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키오는 살고 싶어 한 적이 없다. 헨젤과그레텔은 태어나지 않아야 했나
영화 <소울>의 주인공 '22'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도망 다니는 영혼이다.
"지구에 가서 태어난다는 계획은 바보같이 들려. 나는 여기 '탄생 전 세계'가 편하거든. 난 일과가 있어. 이렇게 안갯속에 떠 있잖아. 그리고 나는 매일 스도쿠 퍼즐을 하지. 그런데 왜 태어나야 해?
이 세계(The great before)에선 망가질 걸 걱정하지 마, 괜찮아. 여기서는 아무도 영혼을 망가뜨릴 수 없거든. 그런데 사실 지구에선 생명이 존재하는 이유가 결국 죽어서 영혼을 부숴버리려는 거잖아. 그런데 태어날 이유가 뭐 있어? 여기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누가 신경 쓰겠어? 나는 지금까지 내가 탄생을 원하게 할 만한 어떤 것도 본 적이 없거든. 게다가 현생에서 너의 삶은 슬프고 한심하고 비참한데, 당신은 그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애쓰고 있잖아! 대체 왜 그러는 거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사람들은 누구나 무언가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데. 하지만 막상 당신이 그 소명이 무엇인지 알 방법이 있을까? 만약 당신이 잘못된 답을 고르게 된다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나 어울릴 선택지를 고르게 된다면, 그냥 망한 상태로 꼼짝 못 하게 되겠지! 근데 왜 굳이 태어나야 하냐고?"
한편 전지전능한 존재인 Jerry는 이렇게 말하며 설득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생이라는 기회만 줄 뿐이야.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법을 하나하나 알려줄 수는 없는 거야."
"제 주장의 의미 중 하나는 존재하는 것이 항상 해롭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특별히 불행한 삶을 살거나, 특별히 고통스러운 죽음을 겪을 때만 존재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대신, 어떤 특정한 삶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균형에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은 항상 해롭습니다." -데이비드 베나타
베나타의 핵심 주장은 '비대칭성 논증'과 '삶의 질 논증'이라는 두 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존재가 비존재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하다고 주장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비대칭성 논증이 왜 거부되어야 하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최근 수년간 베나타는 이 논증에 대한 핵심 이의를 고려하고 반박하기 위해 몇 가지 재해석과 보충 설명을 제시했다. 본 논문은 이러한 고려를 염두에 두고 비대칭성 논증을 재검토하고 거부하는 세 단계 절차를 포함한다.
베나타가 최근에 그의 견해를 재해석한 바에 따르면, 비대칭성 논증은 "존재하는 것이 항상 해로운 측면"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만, "누군가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예: 출산)이 항상 부정적이라는 것"을 입증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인정한다. 후자의 주장은 인간의 삶의 상대적 악영향을 보여주는 그의 별도의 "삶의 질" 논증에 의해 지지된다고 주장한다. 베나타에 의하면, 인간 존재의 해로운 면을 적절히 고려하면, 최상의 인간 삶을 살아도 출생은 여전히 충분히 부정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비대칭성 논증은 삶의 질 논증의 참에 의존하지만, 삶의 질 논증의 참이 비대칭성 논증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사실 인간의 존재의 상대적 부정적 측면이 출생이 부정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존재가 비존재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하다는 비대칭성 논증의 역할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결국 베나타의 주장은 결국 "삶의 질 논증"에 의해 중요한 뒷받침을 받는 것으로 판명되며, 이는 앞으로 비평가들의 주요한 비판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Magnusson, Erik (2019). How to reject Benatar's asymmetry argument. Bioethics 33 (6):674-683.
나는 아직까지는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일단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한 생명을 책임지는 일을 오랫동안 제대로 잘 해낼 자신이 없다. 사실 나는 같은 이유로 반려동물도 들이지 않는다.
식물도 키우지 않는다. 우리 집에 상주하는 존재들 중 생명을 가진 것은 나뿐이다.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을 제대로 건사하는 일에도 휘청휘청하는 사람이다. 숨 쉬는 누군가를 내 품에 맡는 순간 민폐를 끼치지 않을 도리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미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친구들은 보통 이렇게 말한다. "나는 뭐 자격이 있어서 낳았냐? 낳고 나면 어찌어찌 돼." 물론 그것은 이미 알고 있다. 어찌어찌 낳아 어찌어찌 키우고 있는 이들이라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아이를 키우는 일이 아니더라도, 삶이라는 것은 대체로 어찌어찌 되어갈 뿐이다.
하지만 뭐랄까, 아이가 없는 지금은 그 어찌어찌 흘러가는 물결 속에서 어푸어푸 헤엄이라도 쳐볼 수 있는 반면, 아이를 낳게 되면 집채만 한 파도에 가만히 몸을 내맡겨 휩쓸려가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을 것만 같다. 한마디로, 나는 아버지로서의 의무 때문에 나의 자유를 양보할 생각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부모라는 타이틀을 모두 거머쥐려다 주변 사람들에게 (특히 자신의 자녀에게) 큰 상처를 주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 대열에 동참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부모는 자녀에게 헌신해야 한다. 헌신할 생각이 없다면 낳지 않는 것이 낫다.
그리고 나는 아직 헌신할 생각이 없다. 헌신하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은 가지고 있다. 내가 못하는 것이니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지금의 내 삶은 헌신과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장기하 산문집, <상관없는거 아닌가> 중.
당신이 내 허락도 없이 움직이는 인형으로 만들어버렸잖아. 그 상태에서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받는 차별과 멸시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일단 태어난 이상 조금이라도 덜 불행하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남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뿐이야.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고통을 느낄 필요도 없고,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을 느낄 필요도 없는 거잖아? 왜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생명을 가지도록 만든 거야? '삶은 즉 고통이다'라는 부처님 말도 못 들어봤어?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다'라고 했다는데, 할아버지가 미리 경험을 했으면 그 대를 끊었어야지 왜 나에게 이런 쓰레기 시계추를 강요하는 거야. 애 키우면서 얻는 기쁨 때문에, 무자녀로 사는 게 눈치 보여서, 노후 대비 때문에 낳은 거라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네가 네 인생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더 살고 싶지 않다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다. 내 인생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건 마찬가지거든. 하지만 그래도 내 삶에는 의미가 있다. 아름다운 나무를 찾아서 아름다운 인형을 조각했지. 그 아이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내 능력껏 좋은 걸 해주면서 길러냈지. 그게 내가 찾은 내 인생의 의미였어. 미안해할 필요 없다. 즐거울 때도 있었단다. 네 삶은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렴. 내가 너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네가 내 뜻대로 살 필요는 없어. 넌 이제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잖니. 우리 부모님도 나에게 별다르게 해 준 건 없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잔소리는 했지만 그것도 그냥 남들이 하는 말을 따라한 것에 불과했지. 원래 인생이 그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