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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요절한 천재 시인 기형도

얘야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한다

이 글과 함께 감상하면 좋을 미술작품들

"Man with a Pipe" by Paul Cézanne (1892)

설명: 세잔의 피사체의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은 기형도의 시에서 자주 표현되는 관조적인 고독을 반영합니다.











"Melancholy and Mystery of a Street" by Giorgio de Chirico (1914)


해설: 그림자가 드리워진 으스스한 거리의 풍경은 기형도 시의 분위기와 비슷한 수수께끼 같은 깊이와 덧없는 기억을 포착합니다.









"Gray Weather, Grande Jatte" by Georges Seurat (1888)

설명: 그랑자트섬 강변의 회색빛 흐린 날을 묘사한 쇠라의 작품은 기형도의 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차분하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View of Toledo" by El Greco (c. 1596-1600)


설명: 엘 그레코가 그린 극적이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풍경은 정서적 혼란과 숭고함을 전달하며, 기형도의 내면과 외면 세계에 대한 연상적인 묘사와 일치합니다.











기형도의 아름다운 구절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육체를 이용했던 과거의 행복과 이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때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경험을 가리킨다. 곧 무너질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것은 덧없음과 불완전함에 대한 애틋한 애착을 보여줍니다. 한때 걸었던 길에 대한 희미해지는 기억과 하늘에 선명한 흔적이라는 시각적 은유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기억하고 놓아주는 인간의 보편적인 상태를 연상시킵니다. 

 한때 꽃이 만발했던 정원을 걷는 한 남자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계절이 바뀌면서 꽃은 시들고 정원은 황폐해집니다. 물리적인 아름다움은 사라졌지만, 그는 전성기의 정원이 아닌 그 불완전함과 쇠락의 느낌에 애착을 갖게 됩니다. 흐트러진 정원의 상태에는 모든 것이 덧없음을 반영하는 우울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선명하고 동그란 자국은 심오한 수업이 끝난 후 칠판에 남은 분필 자국처럼 아름답지만 지금은 사라진 것 또는 그의 삶에서 변화하는 요소들이 남긴 흔적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흔적은 시인의 기억과 의식 속에 아득한 과거의 기억처럼 선명하고 뚜렷하게 남아 있지만 손댈 수 없는 것들입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시인은 새 생명과 소생으로 대표되는 계절인 봄이 살아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개념을 제시한다. 시인의 기억 속 빙원에 피어오르는 뜨거운 안개의 이미지는 시간과 자연은 인간의 상실과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 흐름을 이어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시인이 암시하는 작은 죽음(꿈, 순간, 인생의 한 단계 등)은 더 큰 슬픔을 인정하고 처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개나리 개나리"라는 구절은 개나리의 생동감과 개나리가 존재하는 환경의 황량함을 병치하여 황량함 속에서도 희망을 상징합니다. 

