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이 말이 폭력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십 대에는 곧잘 했었다. 아이를 싫어한다는 말.
어떤 존재 자체에 선을 딱 그어 버리는 말. 못 본 체하려는 말. 나랑은 전혀 무관하다고 시침 떼는 말. 이제는 어린이라는 신비하고도 위대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고,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아직도 조금 부대낄 때가 있다. 내 아이가 나에게서 나와 아홉 살이 다 되어가는 중에도 여전히 아이들의 천진무구함, 예측 불가능한 반응과 버라이어티한 감정들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때론 두렵기까지 하다.
‘어린이’라는 나이에서 멀어진 지 거의 삼십 년이 다 되어간다.
나는 그 사이 으른행 기차에 올라타 관조와 적절한 포기, 현실 순응의 역을 지나 한참을 와 버렸다. 무자비하게 솔직한, 리트머스 종이처럼 감정의 결괏값이 바로바로 나와 버리는 존재들을 보면서 ‘아이들이란…!’을 외치는 그렇고 그런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신을 쏙 빼놓는 아이들, 세상을 얻고 잃은 듯이 웃고 우는 아이들을 보면… 가끔 피곤하다. 마치 나는 어린이였던 적이 없던 것처럼.
그러나 세간살이 속에 파묻혀 먼지를 켜켜이 뒤집어쓴 사진 앨범 들춰보듯 가만가만 내 어린 날을 돌이켜보면 마찬가지로 서투른 실수, 날 것의 감정을 배출하던 기억들이 불쑥불쑥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그런 나를 무수히 참아준 어른들이 배경처럼 나를 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모 집 장식품을 깨고도 이실직고하지 못했던 나, 일기장에 선생님 흉을 쓰던 나. 언젠가 한 번은 오빠, 사촌 언니와 시골 할머니 댁에 가서 방학을 지내던 중 할머니 몰래 떡볶이를 해 먹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냄비를 다 태워 먹었던 적도 있다. 우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할머니한테 혼이 날까 세탁기 속에 태운 냄비를 숨겨놓고 서울의 집으로 돌아왔었다. 귀엽게 봐주기엔 좀 고약한 짓이었다. 푹푹 찌는 여름과 서슬퍼런 겨울. 방학마다 30일이 넘도록 오빠와 나, 사촌 언니까지 꼬맹이들 셋이 울고 웃고 난리를 치다 갔으니 할머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무리 푹 자고 운동하고 건강식을 챙겨 먹어도 쉽사리 풀-충전 되지 않는 나이가 되니 괜시리 할머니께 죄송하다.
냄비 사건 이후로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여러 장면 있다. 우리 집에서 잠시 지내시며 내 출근룩에 하루도 빠짐없이 잔소리를 하던 할머니, 내 손금을 들여다보며 장수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되뇌던 권사님 할머니, 더듬더듬 티비의 자막을 읽던 노인대학 학생 할머니, 결혼식장에 꽃무늬 셔츠를 입고 오셨던 할머니… 그런데 왜인지 부고 소식을 듣자마자 생각난 것은 세탁기 속 감춰 둔 냄비였다.
사고뭉치 어린이를 참고 또 참아준 할머니가 떠났다. 명절 전 외삼촌과 이모, 엄마 세 남매에게 좋은 쌀을 보낸다고 한 포대씩 부치시곤 마치 복잡한 명절을 일부러 피한 것처럼 연휴가 딱 지나자마자 연락이 왔다.
서른아홉 살 나는 ‘아흔이 넘으셨으니 천국에 가신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지.’ 짐짓 괜찮은 척을 하지만, 냄비를 숨겼던 아홉 살 어린이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 할머니 미안해 한마디를 못 한 것이 못내 아쉬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야속하게도 이 섬의 바람은 유난히 거세 항공편은 모두 결항되었고 끝내 할머니 가시는 길을 찾아뵙지 못했다. 할머니 이해하지, 용서해줘 하면서 나이만 먹었지 철은 여전히 덜 든 손녀는 평소처럼 쾌활한 웃음으로 아이와 보드게임을 하고 씻기고 재운다.
세월의 흐름 따라 나날이 후덕해지는 우리 부부는 맞는 검은 정장이 하나도 없어 새로 사야겠다고 이야기를 나눈다. 사이즈는 매년 업그레이드되는데 아예 오버핏으로 사버릴까? 농을 던지며.
하나둘 어른들은 곁을 떠나가고 여전히 어리숙한 나는 옅게 시작한 주름들과 나잇살을 친구 삼아 사는 게 그렇지 뭐, 하고 건조한 웃음을 지어본다.
어린 날의 실수와 잘못은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진 것들까지 무수할 것이며, 그런 나를 참아준 어른들도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런 손길로 자라, 어느새 어른이 된 나는 이제 내 아이와 다른 아이들에게 또 그런 용서와 돌봄을 주어야 함을 안다. 내게 약간의 관용과 다정함이 남아 있다면 그건 분명 내게 머물다 간 좋은 어른의 흔적일 것이다.
이제 할머니를 볼 순 없지만 어린 나를 끌어안으면서, 간지럼을 태우면서, 먹이면서, 혼내면서 내게 흘러온 할머니의 사랑이 마음 어딘가에서 잔잔히 일렁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