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대신워홀

by 제임스


시드니에 있을 때 브런치 카페에서 주방보조(Kitchen Hand)로 일한 적이 있다. 당시 집보다 일을 먼저 구해 낯선 이들이 북적이는 백패커에서 지내며 카페로 다니곤 했다.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항상 하이드 공원(Hyde Park)을 지나 다녔다. 퇴근을 하고 숙소로 가는 길 공원을 가로질러 지나갈 때면 몇몇의 사람들이 잔디에 누워 책을 읽거나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듣거나 일행과 같이 앉아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그 모습들이 한적한 공원을 더 평화롭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한 번은 공원을 지나며 어찌나 졸리던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들며 숙소로 돌아가던 중 그들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잔디에 마음껏 누워있는 그들이 정말 편안해 보였다.


"숙소에 가서 내 침대에 누워 얼른 자야지!"라고 생각하며 피로감을 참으며 걷고 있던 나에게 그들이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집에 벌써 가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날따라 유독 날씨가 좋아서 내심 숙소로 돌아가기 아쉬웠고 공원을 지날 때마다 나도 그들처럼 자유로운 느낌을 내보고 싶어 하면서 다음을 기약하며 바삐 걸어가던 순간이 떠올랐다.


"지금 해봐야겠다"


얼른 숙소에 가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던 맘을 접고서 나도 그들처럼 잔디에 누워 쉬어가기로 했다.

남 눈치 볼 것 없이 잔디에 벌러덩 누워 모자로 햇볕을 가리고 있으니 햇살의 따스함과 적당히 시원하게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조화를 이루며 단잠에 빠져들게 했다. 날이 좋아서 일까 피로감 때문일까 금세 의식을 잃고 단잠에 빠져버렸다.


어느 순간 자동차 소리, 사람들이 걸어가며 대화등 주변의 소리가 들려오며 잠에서 깨어났다.

30분 정도가 흘러있었는데 30분 치고 깊게 잠들었다. 그것도 잔디밭에서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재충전이었다. 일어나는 몸이 가벼웠고 퇴근 후 쌓였던 피로감이 홀가분하게 털린 기분이었다. 몽롱함을 내려두고 또렷해진 정신으로 바꾸고서 가던 길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걸었갔다. 그 날의 하늘은 유난히 눈부시게 느껴졌다.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취업을 하고 숨 막히는 출퇴근과 반복되는 일상을 지내며 문득 걷다 잠시 쉬어 가던 그때의 삶이 가끔씩 그리울 때가 있다.












복학


졸업을 앞두었던 마지막 학기 취업을 하는 동시들과 다르게 나는 호주로 떠났다.

호주로 가게 된 이유는 음... 그 당시의 나로서는 도피에 가까웠다. 그 당시의 나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어 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한 의문이 생기고 그 의문은 의심이 되어 나를 흔들리게 하였다.

내 삶의 권태가 왔다고 해야 할까.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더 이상 부정하기 힘들었다.


길거리에 딱딱하고 칙칙한 건물들이 싫었다.

주변에서 자신의 목소리만 높이는 사람들이 싫었다.

겉으로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싫었다.

앞으로 기대가 되지않는 삶이 싫었다.

똑같고 예상되는 나의 앞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군대를 제대 후 1년 정도 일을 하여 학비를 마련 후 복학을 했다. 남들처럼 학교를 다니고 과제를 하고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또 밤늦게 까지 과제를 하며 겉으로는 즐거운척, 열심히 사는척 사실 기억에 남을 것이 딱히 없는 미적지근한 마지막 학교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학교를 졸업할 생각이 없었다. 나의 전공은 학력보다는 경력을 우선시하기에 아까운 등록금과 시간이 낭비하며 굳이 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년간 일을 하며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 지루했다. 똑같은 일상에 새로운 입김을 불어넣고 싶었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 일만 하며 살아야 하는가? 파릇파릇한 청춘이지만 앞날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때마침 나에게 영향을 주는 친구가 학교에 복학한다고 하면서 나도 관심이 학교로 향했고 나는 복학을 결심했다. 학교에 가면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졸업장은 있어야지.. 등등 친구를 통한 영향은 스스로를 합리시켰다. 친구를 따라 강남에 간 격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는데 문장대로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들뜬마음으로 선택한 복학은 나에게 무기력과 나태함을 안겨주었다. 물론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 재미도 없고 목표도 없었으니까. 행동하기 보다는 바라는 것만 많았었다. 참 아이러니한게 나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누군가의 관리와 지시를 받게 되면 그 틀에서 해방되고 싶지만 그 누군가가 사라지면 주인을 잃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지 못하였다.