 얼음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빙산과 마주칠 때마다 선장의 개인적인 역사가 새겨져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시간이 흐르면서 이 얼음 조각들은 필연적으로 안개의 열기를 받아 조각이 흐려지지만, 이를 가두거나 멈출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죽음'은 죽음에 대한 실존적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작은 삶의 종말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개나리꽃은 삭막해 보이는 거리에서 탄력적인 생명의 맥박을 보여줍니다. 개나리꽃이 잘려나간 모습은 마치 유령이 산 자의 곁을 맴도는 모습을 연상시키며, 끝이 또 다른 시작의 전조인 삶과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을 상징합니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짧지만 심오한 이 구절에서 시인은 한숨의 무책임성, 즉 헛된 노력이나 공허한 후회의 표현을 언급하며 그를 찾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환멸에 찬 희망, 그가 밟는 길에서 삶이 어떻게든 낭비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시인이 내성적인 어둠에 잠겨 다른 사람들이 원치 않는 자신의 본질을 찾는 것에 대해 혼자서 중얼거리는 고독한 여행의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명성에 환멸을 느낀 예술가를 떠올려 보세요. 그들은 도시를 떠나 광야에서 익명성을 추구합니다. 고요한 숲 속에 발자국과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남기며 추종자들이 따라오려 하자, 예술가는 나무들에게 "나를 찾지 말라"고 속삭입니다. 추종자들의 후회 섞인 외침은 고독을 추구하는 작가를 존중하지 않는 무모한 행동으로 비춰집니다. 그와 함께 길을 헤매는 '희망'은 마치 궤도를 벗어난 혜성처럼 밤을 비추지만 천체의 궤도를 벗어난 채 길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방황하는 행위 자체가 비록 잘못된 길이라 할지라도 삶의 불확실성과 복잡성을 헤쳐나가는 은유가 됩니다.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형량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시의 이 부분에서는 태양 광선이 지상에 부딪혀 죽지 못하는 지친 존재로 의인화되어, 마치 폐기처분장으로 향하는 듯한 섬뜩하고 본능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가장 불안한 색'이 하루의 잔해가 쓰레기로 소각되는 은유적 소각장을 향해 서쪽으로 이동한다는 언급은 강력한 절망감과 후회를 용서하지 않는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을 떠올리게 합니다. 채찍 같은 힘으로 살아있는 상징물을 몰아내는 바람은 밤이 되면 의미와 희망이 사라지는 정화를 암시합니다. 

 해질녘의 번화한 도시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지는 해와 함께 도시의 노동자들은 에너지를 소진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현대판 영혼의 '소각장'인 지하철로 내려가는 이들의 활력은 퇴근길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폐지처럼 꺼져가고, 이제는 삶의 일부분으로만 기억될 뿐입니다. 이 은유에서 시간은 후회를 품고 있는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는 냉혹한 심판자입니다. 바람이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을 걷어내어 앞으로 다가올 추운 휴면기를 준비하듯, 인생도 하루의 열망과 행동을 쓸어내어 밤의 차가운 성찰로 안내합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이 구절에서 시인은 지나간 사랑과 관련된 여러 가지 요소들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짧은 밤, 방황하는 겨울 안개, 순진한 촛불과의 작별을 통해 지나간 사랑에 대한 종결을 암시합니다. 망설임 대신 두려움과 눈물이 새겨지기를 기다리는 의인화된 백서는 더 이상 시인의 것이 아닌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개념을 더욱 잘 보여줍니다. "잘 있거라"(작별)의 멜로디 반복은 이러한 애착으로부터의 가슴 아픈 해방을 강조합니다. 

 서재에 있는 늙은 극작가가 너덜너덜해진 대본, 부서진 소품, 색이 바랜 연극 광고판 등 과거 작품의 유물에 둘러싸여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각각의 물건들을 인정하고, 자신의 인생에서 연극에 기여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도 그것들을 놓아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각 물건은 길들여지지 않은 열정, 소진되지 않은 창의력, 시대를 초월한 야망 등 연극을 위해 헌신한 마음의 한 측면을 상징합니다. 이제 극작가는 각자에게 작별 인사를 속삭이며 방을 비울 준비를 하고, 미래의 창작물이 아직 가보지 않은 다른 길에 놓여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유물들과의 이별은 극적이지는 않지만 인생의 여름에 대한 집착을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풀어주는 부드러운 가을 낙엽과 비슷합니다. 



 잎 진 빈 가지에 이제는 무엇이 매달려 있나. 밤이면 유령처럼 벌레 소리여. 네가 내 슬픔을 대신 울어줄까. 내 음성을 만들어줄까. 잠들지 못해 여윈 이 가슴엔 밤새 네 울음 소리에 할퀴운 자국. 홀로 된 아픔을 아는가. 우수수 떨어지는 노을에도 소스라쳐 멍든 가슴에서 주르르르 네 소리. 

 시인은 낙엽이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를 강조하며, 이제 무엇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지를 수사적으로 묻고 있다. 밤을 괴롭히는 벌레 소리는 시인의 무언의 슬픔을 대신해 자연이 인간의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 시의 이미지는 밤의 이불 밑에서 들리는 쓸쓸한 곤충 소리로 인해 더욱 악화되는 화자의 고통을 그려내며, 고통스러운 마음에서 직접 들려오는 듯 황혼에 울려 퍼지는 고립의 경험에 대한 친숙함을 암시합니다. 

