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잠전문가 Nov 05. 2021

그놈의 설정! 설정!

인생샷

"젊은 여자들은 사진 찍는 걸 좋아해."

아이는 여행 온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다 이렇게 말했다. 젊은 여자뿐이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관광객들은 제주의 다채로운 풍경들 앞에서 기념할만한 사진들을 열심히 남긴다. 세련된 분위기의 카페에서, 쪽빛 바다 앞에서, 짙고 푸른 숲 속에서... 어디서나 셔터음이 들려온다. 하긴 나도 제주에 이사 와서 처음으로 포토달력을 만들어봤으니 과연 절로 셔터를 누르게 만드는 곳이다. 


익숙한 동네에서 들뜬 여행자들을 구경하는 것은 또 다른 제주 생활의 재미다.

바다에 널린 소라게 같은 걸 백과사전 사진 찍듯 접사 모드로 신중하게 찍는 모습이나, 매일 걷는 돌담길 앞에서 연속 촬영 모드를 해둔 카메라 앞에서 뛰고 뒤돌고 난리가 난 모습을 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해가 넘어가기 전, 하늘이 노란빛 분홍 빛 부드럽고 따뜻한 색으로 물드는 시간이면 금능 바다엔 수많은 웨딩 촬영 군단이 몰려온다. 저마다의 취향으로 고른 새하얀 드레스와 부케, 그리고 다정한 혹은 다정하게 연출된 얼굴들을 보고 있자면 그들의 사연과 사정이 사뭇 궁금해지곤 한다. 낭만적인 하늘색과 노을빛에 반짝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오늘의 사진을 몇 년 후에 들춰본다면 저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이때 좋았지 혹은 내가 미쳤지? 아름다운 시절을 필사적으로 담는 그들을 보며 하얗게 머리가 센 노부부처럼 멀찍이 앉아서 재미있게 구경하는 우리다. 


웨딩촬영의 성지, 금능 바다


"그놈의 설정 설정!"

언젠가는 이 뭔가 공감되는 절규에 크게 웃은 적도 있다. 작은 해변이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곳에 앉아 치킨을 주문하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던 날. 보나 마나 멋들어진 노을이 레디, 큐! 를 앞둔 오후였다.

우리 옆으로 한 커플이 와서 파라솔과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가볍게 맥주 한 캔 하려던 것 같은데 자꾸만 '사진각'을 찾으며 음식을 이리저리 옮기고 의자 방향을 바꾸는 여자에게 "그놈의 설정! 설정!!!" 남자는 목 놓아 외치고 만 것이다. 소중한 순간을 기록하되 이왕이면! 예쁘게 기록해서 이왕이면! 많은 이의 하트를 받을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닌가 하는 그녀, 그리고 매사에 사진각을 찾는 애인 때문에 지쳐버린 그. 그 절규가 너무 웃기고 슬퍼서 그만 폭소해버렸다. 


좋은 것 예쁜 것 보면 카메라 어플부터 켜는 게 일상이 되었다. 

기가 막힌 풍경을, 귀여운 아이의 미소를 놓칠세라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어 든다. 그런데 어쩐지 휴대폰 액정으로만 바라본 것이 아쉬워지는 순간도 있다. 커다랗고 선명한 무지개랄지 경쾌한 돌고래의 점프랄지. 찍어서 멋지게 남기고도 싶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주고도 싶었지만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니 어쩐지 믿기지가 않았다. 나 그거 진짜 봤던가. 사진첩에 분명하게 남았음에도 자꾸만 그 순간이 내게 있었는지 묻게 되는 순간이 있다. 사진첩 말고도 내 안 깊숙한 곳에 그 멋진 장면들이 남아있을까. 가끔 그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마주하면 노란 귤과 새빨간 동백을 마주하면 언제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카메라를 꺼내 든다. 

제주에서 사진은 못 참지. 

나는 오늘도 산책도 아닌 출사도 아닌 것을 떠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에서 귤 사 먹으면 왕따라는데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