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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Nov 10. 2021

멀리서 보면 한 걸음이면 갈 것 같은데

오름

가을이 오자 여름 내내 바닷물에 잘 절여진 구릿빛 장아찌들은 이제 뭐 하고 노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하고 놀긴. 제주의 가장 좋은 계절, 가을인데! 은빛 억새가 마법처럼 흔들리고 귤은 노랗게 익어가는 가을. 오름에 오르기도, 캠핑을 하기에도 딱 좋은 가을이다. 지난 월요일, 우리는 깊고 고운 색을 흔들며 서둘러 떠나려는 가을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구좌에 있는 다랑쉬 오름을 올랐다. 


첩첩산중. 제주에는 그런 거 없다.

첩첩이 겹쳐있는 산 봉우리의 부드러운 능선은 육지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 대신 제주의 길을 달리다 보면 뿅뿅 튀어나온 두더지처럼 귀여운 오름들이 여기저기 등장한다. 한라산에서 슈욱~ 펑! 하고 날아가 안착한듯한 미니 마운튼 같달까. 

어쩐지 소박한(?) 산세에 안심하며 오름을 오르다가도 급경사와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으로 헉헉거릴 때면 산과 오름의 차이가 뭘까 궁금해진다. 저질체력의 소유자로서 굳이 따져보자면 산은 눈으로 봐야 하는 것, 오름은 오를만한 것? 그러나 동네 엄마들이 아이 데리고 갈만하다던 솔오름을 오르다 목 끝에서 쇠맛을 봤으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오름은 지질학 용어로는 ‘기생화산’(parasitic volcano). 지구중심으로부터 올라온 열이 지층의 부드러운 곳에서 불쑥불쑥 솟아오른 것*이라고 한다. (*중앙일보 네이션와이드 참고) 송악산도 기생화산이라는데 도대체 '산'과 '오름'과 '봉'의 기준이 무엇인지 뜨내기 제주도민은 여전히 궁금할 따름이다. 


사실 뭐 오름의 실체를 파악하기에는 다녀온 오름이 손에 꼽음을 고백한다. 유아기 자녀가 오름의 오자만 꺼내도 오만상을 썼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나마 성취감과 보상으로 약간의 고통을 이기게 된 일곱 살이 되니 일 년에 두세 번 오름을 허하신다. 요즘엔 제주도 지도를 스케치북에 대충 그려 오름을 표시해두고 갈 때마다 도장을 찍고 있는데 도장 찍는 맛에 먼저 오름행을 권하는 때도 있다. 


하의실종 아니고요 하체실종의 현장.jpg


엊그제 다녀온 다랑쉬 오름은 아이와 오르기엔 생각보다 힘들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눈을 까뒤집거나 한숨을 내쉬거나 네 발로 기어오르면서도 어린이는 오름을 올랐다. 거의 정상을 앞둔 길에 그만 내려가겠다 업어달라 포기의 뜻을 내비쳤으나 남편과 나는 불패의 협상 카드, '편의점 쇼핑'이라는 보상을 내걸어 결국 끝까지 올랐다. 

내려오는 길도 쉽지 않았다. 다리는 뇌의 명령에 호응하지 않고 제멋대로 나부꼈다. 꺾이고 미끄러지며. 중간에 잠시 멈춰 풍경을 보았다. 맞은편에는 다랑쉬오름보다 낮은 '아끈다랑쉬오름'이 바람결에 억새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한 걸음이면 갈 것 같은데 진짜로 걸으면 진짜로 힘들어."

늦은 오후 저무는 해 아래 부드럽게 흔들리는 억새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그 사이를 열심히 걷는 개미보다 작은 사람들을 보며 아이는 말했다. 

정말 그랬다. 한 걸음이면 갈 것 같은 오름이었다. 풀린 다리로 헤롱 거리며 하산하면서도 아이의 그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멀리서 보면 한 걸음인데 막상 들여다보면 정비되지 않은 험한 길도, 이백 개 가까운 계단도 있는 오름. 대단치 않아 보이는 삶도 고비가 있고, 그래도 꾸역꾸역 걷다 보면 탁 트인 풍경과 땀을 씻어주는 바람이 있다. 내 삶을 이름 붙인다면 '봉'이 붙을지 '산'이 붙을지 '오름'이 붙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험한 길에 숨을 몰아 쉬기도 하고, 상쾌한 바람에 감탄도 하며 한 발 한 발 걸을 뿐이다. 오르락내리락. 그것이 인생이라면 그저 걸을 뿐. 


나도 가끔 세상에 몇 없는 핀 조명을 받는 이들이 부럽다. 다시 태어나도 난 저렇게 못 하겠지 싶게 빛나는 사람. 그러나 수백수만 관객이 집중하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그들의 무대를 바라보는 나는 어쩌면 저 멀리서 팔짱 끼고 '저긴 몇 걸음이면 갈까' 교만한 계산을 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거친 길 빽빽한 계단은 생각도 않고서. 

또 뭐, 꼭 등산인들의 버킷리스트 같은 산이 되지 못하면 어떤가. 내 삶이 오름 직한 낮은 언덕이라 해도 나만의 희로애락을 소중히 여기며 살자고 작게 다짐하며 더듬더듬 힘 빠진 발을 내디뎠다. 


"그래도 정상에 오르니까 엄청 뿌듯하지?" 

주차장에 도착해 EBS 교육방송식 질문을 던지니 "아니~" 딱 한 마디 시크한 답변을 돌려준 어린이는 근처 편의점에서 뽀로로 주스와 킨더조이 초콜릿을 집어 든 후에야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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