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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Nov 03. 2021

제주에서 귤 사 먹으면 왕따라는데

그렇다. 사 먹는다. 

이렇게 제주의 아웃사이더임을 자연스레 고백해본다.


내가 사는 귤국의 사계절은 이렇다. 

해가 바뀌고 따스한 봄바람이 불면 제주의 공기가 달다. 환상적인 귤꽃 향이 천지에 진동을 한다. 아카시아 향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다 봄을 시기하는 비가 몇 차례 지나면 꽃이 진 자리에 엄지손톱만한 아기 귤이 달린다. 무더위에 지쳐 헤롱 거리다가 슬그머니 아침저녁 선선해진 바람에 나가 걸으면 그새 주먹만치 커진 귤들이 익어간다. 귤밭마다 귀여운 밭일 모자부터 고쟁이 작업 바지까지 화려한 패턴으로 몸을 감 싼 한 팀의 할머니들이 절제 있는 동작과 빠른 속도로 귤을 딴다. 알아들으래야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사포 제주 방언과 함께. 찬바람이 불며 본격적인 귤 철이 도래하면 식당이며 병원이며 교회며 문 앞에 귤들이 날 가져요~ 하고 널브러져 있는데 포인트는 집어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런 귤국에서 도민 3년 차인 나는 아직 열심히 귤을 사 먹고 있다. 제주에서 귤 사 먹으면 왕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극도의 내향인인 나는 그 농담에 실로 웃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사온지 첫 해엔 대형마트에서 관광객처럼 소량으로 사 먹었고, 이제는 동네 기반 거래 어플로 '비상품' 귤을 한 박스씩 사 먹곤 한다. 비상품 귤이라고 맛없는 귤이 아니다. 그야말로 모양이 예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먹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잘만 찾으면 저렴한 가격에 갓 수확한 신선한 귤을 농장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다. 선과 작업 중인 판매자분이 건네는 귤 두 세알 까먹으며 집에 돌아오곤 한다. 

재미있는 것은 가끔 육지 친지들에게 귤이나 보낼까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육지에서 더 싸게 좋은 것을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 살던 시절 시어머니가 매번 서울에서 "도대체 뭘 사 먹느냐" (질 좋은 채소 생선 고기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물으실 때마다 "아유 어머니 서울엔 다 있어요! 더 싸고 좋아요." 했었는데 딱 그 짝이다. 


또 하나 낭만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자면 농약이다. 지역 커뮤니티에는 종종 '귤밭 뷰' 집에 살고 싶다는 글에는 이런 댓글이 달린다. "농약 때문에 창문도 못 열어요." 산책을 하다가 근처 밭에 약을 치고 있으면 후다다닥 얼굴을 가리고 뛰어간다.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달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낑깡 밭 일구고 감귤도 우리 둘이 가꿔봐요~ 

성시경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세상 무미건조하게 토를 달아본다. 예... 바달 볼 수 있는 창문은 제주 바람 한 번 시원하게 불어닥치면 덜커덩 덜컹 그날 밤은 다 자는 거고요. 낑깡 밭 일구고 감귤도 우리 둘이 가꾸기는 쉽지 않답니다. 

나라고 제주살이에 환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행 중 묵었던 숙소처럼 마당에 릴랙스 체어를 두고 커피잔에 햇살을 가득 담아 마시는 로망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주택에 오래 산 지인은 쥐, 뱀, 지네, 상상초월의 벌레 등 이제 볼 것 다 봤다며 신축 빌라로 이사 갔다. 마당에 사는 남편의 동료는 이놈의(?) 잡초는 왜 이렇게 빨리 자라냐며 하루가 멀다 하고 예초기 돌리다 지쳐 쓰러지는 삶을 산다. 언제나 로망은 로망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귤국 사람들이 제일 바쁜 이 계절. 우야됐든 가을이 오고야 말았다. 

길을 걸으며, 주렁주렁 달린 것들의 새콤달콤한 속내를 상상하며 꿀꺽 고이는 침을 삼켜본다. 귤농사를 하는 사람도 아닌데 귤이 노랗게 익어가는 계절이 오면 한 해가 마무리되어가는 기분이 든다. 올해는 어땠나. 부지런한 귤나무처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던가 나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이 많은 귤들이 추운 겨울 어딘가에서 느리게 가는 시간 심심풀이로, 상큼한 입가심으로, 나눠 먹는 정으로 저마다의 입 속에 쏙쏙 들어갈 장면을 생각하니 어쩐지 뱃속이 뜨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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