 가을이 지난 숲의 고요함 속에 고독한 개인이 있고, 주변의 앙상한 나무들이 개인의 내적 혼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밤의 곤충 오케스트라는 이 고독한 인물의 조용한 고통을 표현하는 유일한 표현이 되고, 곤충의 자연스러운 리듬은 그의 숨겨진 비애의 주파수와 공명합니다. 곤충들의 울음소리가 남긴 상처는 마치 곤충들이 조용한 밤공기에 사람의 소리 없는 슬픔을 새겨 넣은 것처럼 깊게 느껴집니다. 저물어가는 저녁의 불빛은 사람의 멍든 마음속에서 희미해지는 환호와 일치하고, 끈질긴 울음소리는 피할 수 없는 변화에 직면한 끈기와 쓸쓸함을 상징하는 인간과 자연의 교류는 공유된 고독의 교향곡이 됩니다.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이 구절은 단 한 번의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시간의 무자비함과 그 앞에 놓인 모든 것을 몰아내는 바람으로 상징되는 변화의 가차없는 속성을 전한다. 인물과 서사를 잃고 빈 책으로 변해가는 도시는 상실과 공허를 상징합니다. 시인은 하루라는 무형의 전투에서 우리가 패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며 삶의 연약함과 무상함을 강조합니다. 해질녘에 연기를 내뿜는 소각로의 이미지는 순환의 끝을 상징하는 강력한 은유로, 인생의 행렬에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장기 공연 중인 연극의 마지막 공연이 끝난 후의 대극장을 생각해 보세요. 배우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면 의상과 소품이 모두 정리되어 무대는 텅 비게 됩니다. 대사와 음악이 울려 퍼지던 공간은 고요한 공허함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생동감 넘치는 본질을 잃어가는 도시처럼, 극장은 한때 이야기로 가득했던 공간을 공허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시간은 엄격한 감독처럼 각본에서 후회하는 장면을 잘라내고, 어스름이 깔리면 인근 공장의 연기가 폐막 커튼처럼 도시를 뒤덮으며 모든 사람이 결국 인생이라는 극장에서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함을 알립니다. 



 저녁 노을이 지면 신들의 상점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성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사원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성 

 저녁이 되면 신들의 상점 불빛이 빛나기 시작하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와 함께 성벽으로 둘러싸인 안전한 도시로 피신하는 신성한 풍경을 시로 그려냈습니다. 이 도시는 돌이 아닌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독특한 도시로, 신전을 통과하는 구름처럼 미묘하거나 고요한 공기처럼 고요한 사람들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도시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존재만이 들어갈 수 있는 불경스러운 존재의 손길이 닿지 않는 성역을 상징합니다. 이는 세상의 혼돈으로부터 보호받는 마음 상태 또는 영성, 즉 손길이 닿지 않은 신성한 내면에 대한 우화입니다. 

