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고통이니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 제페토의 변명

피노키오는 살고 싶어 한 적이 없다. 헨젤과그레텔은 태어나지 않아야 했나

영화 <소울>의 주인공 '22'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도망 다니는 영혼이다.
"지구에 가서 태어난다는 계획은 바보같이 들려. 나는 여기 '탄생 전 세계'가 편하거든. 난 일과가 있어. 이렇게 안갯속에 떠 있잖아. 그리고 나는 매일 스도쿠 퍼즐을 하지. 그런데 왜 태어나야 해?
이 세계(The great before)에선 망가질 걸 걱정하지 마, 괜찮아. 여기서는 아무도 영혼을 망가뜨릴 수 없거든. 그런데 사실 지구에선 생명이 존재하는 이유가 결국 죽어서 영혼을 부숴버리려는 거잖아. 그런데 태어날 이유가 뭐 있어? 여기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누가 신경 쓰겠어? 나는 지금까지 내가 탄생을 원하게 할 만한 어떤 것도 본 적이 없거든. 게다가 현생에서 너의 삶은 슬프고 한심하고 비참한데, 당신은 그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애쓰고 있잖아! 대체 왜 그러는 거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사람들은 누구나 무언가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데. 하지만 막상 당신이 그 소명이 무엇인지 알 방법이 있을까? 만약 당신이 잘못된 답을 고르게 된다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나 어울릴 선택지를 고르게 된다면, 그냥 망한 상태로 꼼짝 못 하게 되겠지! 근데 왜 굳이 태어나야 하냐고?"

한편 전지전능한 존재인 Jerry는 이렇게 말하며 설득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생이라는 기회만 줄 뿐이야.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법을 하나하나 알려줄 수는 없는 거야."

사람들은 종종 인생이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심지어는 자기를 낳았다는 이유로 부모를 원망하거나, 심지어는 동의 없이 출산했다는 이유로 부모를 고소하는 사례도 있다.(영화 가버나움 참조) 반대로 (예비) 부모 입장에서는 무턱대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겪어야 할 고통이 걱정되어서 차라리 낳지 않기로 결심하는 경우도 있다. 그게 아이를 더 사랑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나는 딩크나 비혼주의는 개인 취향이니 간섭하고 싶지는 않지만, 점점 폭넓은 지지를 받는 '반출생주의' 사상에 대해서는 진지하고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이라는 종착역까지 간다는 점에서 인생은 유사하다. 누구도 태어나는 것에 대해 사전에 동의한 적이 없고, 누구도 죽음을 외면한 채 영원히 살 수 없다. 그런데 누구는 그 여정을 행복과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누구는 그 과정을 지독한 고난으로 받아들인다. 그 고난의 출발은 역시 출생이다. "생일 축하합니다"라는 노래를 "왜 태어났니"라는 가사로 패러디하는 것은 생각보다 심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태어난다는 것은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며 책임져야 할 문제이다. 행복하고 싶다면, 어려움조차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아는 태도를 기르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다.


"생즉고", 즉 삶은 그 자체로 고통이라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사실이라면, 출산이라는 것은 매우 끔찍한 범죄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미 태어난 사람들이야 수양과 참선을 통해 고통을 어떻게든 줄이거나 극복하려고 하겠지만, 이 무시무시하고 지독한 게임을 다음 세대에게 이어가도록 한다니. 실제로 석가모니의 여러 어록에 따르면 그는 극단적인 반출생주의자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불교 신자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존경하면서도 반출생주의를 따르거나 실천하려 하지는 않는다. 삶이 고통스러우니 집착에서 벗어나서 행복하게 살자는 생각에 동의하더라도, 고통이 당연한 거니까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반드시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출산 자체가 태어날 아기에게 피해를 주는 거라는 생각은 상식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보인다.