그전까지는 나를 소속하고 있는 집단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누군가 항상 주제를 던져주고 인도해주는 수동적인 삶을 지내왔기에 성인이 되고 짧은 사회를 겪으며 수동적이기보다는 능동적인 선택과 자유로움이 주어졌지만 정확하지 않은 목적지와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지며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 그때 나는 복학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나만의 시간을 가졌어야 함을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서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보니 복학을 결정했던 그때의 나는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면서 속으로는 불안했기에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 같다. 나의 삶을 살기에 나는 서툴렀기 때문이다.


1학기는 모아 둔 돈으로 지냈지만 2학기 때부터 생활비가 부족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노동의 피로는 점차 학교에 지각하는 수를 늘려주었다. 당시 일명 CC였던 나는 2학기 개강과 동시에 애인과 헤어지면서 더욱 학교에 가기 싫어지게 되었다. 결국 지각을 밥먹듯이 했고 F학점을 코앞에 두고 종강을 할 수 있었다. 종강이 다가오고 있는데 취업 준비는커녕 자격증 공부도 하지 않았고 취업 생각이 전혀 없었다. 취업해도 1년 전과 같은 곳에나 취업할 텐데 그런 곳에 나를 취업시키고서 학교 취업률을 올리 겠다고? 학교에 대한 반감은 날로 상승듯했다. 담당 교수님은 나를 취업알선하기 위해 몇 군데를 소개해주었지만 면접에 응하지 않았다. 덕분에 평소 존재감 없는 나지만 학기 마지막에는 교수님의 원치 않는 관심을 듬뿍 받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기다 보면 어느새인가 "남들은 지금이 시간에도 노력하고 있을 텐데.. 나는 지금 뭐 하는 거지?" 방향으로 생각으로 쏠리는 횟수가 늘어났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서 매일 밤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하루 종일 쉬어도 알 수 없는 피로감이 따라다녔고 나태함과 무기력이 그늘지기 시작했다. 몸과 머리가 그냥 피로했다. 나 자신을 컴퓨터처럼 잠시 끄고 싶었다. 나는 왜 이럴까? 어쩌다 이렇게 됐지?


앞으로 어떡할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뜩, 2학기 중간쯤이었을까 호주에 있다던 친척 누나한테서 연락이 왔었는데 친척 누나와 나누었던 그때 대화가 떠올랐다.


"호주에 한번 놀러 와!"


오래간만에 친척 누나와 안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다 나의 상황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졸업 후 취업계획이 없는 나에게 친척 누나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추천해 주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라는 비자로 호주에서 거주하며 일할수 있는 비자에 대해 소개해 주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해외는 정말 환상 같은 곳이었다. 24살까지 비행기 타본 적 없는 서울촌놈인 나는 해외에서 살아보기라는 마음속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온화하고 선선한 날씨, 드넓은 대지, 여유로운 사람들, 이색적인 휴양지 등등 그런 것들을 상상하며 해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한없이 부러워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대해 궁금해 이거저것물어보니 친척 누나가 내가 관심 있어하는 걸 느꼈는지 이것저것 알려주며 만약 생각이 있다면 도와줄 수 있다며 나를 살살 꼬드기기 시작했다. 해외로 떠나는 것은 나에게 너무 달콤한 제안이었지만 기대감만큼 두려움도 있었다. 영어를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해외에 한 번도 나가보지 않음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나의 앞에 다가섰다. 여러 가지를 따지고 생각해보면 서 어려울 것 같았다.