 안개에 가려져 있고 가장 험난한 길로만 갈 수 있는 산속의 한적한 수도원을 상상해 보세요. 해질녘이 다가오면 마지막 햇살이 길을 따라 등불에 불을 붙이고 수도사들은 들판에서 돌아옵니다. 영성의 요새인 수도원은 세속의 짐을 기꺼이 문 앞에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으며,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산의 공기처럼 무형의 고요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내재적 질서가 생태계를 구분하는 자연에서처럼, 시인의 이미지는 구획된 인간 경험의 영역, 즉 외부 세계의 소란이 침범할 수 없는 정신의 신성한 공간을 암시한다.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그는 건강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본 적이 있었을까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이 발췌문은 생명에 대한 증오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선언으로 시작하여, 곧바로 한 남자의 입장과 병치되며 그의 행동과 신체가 강렬한 시각적 디테일로 묘사된다. 크고 탐욕스러운 손으로 작은 컵을 움켜쥐고 있는 이 남자의 침묵과 강렬한 집중은 부조리한 느낌으로 묘사됩니다. 그의 침묵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그의 집중된 시선이 그의 인생 경험을 이용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이는 아마도 성찰이나 기억에 대한 은유일 수 있으며, 강렬하게 면밀히 조사하지만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섬세한 도자기 가게에서 건장한 거인이 주변 환경의 취약성 때문에 움직임 하나하나가 과장되고 어색한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가 고상한 찻잔을 들고 있을 때, 그의 크기와 도자기의 섬세함 사이에는 우스꽝스러운 불일치가 있는데, 이는 배경의 온화함에 비해 너무 크고 너무 치열한 삶을 암시합니다. 그의 침묵은 과거의 경험에서 의미를 찾는 시선에 집중된, 출구 없이 내부에서 격렬하게 일어나는 폭풍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거인은 내면의 폭과 깊이가 사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작고 한정된 공간과 종종 상충되는 삶의 아이러니에 맞서는 개인의 투쟁을 상징합니다.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 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 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이 발췌문에서 화자는 자매의 모습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그것이 기억에 미치는 영향을 환기시킨다. '은빛 비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견고해지는 순간 또는 기억의 축적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봄의 도래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며, 화자의 마음속에서 그러한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매의 삶이 온전히 '꽃을 피우지 못하고' 조용히 꺾인다는 점에서 연약함과 상실감이 느껴집니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은빛 저울과 같은 흑백 사진으로 가득 찬 오래된 가족 앨범을 상상해 보세요. 이 앨범은 보존되어 있지만 당시의 상황과 단절된 시간의 파편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진 속 인물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멀어짐에 따라 점점 더 중요해지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입니다. 봄의 도래는 이 앨범을 다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스틸 이미지에 생명을 불어넣고 지난 계절의 고요한 공기를 자극하는 만남이죠. 여동생의 꽃이 피지 않은 것은 필름 프레임이 사진의 가장자리 너머로 성숙하지 않는 미소를 포착하듯 단절된 잠재력의 슬픔을 이야기합니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궁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시인은 살아 있는 동안 시간의 흐름에 대한 무지를 말하며 어떤 망각이나 무관심을 암시한다. 화자는 언급된 '너'가 취하고 버린 시간들이 얽히고설킨, 어쩌면 공유되고 갈라진 경험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피신할 요새가 없어도 평온함이 느껴지는데, 이는 혼돈 속에서도 내면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햇볕에 그을린 들판을 맨발로 걷는다는 은유는 평온함과 혹독한 각성의 순간을 나란히 놓는다는 의미를 더합니다. 

 강가에 앉아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그러나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경험을 생각해 보세요. 관찰자에게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고, 강물의 끝없는 여정은 자신의 덧없는 존재에 대한 메아리로 다가옵니다. 햇볕이 내리쬐는 초원에 서서 걷다 보면 발밑의 열기와 가시덤불이 멈추지 않는 시간의 행진이라는 개념이 구체화됩니다. 시간의 강가에 앉아있을 수는 있지만, 그 여정에서 오는 더위와 따가움을 견디며 인생의 들판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숲으로 된 성벽 저녁 노을이 지면 신들의 상점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성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사원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성 

 이 발췌문은 해가 지고 신의 가게에 불이 켜지고 농부들이 돌이 아닌 숲으로 된 요새 안으로 사라지는 고요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요새는 구름이나 공기 속삭임과 같은 자연의 가장 숭고한 요소만 접근할 수 있는 미묘한 공간으로, 신성과 평화의 공간에서 세속적인 관심사를 배제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낮과 밤의 전환이 조용한 마법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의 끝자락에 있는 신화 속 마을을 상상해 보세요.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사이의 칸막이는 장벽이라기보다는 동화 속 마법에 걸린 숲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가장 순수한 형태만이 넘을 수 있는 문턱에 불과합니다. 신들의 천상의 왕궁에 생기가 돌고, 마을 사람들이 물러나면 저녁이 되면 대지에 고요한 주문이 퍼지며 성역이 초록빛 베일 뒤에 숨어버립니다. 떠도는 구름처럼 일시적이거나 제퍼처럼 부드러운 자만이 들어갈 수 있으며, 이는 영혼의 순결이 성스러움의 진정한 열쇠라는 이상을 반영합니다. 