우리가 잘 아는 동화 피노키오를 떠올려보자.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 원작 소설과 1940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를 비교해 보면, 나무 인형이 생명을 얻는 과정에 흥미로운 차이점이 있다. 소설에서, 피노키오가 될 나무 원재료는 인형으로 조각되기 이전부터 마법에 걸린 채로 등장한다. 소설 첫 문장에서부터 황당하게도 어떤 신기한 목재가 생명을 가지고 혼자 말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제페토는 직접 마리오네트를 만들기 위해 마법의 목재를 가져다가 인형을 조각한다.
한편 1940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목각가인 제페토는 먼저 나무 인형으로 피노키오를 만든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푸른 별을 보고 피노키오가 진짜 소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푸른 요정이 밤중에 나타나 제페토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피노키오를 살려낸다. 그녀는 피노키오에게 자신이 용감하고, 진실하며, 이기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그가 진정한 소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요약하자면, 원작 소설은 나무 자체의 마법적인 특성 때문에 피노키오가 살아나는 반면, 디즈니 영화는 푸른 요정이 별에 대한 제페토의 소원에 응답하여 꼭두각시를 살아나게 한다는 것이다. 피노키오는 두 번 태어난다. 먼저 살아있는 인형이 되었다가, 나중에 살아있는 소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첫 번째 출생은 제페토의 소원으로, 두 번째 출생은 피노키오 스스로의 소원과 의지, 정직하고 용감한 행동에 대한 포상으로 주어진다. 반출생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영화판에서 피노키오의 첫 번째 탄생을 기도한 제페토는 사악한 행위를 한 것이다. 인형을 움직이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는 피노키오의 동의를 받은 적도 없다.




철학자 데이비드 베나타는 2006년 책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 존재하게 되는 것의 해악>에서 본격적으로 반출생주의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해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는 그의 논증이 매우 최근(2006년)에서야 체계적으로 발표되고 인정받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유튜브 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조던 피터슨 교수와 베스트셀러 작가 샘 해리스도 베나타를 직접 초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을 만큼 그는 인기 있고 젊은 철학자이다. 그 전의 사상사에서도 반출생주의적 관점은 단편적으로 제시된 사례들이 있지만, 베나타만큼 체계적이고 진지하게 모든 형태의 출산을 비난하는 논증은 확실히 새로워 보인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인정받지는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베나타의 논증은 매우 강력하고 반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서, 로스쿨 입시용 법학적성시험에 출제된 사례도 있다.

"제 주장의 의미 중 하나는 존재하는 것이 항상 해롭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특별히 불행한 삶을 살거나, 특별히 고통스러운 죽음을 겪을 때만 존재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대신, 어떤 특정한 삶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균형에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은 항상 해롭습니다." -데이비드 베나타


그의 주장은 고통과 쾌락의 존재와 부재 사이의 비대칭성(assymetry)을 논거로 삼는다. 베나타는, 몇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는데, 1) 고통의 존재는 나쁘고 2) 쾌락의 존재는 좋으며 3) 고통의 부재는 누가 그것을 즐기는지에 관계없이 좋으며 4) 쾌락의 부재는 누군가가 그것을 박탈당한 게 아니라면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세 가지 가능세계를 비교한다. 쾌락이 고통을 약간 능가하는 A, 고통이 쾌락을 약간 능가하는 B, 그리고 아무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C의 세계가 있다. 전통적인 견해에서는 A가 B보다 낫고 C도 B보다 낫지만 A가 C보다 낫다고 주장할 것이다.(즉, 쾌락이 고통보다 많다면 태어나는 것이 좋다는 것) 그러나, 베나타의 비대칭 주장은 전통적인 관점이 틀렸으며 C가 사실 A와 B 둘 다보다 낫다고 주장한다.(즉, 쾌락이 고통보다 많든 적든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궁극적으로 존재에 내재된 해로움 때문에 더 바람직하다는 베나타의 주장 뒤에 숨겨진 핵심 논리를 보여준다.

David Benatar과 그의 책

베나타에 대한 비판으로는 Erik Magnusson의 2019년 논문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주장을 내가 요약,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복잡한 지식을 요하니 관심이 없다면 넘어가도 좋겠다.