이대로 포기하게 되는 건가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었다. 문득 호주를 포기하게 되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지금 떠나지 않으면 두 번의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낯선 환경,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보다 익숙한 매일을 기대감 없이 지내는 현재가 더 두려웠다. 나는 변하고 싶었고 이 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렇게 차츰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정할 수 있었다. 두려움 또한 좋은 경험일 거라며 긍정으로 승화시키며 말이다.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나는 호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부터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하고 호주 워홀 비자 정보를 위해 네이버 블로그 숲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정말 현시대에 사는 나는 편한 세상에 살고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 검색으로 수많은 정보가 나와 있었고 나는 그저 따라 하기만 하였다. 대충 흩어보고 비자 신청을 하고서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을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후에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비자 신청비용은 냈지만 비행기 티켓, 도착해서 몇 달간의 생활비, 소모품, 현재 나의 생활비, 여분의 비상금 등을 계산해보면 빠듯했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기에 알바시간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늦게까지 알바를 하고 집에 가는 버스에서 거의 매일을 졸았지만 하고자 하는 일이 생겨서 인지 버틸 수 있었다. 학교가 종강을 하고 비자 승인 메일을 받았다. 비자 승인메일을 받고 부모님에게 나의 의사를 알렸다.



"엄마 나 호주 가려고요"


엄마의 눈에서 당황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엄마는 졸업 후 당연히 취업할 줄 알았던 아들이 난데없이 호주라니 내가 생각해도 생뚱맞는 상황이다. 부모님에게 나의 심정과 상황을 이야기했고 다행히도 부모님은 그런 나의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으면 좀 후련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부모님에게 미안함 마음이 컸다. 그래서 부모님의 도움을 최대한 받지 않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았다. 학교 종강으로 시간적 여유가 생겨 더 많은 수익을 얻어야 했던 나는 알바를 그만두고 단기간 고수익 알바를 찾아 나섰고 신축건설현장에서 일당직으로 현장직 인력으로 일했다. 12월의 추운 겨울에 돈을 벌기 위해 나를 포함한 많은 인원이 있었고 각 업체마다 팀을 나누어 현장에 투입되었다.



호주로 가기 위해 내가 이렇게까지 일을 하는 모습이 스스로 대견하면서도 신기했다. 무기력하고 게으르던 나를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나는 인원이 제일 많은 해체팀에 들어가 자제들을 날라서 정리하는 일을 했다. 젊은 사람들이 많았고 대부분 20대 후반의 청년들이 많았다. 다들 무슨 사연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12월의 공사현장은 너무 추워서 손발이 아프고 시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자동적으로 열심히 일하게 되었는데


20살 사회초년생부터 취준생, 음악을 하는 형, 사업을 하다 접고 일용직을 시작한 형님, 온몸이 문신으로 주먹 꽤나 쓰셨던 형님, 공사현장의 잔뼈가 굵은 어르신들 등 각자의 다양한 사연 거리를 듣는 게 일하며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열심히 하다 보니 같이 일하는 아저씨, 형님들과 친해지고 이야기를 나누며 다양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열심히 일하며 성취감도 얻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던 그 순간들 덕에 호주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져갔다.



덕분에 계획했던 자금을 얼추 모으고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3주 정도의 여유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친구들과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너도 나도 할 수 있는 영어교재와 인강을 보며 모처럼 휴식시간을 보내니 차분하면서도 들뜨는 마음이 들었다. 평소 소울리스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나지만 내가 진짜 호주에 가는구나 실감이 들면서 마구 설레고 떨렸다. 분명 힘들고 지치는 나날들이 올 것을 각오했지만 아무리 예상을 하고 정보를 얻어도 막상 피부로 느끼지 않으면 헤아릴 수 없듯이 그 순간에 나는 해외 라이프라는 환상에 매료되어 실망감보다는 기대감에 차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될 때 이런 기분이구나 싶다.

그렇게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떠날 날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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