 꽃

내 영혼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앓는 그대 정원에서 그대의 온 밤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기형도 시인의 시 '꽃'에 나오는 이 구절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육체를 초월하고 희생까지 감수하는 깊은 애정과 헌신을 표현한 시입니다. 시인의 영혼이 타오르는 것은 깊은 열정을 의미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정원의 생명력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에 자신을 합치고자 하는 충동을 반영합니다. 마지막 행에서 시인은 사랑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헌신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누군가에게 너무나 헌신적이어서 가능한 한 가장 친밀한 방식으로 그 사람의 세계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상상해 보세요. 만약 그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정원이 있다면, 당신은 그 정원의 꽃이 되어 그 사람의 감정에서 꽃을 피우고 그들의 삶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싶을 것입니다. 꽃이 가지치기를 당하듯 당신이 잘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뜻에 완전히 굴복하여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을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정원을 정성껏 가꾸는 정원사가 기꺼이 자신이 가꾸는 꽃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어린 무 서른 단을 들고 시장에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불안과 그리움을 생생하게 그려낸 대사다. "엄마가 오지 않아, 해가 시든 지 오래야"라는 반복적인 걱정은 시간이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며 아이의 걱정과 고립감을 심화시킵니다. 아이를 방 안에 차갑게 식어버린 밥에 비유한 묘사는 버려지거나 방치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배추 잎이 쿵쿵거리는 소리로 표현된 엄마의 발자국 소리는 부재하여 공포와 어둠의 분위기를 더욱 강조합니다. 

 하늘이 어두워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1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지고, 조용한 집은 텅 빈 커다란 그릇처럼 느껴집니다. 아이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는 것은 엄마의 발자국 소리, 즉 안전과 일상으로의 복귀를 알리는 리드미컬하고 안심이 되는 소리를 듣는다는 생각뿐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익숙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아이의 세계는 점점 더 불확실성과 외로움의 그림자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는 망망대해에서 마침내 안정을 찾기 위해 닻을 내리기만을 기다리는 작은 배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바람의 집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 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기형도 시인의 '바람의 집'에서 발췌한 이 시는 유년 시절의 내밀한 기억을 반영해 위로와 아련함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바람이 부는 밤 아이를 돌보며 무를 까는 어머니의 모습은 양육과 보호를 상징합니다. 바람의 울부짖음에 대한 아이의 지각을 통해 전달되는 두려움은 어머니의 지혜와 만나, 그 소리가 내면의 소리이며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변화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인생의 두려움은 나이와 경험에 따라 깊어질 것이라는 암시는 따뜻한 기억에 씁쓸함을 더합니다. 

 어릴 적 벽난로 옆에 앉아 늑대 무리처럼 밖에서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부모님의 포근한 품에 안겼지만, 그 안에는 폭풍우와 미지의 세계로 인한 두려움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위로를 위한 엄마의 말은 당신이 듣고 느끼는 소리와 두려움도 성장의 일부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깨닫게 해줍니다. 언젠가는 두려움에 대한 이해가 더 명확해지기 때문에 이러한 두려움이 더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어렸을 때 무서웠던 괴담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른이 되어 마주하게 될 실제 도전에 대한 은유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달밤

 누나는 조그맣게 울었다. 그리고, 꽃씨를 뿌리면서 시집갔다. 봄이 가고. 우리는, 새벽마다 아스팔트 위에 도우도우새들이 쭈그려앉아 채송화를 싹뚝싹뚝 뜯어먹는 것을 보고 울었다. 맨홀 뚜껑은 항상 열려 있었지만 새들은 엇갈려 짚는 다리를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다. 