베나타의 핵심 주장은 '비대칭성 논증'과 '삶의 질 논증'이라는 두 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존재가 비존재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하다고 주장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비대칭성 논증이 왜 거부되어야 하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최근 수년간 베나타는 이 논증에 대한 핵심 이의를 고려하고 반박하기 위해 몇 가지 재해석과 보충 설명을 제시했다. 본 논문은 이러한 고려를 염두에 두고 비대칭성 논증을 재검토하고 거부하는 세 단계 절차를 포함한다.
베나타가 최근에 그의 견해를 재해석한 바에 따르면, 비대칭성 논증은 "존재하는 것이 항상 해로운 측면"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만, "누군가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예: 출산)이 항상 부정적이라는 것"을 입증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인정한다. 후자의 주장은 인간의 삶의 상대적 악영향을 보여주는 그의 별도의 "삶의 질" 논증에 의해 지지된다고 주장한다. 베나타에 의하면, 인간 존재의 해로운 면을 적절히 고려하면, 최상의 인간 삶을 살아도 출생은 여전히 충분히 부정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비대칭성 논증은 삶의 질 논증의 참에 의존하지만, 삶의 질 논증의 참이 비대칭성 논증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사실 인간의 존재의 상대적 부정적 측면이 출생이 부정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존재가 비존재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하다는 비대칭성 논증의 역할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결국 베나타의 주장은 결국 "삶의 질 논증"에 의해 중요한 뒷받침을 받는 것으로 판명되며, 이는 앞으로 비평가들의 주요한 비판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Magnusson, Erik (2019). How to reject Benatar's asymmetry argument. Bioethics 33 (6):674-683.


