. 요즘 새로 쌓는 돌담은 크기와 모양이 균일하고 시멘트를 발라 튼튼하기라도 하지, 아주 예전에 쌓은, 말 그대로 ‘돌로 쌓은 담’은 왠지 충격을 가하면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다. 그런데 이 돌담, 시간을 두고 지켜보니 지나온 세월만큼 내공이 상당하다.
일곱 살 딸이 한라봉, 고구마, 배추, 대파 없는 것 없는 부지런 할머니 밭을 구경한다고 체중을 실어 기대어도 돌담은 꿋꿋하다. 심지어 파도가 널을 뛰고 나무가 두 동강 나는 태풍이 지나간 후에도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서 있는 것을 보면 이쑤시개를 문 주윤발 못지않은 여유까지 느껴진달까.
제주에 살다 보면 날씨 확인 기본은 풍속 체크다. 나무가 바람에 머리 잡힌 채 이리저리 나부낀다면 몸을 사려야 하는 날이다. 기상 예보에 발랄하게 표기된 노란 햇님만 보고 섣불리 나갔다가는 몹시 가난해진 마음으로 귀가할 수 있다. 바람은 영혼까지 탈탈 털어간다는 것을 제주에 살며 실감했다. 그런데 그런 바람을 일상으로 맞는 제주 돌담의 비결이 구멍이라니…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사실 구멍이라면 나도 꽤 자신 있다.
나는 벌써 여섯 해째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자 전업 주부지만 요리도 다른 집안일도 제법 못하는 편이라 사실상 살림 구멍이라 할 수 있다. 본인의 약점은 본인 자신이 제일 기민하게 알아챈다. 아이 앞에 뭘 차려 놓고도 식도로 채 넘어가기도 전에 “먹을 만 해?” “맛있어?”하며 조바심을 낸다. ‘맛있지 않아도 그냥 먹어줄(!) 것’을 내심 부탁하기도 한다. 게다가 보드랍지도 않은 손은 왜 그렇게 잘 미끄러지는 건지 우리 집은 주기적으로 그릇과 컵을 구매해야 한다. 그때마다 남편은 미래의 내가 깰(?) 그릇 수까지도 계산해가며 4p짜리로 살지 낱개로 살지 휴대폰을 붙잡고 궁리한다.
그 외에도 날로 청순해지는 기억력과 치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둔함, 옆에 화물차가 지나가면 오금이 저려오는 운전 구멍인 데다 물론 금전적 구멍 또한 가히 싱크홀 수준이다. 그리고 최근 발치 후 임플란트 식립을 기다리는 잇몸의 현실 구멍까지… 구멍이라면 좀처럼 빠질 수 없는 나인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다.
구멍이란 게 언제부터인가 메꿔야 하는 숙제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구멍이 있어서 재미있는 순간들을 만난다. 하향 평준화된 메뉴 속에서 제법 맛만 내도 엄지를 들어주는 아이의 미소. 차가 없는 뚜벅이인지라 목적지로 바로 향하는 경제적인 외출은 할 수 없지만 둘러 둘러 가는 길의 소담한 귤밭 풍경이라던지, 버스에 일렬로 앉아 복도에 다리 한쪽씩 내놓으신 보라 잠바 할머니 군단을 구경하는 재미… 이런 작은 구멍부터 마음속 큰 구멍까지 그저 구멍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대개 성장과정에서의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듯 나 역시 어린 날에 생긴 마음속 큰 구멍이 있다. 어릴 때엔 아빠와 다정히 지내는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워했고, 그것은 결혼해도 아이를 낳아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인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그 구멍이 있기에 다정한 아빠가 되어준 남편에게 더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 있고 평안한 일상, 화목한 가정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구멍이 있기에 소중해지는 것들도 많다.
부족하다 생각하면 자꾸만 초조해지고 뭐든 채워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구멍의 묘미를 느끼면서 내 일상은 좀 더 풍족해졌다. 빈 구멍을 통하는 바람처럼 내 구멍 사이로 즐거운 일과 좋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완벽주의자가 나를 본다면 정신승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뭐, 인생은 정신 승리하면서 사는 거니까. 내 인생 우쭈쭈 하면서. 나라는 땅을 모르고 여기저기 하중을 두다간 더 거대한 구멍이 생겨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저 가벼운 점프와 함께 구멍을 통과하기도, 구멍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살아간다. 경쾌한 발걸음의 마리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