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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Apr 22. 2019

엄마의 새 옷과 잘못 걸린 전화

엄마는 종종 전화를 잘못 걸어온다.

핸드폰 통화버튼이 멋대로 눌러진 것을 모르고 공연히 '엄마 밀착 취재 ASMR'  같은 것을 들려주는 것이다. 그럴 땐 그냥 "으이그, 또 그러네" 하고 끊는데 오늘은 엄마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들리기에 궁금하여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한 오 분은 들었나 보다.


사이즈가 있느냐, 5호 밖에 없다. 이거 스몰 사이즈가 있느냐 하는 얘기.

점원과의 가벼운 대화. 쇼핑몰의 안내 방송.

지퍼 여는 (아마도 가방) 소리.

간혹 들리는 엄마의 웃음소리.


잘못 걸린 전화를 끊지 못하고 5분이나 듣고 있다니.. 엄마 웃음소리에 괜히 나도 빙그레 웃어지는 것이, 다 커서 딸을 낳아 키우고 있어도 여전히 나는 엄마가 궁금하고 그리운 막내딸이다. 멀리 섬으로 이사 오고 나니 더 그렇다.


세 밤만 자면 엄마가 온다. (왠지 유아적 날짜 세기)

오늘 전화기로 몰래 사찰해 본 바로는, 아마도 제주공항에 도착한 엄마의 손엔 손녀 옷이 주섬주섬 들려있을 것이다. 나는 능청을 떨며 엄마옷이나 사지 뭐 이런 것을 사 왔냐고 괜한 소리를 하며 봉투를 건네들 것이다. 얼른 엄마의 깔깔거리는 웃음을 전화 말고 눈으로 마주하고 싶은 밤이다.




...라고 썼던 일기가 무색하게 엄마는 두 손 홀가분히 오셨다. 새로 산 옷을 입고.

그날의 감상이 무색하고 부끄러워 오금이 다 저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사랑스러운 눈주름과 깔깔 웃음 여사는 멋진 새 옷을 뽐내며 제주 전역 곳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틈만 나면 사진찍던 소녀 (58년 개띠)


엄마가 여행을 오며 새 옷을 사입은 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었다. 아이가 다 커서 언젠가 오랜만에 딸을 만나러 가게 된다면... 엄마처럼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옷을 차려입고 근사한 모습으로.


결혼하기 전엔 엄마와 쇼핑을 자주 다녔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둘 다 구경하고 옷 입고 하는 걸 좋아하기에 이 옷이 어쩌니 저쩌니 하며 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내가 결혼을 한 후 엄마 혼자 쇼핑할 생각을 하면 어쩐지 좀 쓸쓸한 마음이 들었는데 다행이다. 잘못 걸린 전화가 들려준 엄마의 웃음과 쇼핑을 향한 들뜸(?)의 ASMR은 마음을 내려놓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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