내가 이해한 바로 변형해 본다면 반출생주의자는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가 매우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이 기대된다면, 당신은 아이를 낳을 의무가 있는 걸까? 만일 당신이 귀찮음 혹은 본인의 작은 쾌락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았고 그 아이가 향후 가질 수 있었을 커다란 행복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출산을 포기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행복을 박탈한 것과 동일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행복을 누릴 만한 주체가 존재하지 않은 이상, 이러한 행복의 부재는 박탈과는 다른 것이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고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고통의 부재란 어떤가? 어떤 아이를 낳아서 그가 평생 엄청난 고통을 겪을 것으로 기대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가령 어떤 독재자가 특정 민족의 아이들을 모두 감금하고 고문하는 세상이 있다고 해보자. 그 상황에서 그 민족의 사람이 피임을 통해 출산을 방지했다면 그는 매우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베나타에 따르면, 이는 고문실에서 고통받는 아이를 구출해 낸 것만큼 훌륭한 일이라는 것이다. "쾌락"에 대해서는 박탈과 단순한 부재가 서로 다른 개념이라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과 달리, 고통의 부재는 고통의 치료와 마찬가지로 좋은 일처럼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교통사고가 나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도 중요하지만, 음주운전자를 단속해서 애초에 교통사고를 예방하는 것 역시 매우 훌륭한 일이다. 유사한 논점으로, 매우 논쟁적인 것인데, 출생 전 태아가 심각한 질병과 장애를 가지고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살 것이 예상된다면, 애초에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그를 위해서라도 더 좋은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이러한 관점들은 때로 우생학적인 결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극도로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조금 더 변형해 보면, 수태고지의 일화를 패러디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느 날 천사가 동정인 당신에게 나타나서, 당신이 성행위 없이도 곧 임신할 것이라고 알려주고, 출산할지 말지를 결정하라고 한다고 하자. 1) 당신이 자식을 낳으면 그는 셰익스피어만큼 훌륭한 극작가가 되어서 전 세계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작품들을 볼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출산할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출산을 거부해서 위대한 작품들이 생산되지 않았지만, 그건 '분서갱유'와 같이 이미 존재하는 걸작들을 불태워버린 것과 동일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2)한편 천사가 당신이 출산할 아이는 타노스와 히틀러급 악당이 되어서 전 인류를 말살하고 고문할 거라는 걸 알려줬다면 어떨까? 그를 출생해서 고통의 결과를 발생시키는 것은 비윤리적인 행위로 보인다. 셰익스피어를 낳지 않는다고 해서, 미래의 독자들로부터 행복을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타노스를 출산하는 것은 새로운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처럼 행복과 고통 사이에는 미묘한 비대칭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수긍할 수 있다. 이는 이미 발생한 생명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낙태 논란과는 다른 문제가 된다. 이와 유사한 버전으로, "아기 히틀러를 죽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는데, NYT의 한 조사에서는, 42%가 Yes, 30%는 No라고 답했다고 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미 태어난 아기 히틀러를 죽이는 것은 명백한 살인이지만, 히틀러가 탄생하기 전에(임신 중이든, 수정 전이든) 막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내가 제시한 사고실험은 베나타의 원래 버전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고, 이를 자세히 분석하려면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이 말장난 같이 보이는 논리를 반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제시되어 왔는데, 가령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므로 결정론은 그 자체로 모순이라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고, 혹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에게 '미래에 기대되는 고통'이란 개념은 논리적, 범주적 오류라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모두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나는 그냥 인간은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는 과감한 아이디어를 믿는 걸 좋아한다. 인간은 태어난 것 자체가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고 해도 출생하는 것 자체를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문당할 상황에서 아이를 출산하더라도 그 아이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물론 당신이 그 태어난 자식이라면 고문을 견디는 건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고문하는 사람의 잘못이지 당신 부모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초월적인 가능성을 가지는 실존적인 존재다. 당신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건 당신 잘못일 수도 있다. (고문을 정당화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반출생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논변 전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단, 내가 아래 논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부모들은 두 아이를 의도적으로 유기한다. 아동판에서는 계모라는 식으로 각색되기도 했지만 원본에는 그러한 설정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부모가 아이들을 학대하고 방치한다. 많은 사람들은 아동 학대를 보고, '그럴 거면 낳지를 말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흉악한 아동학대범이라고 해도, 비난의 화살은 학대 행위 자체를 향해야지 출산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영화 <브로커>에는 소위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고 가는 사례를 다루는데, 그런 행위가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일 수 있어도 출산 자체가 부도덕해지는 것은 아니다. 과연 출산에는 윤리적인 의무가 따르는가? 나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부모의 의무를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본다. 아이를 학대하지 않고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줘야 할 의무는 부모만의 것이 아니며 공적인 것이다. 따라서 출산한 후에 곧바로 보육원에 맡기고 평생 연락하지 않는 경우라도, 출산 후의 의무를 불이행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생아를 안전하게 국가기관에 전달해야 할 의무는 있겠지만, 그건 출산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라고 본다. 길을 가던 행인이라도 굶어 죽기 직전의 신생아를 발견한다면, 그는 국가기관에 신고하는 등의 행위를 해야 한다. 개인에게 그 이상의 의무를 요구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부모에게도 그 이상의 의무는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도대체 부모의 의무는 어디까지인가? 영어 유치원? 대학교 등록금? 중학교 교복? 최소한의 의식주? 누구도 보편적인 기준을 정립하기는 어렵다. 반면 국가와 사회는 객관적인 의무를 검토하고 복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출생한 이후 보육자로서 제공하는 각종 헌신은 자기의 선택으로 봐야 한다. 부모는 자식 때문에 자기의 인생이 망했다고 탓할 필요가 없다. 그는 국가에 보육을 맡길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스스로 보육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는 성행위와 출생 사건으로부터 당연히 도출되는 의무가 아니다. 물론 아이를 보육하고 함께 거주하면서 얻는 것도 적지 않다.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상호작용하며 얻는 기쁨은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부모와 자식의 공동생활과 가족관계는 출산의 의무와 효도의 미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교환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입양 가족들처럼 출산 없이도 가족은 충분히 형성될 수 있으며, 부모는 양육과 가정환경을 제공하고 아이는 즐거움과 귀여움을 제공한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다소 과격하게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나는 출산한 부모에게 지나친 의무를 부과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청년들은 그런 헌신과 의무를 부담하지 않고 싶어서 애초에 낳지 않는 방식으로 손쉽게 피해 갈 수 있다. 아이를 출산했다는 이유로 골프학원과 영어유치원을 꼭 보내줘야만 하는 건가? 이런 의식은 자본주의의 성숙과 물질만능주의에 따라 심화되는 것인데, 역설적이게도 한국 청년들은 물질주의를 수용하고 출산을 거부함으로써 자본가들을 무척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결국 이민 등으로 답을 찾으리라 예상되지만, 어쨌든 출산한 부모에게 강한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직관에 호소할 뿐 논리적, 윤리적으로 충분히 정당화되지 않은 관념이라고 본다. 어떤 측면에서는 국가의 공적 의무를 은폐하려는 의도에서 개인과 가족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베나타의 논증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 주장이 널리 인용될 수 있었던 배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의 공허함과 우울증, 물질환원주의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 널리 확산된 반출생주의적 정서는 베나타와 같은 논증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그는 논리적으로 쾌락의 유무가 존재 가치와 무관하다고 말했지만, 그 이면에는 삶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이 깔려있다. 나는 다수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회는 행복의 차원에서 결코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기력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규범과 질서를 지키라는 고리타분한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차라리 분노하고 에너지를 발산하고 부모를 고소해도 좋다. 그저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것은 인간의 실존과 예술적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에 불과하다.