 기형도는 「달밤」에서 결혼식 날 누이의 조용한 눈물을 은유적인 '꽃씨'로 미래에 씨를 뿌리는 가슴 아픈 순간을 포착했다. 계절의 흐름과 그것이 우리 삶에 가져오는 변화는 피할 수 없는, 때로는 파괴적인 변화의 상징인 아스팔트 위의 꽃을 쪼아대는 새를 통해 전달됩니다. 열린 맨홀 뚜껑은 새들의 조심스러운 비행과 대조를 이루며 위험과 회복탄력성으로 가득 찬 세상을 암시합니다. 이미지가 풍부하고 겹겹이 쌓여 있어 성장, 상실, 적응의 큰 순환을 상징합니다. 

 낯선 땅에서 꽃을 피울 수도, 피지 않을 수도 있는 꽃씨를 심는 것처럼 행복이 슬픔으로 물든 가족 결혼식을 상상해 보세요. 그런 다음 도시의 아침으로 넘어가면 새들이 콘크리트 캔버스 위에 남아 있는 자연의 조각을 쪼아 먹으며 삶이 지닌 연약한 아름다움과 갑작스러운 변동의 시각적 반향을 보여줍니다. 열려 있는 맨홀은 그 옆의 절벽을 잊은 채 바쁘게 움직이는 생명체들이 간과하고 있는 숨어 있는 위험입니다. 이는 마치 보도블록 위를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과도 같으며, 삶의 끊임없는 계절이 계속 돌아가는 동안에도 잘 알지 못하는 위험의 가장자리를 비껴가고 있습니다. 



 물 속의 사막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숫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기형도는 한밤중 텅 빈 도시 풍경에 폭우가 쏟아지는 장면을 그린 <물속의 사막>에서 황량함과 소외감을 자아낸다. 무의미해 보이는 '물 위에서는 읽을 수 없는 문장'은 혼란과 특정 경험의 무력함을 묘사합니다. 침묵이 장면을 가득 채우며 깊은 내적 고립을 반영합니다. 몬순의 여파로 개인 소유물과 집이 버려지면서 상실감과 버림받은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새벽 3시, 거리는 텅 비어 있고 끊임없이 내리는 비로 인해 닿는 모든 것이 유령 같은 실루엣으로 변해버린 도시를 상상해 보세요. 빗방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처럼 세상에 떨어지지만 홍수 속에서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이 이미지는 물속에 잠긴 사막의 변화무쌍한 모래처럼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일시적인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석탄 가루로 뒤덮인 개의 하얗게 변한 모습은 다른 시대의 유령, 변화의 폭풍 속에 남겨진 유물처럼 보입니다. 이 장면은 발밑의 지반을 뒤흔들 정도로 심오하고 혼란스러운 삶의 사건에 직면했을 때의 느낌을 반영하여 익숙한 풍경이 낯선 풍경으로 바뀝니다.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봄날은 간다'는 시간의 덧없음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감정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형도 작가는 빛과 봄날의 이미지를 통해 햇살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과 바람에 쉽게 휘어지는 그림자를 포착하여 우리 경험의 무상함과 가변성을 암시합니다. 서울의 한 베란다에 한가롭게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은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고요한 정적과 함께 기다림, 성찰, 체념을 의미합니다. 

 이른 봄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바람이 불 때마다 씨앗이 흩날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한순간의 기회,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찰나의 순간. 시간이 지날수록 태양이 드리운 그림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기억처럼 늘어지고 뒤틀립니다. 현관에서 기다리는 여인은 주변이 분주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관성의 순간에 빠져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기차가 떠난 후 기차 플랫폼에 조용히 앉아 지연된, 어쩌면 영원히 가지 못할 여행의 고독에 휩싸인 모습과 비슷합니다.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이 고독한 인물에게 시간은 말하지 못한 사연으로 무겁게 멈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노인들'에서 발췌한 이 시는 세월에 대한 성찰과 회복탄력성을 시사합니다. 시인 기형도는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봄의 따스한 기운이 닿으면 쓰러지는 나뭇가지를 묘사합니다. 여기에는 시인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 즉 타인을 괴롭히는 고통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슬픔에 대한 비자발적 참여와 죽었지만 부러지지 않은 나뭇가지에 대한 경멸은 고통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과 동시에 공허한 생존을 비난하는 복잡한 역학을 불러일으킵니다. 

