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기 전, 늦어진 겨울의 만남

by 탈고

‘뭐없네! 프로젝트’. 현애(노현애, 뭐없네 프로젝트 기획자)가 술자리에서 해준 짧은 고민에서 시작했다. “음악을 하는 분들이 노래할 수 있는 무대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해요.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좋은 무대를 만들 수 있을까요.” 라는 물음. 그 말에 내가 반문을 붙었다. “전국 여행을 하면서 지역마다 무대를 만들면 어때, 겨울 여행도 할 겸.” 짧고도 어처구니없는 술자리의 그저 그런 반문. 흘러가듯 놓아버린 짧았던 그 대화는 며칠 후 현애의 기획서로 구체화 되어 눈앞에 놓였다. 그날의 대화보다 더 어처구니없게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여행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획자들은 탄탄한 기획안과 여행 당일의 공연을 위해 준비했고, 나는 현장기록과 사진촬영을 위해 보지도, 관심도 없던 기행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상기록을 위해 촬영감독 친구도 수소문했고, 다행히 훌륭한 동료가 한 명 더 생겼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아티스트들은 쉽게 찾기 힘들었지만 여러 이야기를 간직한 세 명의 동료도 함께하기로 했다. 점점 구색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술자리의 실없이 흘러가는 짧은 말 한마딘 생각보다 짧게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몇몇 공연기획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오고 간 이야기들은 그날의 밤만큼이나 짧게 지나갔지만,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여정은 그리 짧게 남지만은 않을 것이다.





부산.

늦어진 겨울의 만남



2월의 첫 단추는 여민 옷깃의 맨 위 자락처럼 단단히 잠겨 있어요. 한 해가 시작 된 지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첫 해에게 보낸 다짐들은 한 쪽 가슴팍에 숨겨두고 선뜻 꺼내 보일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말이에요. 묵인하는 입처럼, 이불에 묶인 몸처럼 단단히 잠겨, 다짐들을 몸 안 깊숙히 숨긴 체 늦어진 겨울 추위를 이겨 내고 있어요.



그래서일까요. 사소한 외출이라도 너그러워진 게으름에게서 벗어난 설렘이에요. 특히 ‘뭐 없네’라는 이름을 가진 여행, 음악, 사진, 글, 영상 그리고 추억과 다짐과 각자의 뜻을 담은 사람들은 소소한 아찔함을 줄 만큼 설렘을 주고 있어요. 한겨울 독한 술 한잔 하며 부르르 몸을 떠는 순간의 흥분은 꽉 잠근 옷의 첫 단추를 느슨하게 풀게 하잖아요. 그 정도의 아찔함과 설렘, ‘뭐 없네’를 외치는 7명의 우리들의 2월 첫 만남.





부산 해운대, 그것도 게스트하우스에서 투숙하고 있는 저로선 쏜 살처럼 날리는 겨울 바다의 바람처럼 여행객들을 스치며 살고 있어요. 대문을 나서는 순간 바다 냄새 가득, 여행객들의 행복한 웃음 가득. 영하의 날씨 덕에 순식간에 빨개진 양쪽 볼이 그들의 행복을 대변하는 듯 맑음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하는 그런 곳에서 사는 셈이지요.



그래서 지하철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케리어나 배낭을 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해요. ‘뭐없네’를 만나기 위해 어김없이 지하철로 향하는 오늘은 누군가가 저에게 말을 걸어 왔어요. 추위 때문인지 부끄러워서인지 모를 그런, 저와 같은 볼을 한 사람이 말이에요. 그분은 자신의 몸집과 비슷한 크기의 케리어를 힘겹게 끌고선 바다가 어디냐며 물어 왔어요. 간간히 콧등을 구기며 훌쩍거리고서 물어보는 그는 바다와 전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지요. 그래서 지금과 정반대로 가면 아마 바다가 보일 거라는 짧은 말과 함께 어디서 오셨냐고 물어보니, 유학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기 전 바다가 보고 싶어서 해운대를 들리 셨다 하네요. 어디서 날아와 또 어디에서 가족을 만날지 모를 그분의 중간 지점이자 쉬어가는 낙원이 부산의 바다리라… 곧 있으면 떠나게 될 나와 ‘뭐 없네’의 동료들은 부산의 바다를 떠나 어느 곳에서 낙원을 찾아 마음의 쉼을 찾고 올지… 짧은 감상에 입꼬리를 들며 그분과 이별했어요. 그리고 다시 지하철로 발길을 옮겼지요.