<부럽지가 않아>라는 노래로 유명한 장기하는 산문집에서, 출산을 원치 않는 이유를 아래와 같이 솔직하게 표현한 바가 있다. 공감되는 바도 많고, 무엇을 바꿔야 할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아직까지는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일단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한 생명을 책임지는 일을 오랫동안 제대로 잘 해낼 자신이 없다. 사실 나는 같은 이유로 반려동물도 들이지 않는다.
식물도 키우지 않는다. 우리 집에 상주하는 존재들 중 생명을 가진 것은 나뿐이다.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을 제대로 건사하는 일에도 휘청휘청하는 사람이다. 숨 쉬는 누군가를 내 품에 맡는 순간 민폐를 끼치지 않을 도리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미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친구들은 보통 이렇게 말한다. "나는 뭐 자격이 있어서 낳았냐? 낳고 나면 어찌어찌 돼." 물론 그것은 이미 알고 있다. 어찌어찌 낳아 어찌어찌 키우고 있는 이들이라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아이를 키우는 일이 아니더라도, 삶이라는 것은 대체로 어찌어찌 되어갈 뿐이다.
하지만 뭐랄까, 아이가 없는 지금은 그 어찌어찌 흘러가는 물결 속에서 어푸어푸 헤엄이라도 쳐볼 수 있는 반면, 아이를 낳게 되면 집채만 한 파도에 가만히 몸을 내맡겨 휩쓸려가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을 것만 같다. 한마디로, 나는 아버지로서의 의무 때문에 나의 자유를 양보할 생각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부모라는 타이틀을 모두 거머쥐려다 주변 사람들에게 (특히 자신의 자녀에게) 큰 상처를 주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 대열에 동참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부모는 자녀에게 헌신해야 한다. 헌신할 생각이 없다면 낳지 않는 것이 낫다.
그리고 나는 아직 헌신할 생각이 없다. 헌신하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은 가지고 있다. 내가 못하는 것이니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지금의 내 삶은 헌신과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장기하 산문집, <상관없는거 아닌가> 중.



우리는 반출생주의와 저출생 현상이 암시하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누군가 '기승전 사랑'이라고 말했다. 비틀즈의 <All you need is love>라는 노래처럼, 사랑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사회는 그렇지 않다. '기승전 물질'이다. <All you need is Money, Material>이다. 반출생주의의 논증 과정 자체는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만, 결국 쾌락과 고통을 산출하는 과정에서는 물질주의, 배금주의와 정서적으로 지독하게 연결되어 있다. 실존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삶은 그냥 일종의 게임처럼 즐기면 된다. 지독하게 가난해서 자식이 불행하다고? 그 불행은 부모 탓이 아니라 스스로의 탓이다. 혹은 국가와 사회의 탓이다. 고통이 많은 삶이라서 싫다면 자살이나 안락사를 택하면 된다. 물론 아동 학대는 심각한 윤리적 잘못이다. 하지만 학대가 잘못이지 출산이 잘못은 아니다. 일단 삶이 시작했다면 자기가 의미를 부여하고 나름대로 잘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뤼튼 AI로 제작


피노키오 얘기로 돌아와 보자. 동화는 피노키오가 사람으로 변하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데, 과연 사람이 되고 나서 그는 행복하게 살았을까? 아이들에게는 비밀이지만, 우린 알고 있다. 삶은 고통이다. 피노키오는 어쩌면 공부도 못하고 취업도 못해서 엄청난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제페토에게 투덜댈지도 모른다. 나는 인형으로 편하게 존재할 수도 있었는데, 제페토 할아버지가 이상한 소원을 빌어서 내가 사람으로 변해버린 거라고. 제페토는 말할 것이다. "네가 소년이 되고 싶다며? 사람으로 만들어달라고 요정에게 빌었잖아?"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일단 태어난 뒤에 (자살하지 않고)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그냥 태어나지 않는 걸 선택하는 건 다른 문제다. 피노키오는 말할 것이다.