 많은 계절을 살아온 노인의 눈에서 발견되는 지혜와 피곤함을 생각해 보세요. 겨울을 견디지만 봄이 오면 앙상한 나뭇가지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인내의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데에는 부담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역사의 무게를 느끼듯 다른 세대에 속한 것 같은 슬픔의 깊이에 공감하는 것이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오래되고 버려진 집이 온전하게 서 있지만 집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과 비슷하며, 생명력이 있지만 생명이 없는 존재를 상징하며, 덧없지만 자연스러운 결론에 굴복하는 나뭇가지의 생동감 넘치는 존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아이야 어디서 너는 

아이야, 어디서 너는 온몸 가득 비를 적시고 왔느냐. 네 알몸 위로 수천의 강물이 흐른다. 찬 가슴팍 위로 저 세상을 향한 강이 흐른다. 갈밭을 헤치고 왔니. 네 머리카락에 걸린 하얀 갈꽃이 누운 채로 젖어 있다. 그 갈꽃 무너지는 서산을 아비는 네 몸만큼의 짠 빗물을 뿌리며 넘어갔더란다. 아이야 아비의 그 구름을 먹고 왔느냐. 

 이 시는 날씨와 자연으로 상징되는 삶의 고난을 이겨내는 아이의 모습을 담담한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빗줄기에 흠뻑 젖은 아이의 이미지는 인생의 고난이 주는 깊은 영향처럼 존재에 깊이 각인되는 경험을 암시합니다. 아이의 눈물과 비슷한 바닷물을 뿌리는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세대 간의 깊은 정서적 연결과 공유된 경험을 조명합니다. 생명의 순환과 자연의 요소가 인간의 존재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폭풍의 잔해 속을 헤매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비의 상쾌함이 아직 공기 중에 남아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마치 그들이 겪은 시련의 잔재처럼 느껴집니다. 이들은 인생의 폭풍우를 헤쳐 나가며 젊은 시절의 드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길을 만들어온 시냇물처럼 각 시냇물에는 도전, 교훈,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가 만든 구름을 자식이 섭취하는 신비로운 교감을 통해 가계를 잇는 투쟁과 인내의 교감을 나누고 있습니다. 마치 자연과 가족의 유산이 공모하여 아이에게 비의 세례를 내려 비에 젖은 흙의 향기와 씁쓸한 성장의 향기를 남긴 것처럼 말입니다. 



 쥐불놀이

 어른이 돌려도 됩니까? 돌려도 됩니까 어른이?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대보름의 달이여 올해는 정말 멋진 연애를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불 속에 숨어 있는걸요? 돌리세요,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꿩을 위해 돌리세요, 술래 는 잠을 자고 있어요 

 '쥐불놀이'에서 시인은 불이 붙은 깡통을 휘둘러 불 바퀴를 만드는 한국의 전통 놀이를 떠올리며 시간의 흐름과 사랑의 경험에 대해 사색합니다. 이 놀이는 그에게 사랑이 삶을 지탱해준 버팀목이었던 것처럼, 어른들의 딱딱한 세계에서 작은 위안이 됩니다. 어른이 게임을 돌려도 되는지 물음으로써 그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더 단순한 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에 대해 성찰합니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관계에 대한 갈망과 어른들이 종종 잊고 사는 소박한 기쁨을 전달합니다. 

 설날에 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어른이 언덕 위에 홀로 서서 어둠 속에서 불이 붙은 깡통을 돌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이 회전하는 불은 젊음의 타오르는 열정과 종종 밝게 타오르지만 금방 꺼져버리는 로맨스의 회오리바람을 상징합니다. 불의 최면 원은 밤을 밝히는데, 눈부시고 아름답지만 결국 연기와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시인은 그해에 '위대한 사랑'을 경험하기를 열망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은 불처럼 진실하고 찬란하며, 세상이 종종 어른들에게서 빼앗아가는 어린아이와 같은 경이로움으로 물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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