개인적으로 지하철을 좋아하진 않아요. 도심 속에 자리한 어둠 속 급행열차. 발전이 빠르게 진행된 도시일수록 노선의 수도 많지요. 삭막함을 구겨 담고 먼지 쌓인 도심 속, 지하세계를 달리는 그 열차의 노선 수는 그 도시가 가지고 있는 적막과 고독의 수치리라… 그 수치를 갈아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탄성의 한계는 이미 열차 안, 저 자신을 뚫고 지나가요. 적막은 편안이고, 고독과 외로움은 안전을 보장해주는 마지노선이라고 중얼중얼하곤 하거든요. 익숙해진 탓이겠죠 저도.



네모난 공간에서 각진 휴대폰 화면만을 주시하는 우리의 틈에서 빠져나와 서면 지하철역 2번 출구를 나오니 숨통이 좀 트였어요. 조금은 어둑해진 오후 7시 언저리의 시간, 곳곳에 퍼져있는 겨울내를 힘껏 들이마시고 동료들이 모여 있는 카페에 들어섰어요. 문을 열자마자 픽업 대 앞에서 음료를 기다리는 대한이 형(이대한. 뭐 없네 프로젝트의 기획자), 이제는 마스코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노란색 골무모자를 쓰고 메뉴판을 넌지시 주시하고 있다, 걸어오는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요. “1인 1 음료야”라는 짧은 넋 섞인 말과 함께 “넌?” 라는 눈빛으로 다음 말을 이어 갔지요.





대한이 형은 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 중 한 명이에요. 부산에서 ‘혼자 보는 공연’이라는 공연 기획은 물론이고 다방면의 굵직하고 소소한 문화기획을 하는 사람 중 가장 악동다운 사람이지요. 요나슨 요나손의 소설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의 놈베코를 연상시키는 사람이기도 해요. 악동답지만 순수하고 지혜로운 하지만 인간적이면서 동질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아마 그가 보낸 눈빛은 저의 주머니 사정을 알고 있음에 보내는 걱정과 위안이었을 거에요.



걱정과 위안… 우리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존재의 말이 아닐까요. 이승에 살면서 20대, 그것도 취업 전선이라는 강을 어슬렁거리는 저희에게 이미 죽어서 저승으로 날려간 꿈과 열정, 걱정과 위안이라는 따뜻함… 살아 있지만 죽었을지 모를 영혼 곳곳을 온기로 가득 차게 해주는 볕. 여기가 저승이고 강 저편이 이승의 낙원이리라. ‘뭐 없네’가 건널 강이며, 내가 헤엄쳐 이겨낼 물살들의 포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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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음료를 시키지 않은 회의. 누군가는 이틀 후 믹스테이프를 발매하고, 누군가는 회사생활의 고단함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으며, 또 누군가는 보고 싶던 공연을 본다며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각자 자기 삶의 영역에서 부단한 끈질김을 드러내고들 있지요. 음악 하는 사람들과 문화 기획을 하는 사람들, 글쓰는 사람, 영화를 찍는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우리 저편엔 또 다른 터전이 있어요. 유지를 위한, 끈질김을 위한 어느 경계의 중간쯤 영역. 살아가기 위함이고, 본질의 확장을 위함이며, 이번 여행에서 찾고자 하는 의미들의 현신. 갈라진 땅을 하염없이 걷다 보면 언제 무너져 그 땅의 구렁텅이, 용암이 들끓는 그곳에서 녹아 없어질지 모를 꿈들. 공포와 불안은 신념의 여행자, 꿈의 산보자들에겐 업이지 않을까요. 우리의 여행, 어느 길을 걸을지 아직 짐작도 하기 힘든 여정은 늦어진 겨울 만큼이나 낯설어 질 봄의 설렘을 주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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