당신이 내 허락도 없이 움직이는 인형으로 만들어버렸잖아. 그 상태에서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받는 차별과 멸시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일단 태어난 이상 조금이라도 덜 불행하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남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뿐이야.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고통을 느낄 필요도 없고,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을 느낄 필요도 없는 거잖아? 왜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생명을 가지도록 만든 거야? '삶은 즉 고통이다'라는 부처님 말도 못 들어봤어?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다'라고 했다는데, 할아버지가 미리 경험을 했으면 그 대를 끊었어야지 왜 나에게 이런 쓰레기 시계추를 강요하는 거야. 애 키우면서 얻는 기쁨 때문에, 무자녀로 사는 게 눈치 보여서, 노후 대비 때문에 낳은 거라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내 아이가 나에게 이렇게 질문한다면 가슴이 참 아플 것 같다. 아마도 제페토는 이렇게 답하지 않을까?

네가 네 인생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더 살고 싶지 않다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다. 내 인생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건 마찬가지거든. 하지만 그래도 내 삶에는 의미가 있다. 아름다운 나무를 찾아서 아름다운 인형을 조각했지. 그 아이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내 능력껏 좋은 걸 해주면서 길러냈지. 그게 내가 찾은 내 인생의 의미였어. 미안해할 필요 없다. 즐거울 때도 있었단다. 네 삶은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렴. 내가 너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네가 내 뜻대로 살 필요는 없어. 넌 이제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잖니. 우리 부모님도 나에게 별다르게 해 준 건 없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잔소리는 했지만 그것도 그냥 남들이 하는 말을 따라한 것에 불과했지. 원래 인생이 그런 거야.

한편 피노키오 소설 원작에서의 관점은 좀 더 흥미롭다. 첫 문장부터 그냥 말하는 나무가 있다. 삶이라는 건 원래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것이다.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있을까? 물론 부모의 임신 행위가 있었으므로 태어난 것이지만, 그 부모 역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다. 과거로 무한히 소급해서 올라가 보면 단군할아버지가 있고, 아담과 이브가 있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티라노사우르스, 삼엽충과 아마도 코아세르베이트 같은 게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누구를 탓할 필요 없이 자기 삶을 잘 살면 된다. 다음 글에서는 반출생주의와 삶의 의미에 대한 내 생각을 좀 더 정리해보려고 한다. 피임과 성행위, 환경주의, 복지제도 등 고려해 봐야 할 요소가 참 많은 것 같다. 출산한 부모에게 윤리적 의무가 없다면, 이혼한 상대방에게 양육비를 청구하는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 엄밀히 말하면 그건 자식에게 주는 돈이 아니라 상대에게 주는 돈이며, 부모라서 당연히 줘야 할 게 아니라 부부로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민사적으로 줘야 하는 돈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고민은 다음 글에 이어가 보도록 하자.


충분히 다듬어지지는 않은 생각들이지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밝혀두자면, 나 역시 한 아이를 헌신적으로 키우는 사람이고, 아동의 권리가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아동학대에 대해 심각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다만 가족과 출산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충분히 검토되지 않고 관습에만 따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 여러 가지 논변들을 떠올려보고 스스로 비판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끝으로 반출생주의의 강렬한 한 마디를 담고 있는 노래 <Bohemian Rhapsody>를 소개하려고 한다. 프레디 머큐리의 보컬을 감상해 보자. (다음 글에 계속)


https://www.youtube.com/watch?v=fJ9rUzIMcZQ


Is this the real life? Is this just fantasy?
이건 현실일까? 아니면 그냥 환상일까?
Caught in a landslide, no escape from reality
산사태에 파묻힌 듯,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Open your eyes, look up to the skies and see
눈을 떠 봐, 고개 들어 하늘을 봐
I'm just a poor boy, I need no sympathy
난 불쌍한 아이일 뿐, 동정은 필요 없어


Didn't mean to make you cry
울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If I'm not back again this time tomorrow
만약 내일 이 시간 즈음에 제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Carry on, carry on
살아가세요, 살아가세요
As if nothing really matters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Mama, oooh (Anyway the wind blows)
엄마, 우우우 (운명이 어디로 이끌든)
I don't wanna die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가끔씩은 차라리 제가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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