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잠전문가 Nov 12. 2021

관광지의 생활자

손님맞이 

몇 해 전 방영된 <효리네 민박>이라는 프로그램을 참 좋아한다. 

북적북적 다양한 사람들, 즐거운 만남. 이효리와 이상순, 두 주인장 부부의 여유와 재치... 제주의 풍경과 안락한 집을 예쁘게 담은 이 프로그램은 그냥 틀어 놓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효리네 민박을 보고 제주행을 결심한 것은 아니지만, 시즌2가 종영되던 해 우리는 제주로 이사 왔고 올해로 3년 차 도민이 되었다. 얼마 전 우연히 효리네민박을 다시 보게 되었다. 분명 예전에도 봤던 장면인데 그땐 스쳐 지나갔던 주인 부부의 종종걸음이 눈에 띄었다. 마중과 배웅을 하고, 상을 차리고 잠자리를 준비하는 모습... 왠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가족과 친한 친구들이 제주 여행 계획을 알려오면 이미 그때부터 마음속에선 종종걸음이 시작된다. 밖에서 만나 밥 한 끼 같이 먹는 친구도 있고, 여행 중 하루는 우리 집에서 묵는 이, 부모부터 아이까지 죽이 잘 맞아 여행 내내 같이 자고 먹으며 다니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일정이 안 맞아 얼굴도 못 보고 제주에 왔다 간다는 인사만 나누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마음속 종종걸음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숙소 위치를 물어보고 내가 아는 선에서 갈만한 식당이나 관광지를 추천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굳이 그들이 알아서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검색에 검색을 해 정보를 보태기도 한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제주도지사도 아니고 관광청 소속도 아니고 제주 날씨 요정도 아닌데, 누가 온다고 하면 그렇게 마음이 쓰인다. 비가 오고 날씨가 궂으면 나까지 미안해지고 아쉽다. 이왕이면 맛있는 것 먹고 갔으면 좋겠고 좋은 여행이 되었으면 싶다. 아끼는 이들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제주도를 생각보다 좋아해서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제주도를 욕보여선 안 된다'는 조금 이상한 다짐으로, 육지 지인들에게 나는 거진 제주도 대표 같은 책임감을 갖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식당이며 관광지를 지역별로 리스트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우리 집과 먼 쪽의 리스트는 내가 안 가본 여행지와 식당이 태반이다. 관광지의 생활자로서 '관광 < 생활'의 밸런스를 맞추고 사니 어쩔 수 없다. 


손님이 원하는 관광지나 음식이 명확하면 그래도 좀 나은데, "제주도 어디든 다 좋지. 제주도는 다 좋잖아."로 나오면 가이드 난이도가 급상승한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 걷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 고급진 곳을 좋아하는 사람부터 가성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까지... 전엔 나 좋은 것 고르면 되었는데 제주에 와서 종종 상대방에 맞춰줘야 하는 입장이 되니 사람들의 이토록 다른 취향에 놀라곤 한다. 분명한 위시가 없으면 또 한 차례의 마음속 종종걸음이 시작된다. 나름대로 도민 맛집에 데려가면 허름한 분위기에 실망할 수도 있고, 그렇다고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에 데려가면 왠지 도민 지인을 둔 메리트가 전혀 없는 느낌이다. (도민들은 주로 가성비 좋은 식당을 간다. 오션뷰와 세련된 서비스로 가격 올려치는 관광특화 식당은 잘 가지 않는다. 도민인 남편 동료 한 명은 흑돼지고 뭐고 그냥 정말, 가성비와 깔끔함을 원한다며 하남돼지 집! 을 목놓아 외쳤다는 후문이다.) '뭐든 다 좋아!'라고 외치는 자여, 가슴에 손을 얹고 정말 싫은 게 하나도 없는지 자문하라. 코트 한 벌 값 식사 괜찮은가요? 직각 경사 산길 괜찮은가요?!

아무튼 마음속 종종걸음으로 고르고 골라 데려간 곳의 반응이 마땅치 않으면 어쩐지 자책하게 되는 나다. 


올 해는 손님이 더 많았다. 

아무래도 코로나로 답답한 일상이 길어지니 탁 트인 풍경이라도 보고픈 마음이었을 터. 이번 가을엔 정말 정신을 차릴라 치면 누가 와서 반가움으로 종종거리다가, 이제 진짜 정신을 차릴라치면 또 다른 이가 와서 달력의 숫자들이 호로록 날아갔다. 이 핑계로 다이어트를 향한 의지는 돌아가는 손님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몰리는 시즌이면 여행자의 마음처럼 내 마음도 땅에 발붙이지 못하고 애매하게 떠다닌다. 온 가족이 비누로만 몸을 씻지만 손님들을 위해 샴푸와 린스를 한 곳에 마련해 둔다. 작년엔 손님방 사이즈에 맞춰 토퍼 매트리스도 구매했다. 관광지에서의 생활은 뭐랄까 가상의 방문자를 늘 염두에 두고 사는 느낌이다.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지만 제주에서 돌 바람 바다와 친구 하며 사니 반가운 이들의 방문은 늘 즐겁고 고단하다. 


다음 주엔 어마 무시한 손님이 온다. 응대해본 적 없는 케이스로, 60대 여성 넷(엄마와 엄마 친구들)으로 구성된 여간 어려운 손님이 아니다. 숙소를 잡아주고 비행기와 렌트를 예약했고, 현재 코스를 짜고 있다.  


"엄마, 어디 가고 싶어?"

"서귀포로 한 번 알아봐."

"..."


"경치 좋고 사람 없는 카페도 가고 싶어."

'그런 데 있음 나 좀 알려줘...'


"일정에 거기 바다도 넣어. 전에 바위 많은 데서 사진 많이 찍었잖아."

"... 엄마, 제주도 어디를 가도 바위 많은 바다예요." 


머리가 터지고 있다. 그러나 이 손님은 뷔뷔뷔아이피라 극진히 모셔야 한다. 알아내야 한다. 

용케 사위가 떠올린 곳 사진을 보냈더니 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거기." 



그녀가 원한 바다


매거진의 이전글 멀리서 보면 한 걸음이면 갈 것 같은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