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자마자 아주 잠깐의 환기 후 다급히 에어컨을 켜던 아침은 이제 지나갔다. 온 집안 창문을 활짝 열어두면 견딜만해진 아침 공기 속에서 요 며칠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우리 딸은 참 콩나물을 잘 먹어."
아침부터 아이는 볶은 콩나물을 잘도 집어먹는다. 요즘 매운맛을 마스터한 아이는 콩나물도 빨갛게 무쳐줘야 잘 먹는데, 냉장고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건 또 먹지 않아서 들기름 넣고 살짝 볶아줘야 한다. 내가 임금님 한 분 이렇게 뫼시고 산다.
눈에서 하트를 내뿜으며 남편은 말한다.
"겨울 되면 시금치도 잘 먹고."
그치. 아이가 모든 채소를 잘 먹는 건 아닌데 방금 막 무친 콩나물, 시금치는 아주 잘 먹는 편이다.
그런데 시금치라고 다 잘 먹는 건 아니다. 뿌리 쪽이 자줏빛을 띄며 달달한 포항초만 잘 먹는다. 포항초는 시금치보다 더 비싸며, 제철이 더 짧다. 자신의 식사를 관람하는 엄마아빠의 눈길을 의식하며 아이는 본격적으로 제철음식을 말하기 시작한다.
"봄 되면 달래간장이랑 김도 먹어야지. 딸기 사다가 뻥튀기 위에 아이스크림이랑 같이 또 올려먹어야 하고. 아, 딸기는 겨울에 나오나?"
뭐, 거의 제철 먹거리 마스터네. 우리는 웃으며 딸기는 거의 겨울이 제철이고 봄쯤이면 끝물이라 봐야 한다고 답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는 제철 음식 릴레이를 이어간다.
"얼른 가을 돼서 홍시 먹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이의 말에 웃음이 터진다. 아직도 9월이 이틀이나 남았는데!
아이는 늘 조금만 온도가 내려가도 긴팔을 찾아 입고 조금만 따뜻해져도 기어코 반팔을 꺼내 입으며 계절을 앞서가는 조바심 girl이다. 초여름이면 '오늘 또 땀을 얼마나 흘릴까', 초봄이면 '환절기 감기 예약이군'하는 걱정은 엄마인 내몫일 뿐. 아이는 먹는 쪽으로도 조바심이 흘러넘쳐 벌써부터 홍시를 찾고 있다.
아기 때부터 가을이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먹던 게 홍시. 껍질을 벗기고 홍시 안의 실 같은 섬유질들을 살짝 잘라 과일퓌레처럼 숟가락으로 떠 먹이곤 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먹고 싶다고 해서 많이 먹으면 응가하기가 어렵다고 계속 계속 말해준 기억이 어제 같은데, 열 살이 된 아이는 아직도 긴 여름이 끝날 무렵이면 성급하게 홍시를 찾는다. 어서어서 먹고 싶다고.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아주 행복하네. 계절마다 먹을 게 이렇게 많고."
입으로 내뱉은 행복은 제법 선선해진 아침 바람에 희석되어 어디론가 흘러간다. 아직 볕은 여름이라 뜨겁고 또 뜨겁지만, 바람만은 홍시를 떠올리게 하는 날들이다. 주황색 감이 조금씩 우리에게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