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새는 결코 자신의 둥지를 만들지 않는다.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지. 뻐꾸기 새끼가 세상에 나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 둥지에서 다른 알을 밀어서 깨뜨리지. 그렇게 경쟁자를 끝장내는거야. 그들의 삶은 살육으로 시작된다. 그게 자연이야. 경쟁, 아니면 죽음뿐이지.
너희들은 살아남은 뻐꾸기 새야. 이 탈락자들의 수많은 지원서들을 봐라. 너희들이 여기 ICE(임페리얼 공대)에 들어오기 위해 부숴버린 다른 알들이 여기 있다. 기억하렴. 인생은 레이스야. 너희가 충분히 빨리 달리지 않으면 누군가 너희를 추월하고 더 빨리 움직일 거야.
-Virus 교수, 영화 <세 얼간이> 중.
어느 명문고등학교에서 최고난도 한국사 시험 문제가 나왔다. "1920년 일제의 회사령 철폐로 일본 자본이 0000 들어왔다." 교과서 구석에서 가져 온 이 문장에서 빈칸을 채워야 하는데, 내로라하는 수재들 중 누구도 답을 맞히지 못했다. 정답은 '물밀듯이' 였다고 한다. 여러분은 무슨 국사 시험에 이런 쓸데없는 단어 하나 가지고 문제를 내냐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수험생들은 시험의 공정성에 대해 납득했다. 어찌됐든 교과서에 쓰여 있는 문장이었고, 그걸 외우지 못한 탓은 자기에게 있기 때문이다.
위 이야기가 실화인지 나는 잘 모른다. 수능에서 만점을 받고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가 자기 학교 내신 시험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나는 농담일 거라고 했지만 그 친구는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실화라고 덧붙였다. 똑똑한 아이들을 모아놓고 내신 경쟁을 시켜야 하니 국사 선생님이 교과서를 다 외우라고 시켜놓고 이런 엉터리 문제를 출제했다는 것이다. 그 고등학교를 고발하려는 건 아니니까 진실 여부는 논외로 하자. 내가 더 놀란 것은, 위 일화를 듣고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도 충분히 낼 만한 문제였고, 공정했으니 된 거 아니냐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국 교육에서 공정성은 엄청난 가치로 여겨진다. 하지만 극도의 공정성을 위해 포기하게 되는 것은 왜 생각하지 않을까? 공정성은 종종 획일성으로 이어지고 서열화, 시험만능주의, 비교지상주의, 물질주의로 연결되기 쉽다. 공정을 추구하다가 실질적인 불공정을 초래하는 역설적인 경우도 있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이라는 착각>이라는 책도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이를 납작한 공정성과 입체적인 공정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와 교육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 공정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과도한 걸까? 다시 말해, 경쟁과 획일성, 형식적인 공정을 넘어서서 실질적인 공정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서두에 인용한 비루스 교수의 말처럼, 흔히 인생을 경주(Race)에 비유한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거북이처럼 꾹 참고 노력해서 이겨내는 장면을 좋아한다. 하지만 과연 그 경주는 정말 공정한 것일까? 거북이의 삶이 그렇게 좋아보이는가? 애초에 토끼와 거북이가 잘 하는 영역은 전혀 다르다. 거북이는 경주에 나서기 전에 규칙에 대해 바꿔달라고 항의하는 게 좋았을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는 일에서 엄청난 노력과 희생으로 승리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거북이는 여전히 달리기를 싫어할 것이다. 어쩌면 챔피언이라는 부담감으로 주변에서 눈치가 보일지도 모른다. 거북이가 경주에서 지고 다른 적성을 찾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진짜 비극은 잠깐의 승리를 믿고 달리기 선수를 직업으로 고른 거북이가 평생 고생하면서 행복도 찾지 못하는 것이다. 토끼를 꼭 깨웠어야만 정의로웠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 번의 경주라면 몰라도 평생의 인생과 직업을 선택할 때에는 시각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거북이는 몰랐을 것이다. 달리기 경주 옆 동네에는 빠르게 헤엄치기, 오래 살기, 껍질 속에 들어가기 등 온갖 다양한 대회와 이벤트가 있었다는 걸 말이다.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공정성이 매우 중요하지만 유일한 가치는 아니라는 점이다. “의심받기 싫으니 정량지표만으로 뽑겠다”는 로스쿨이 늘면 정량지표를 올리는 데 자원을 투입할 수 있는 유복한 집 자제들 비중이 더 커지고, 법률가 집단은 지금보다 더 획일화될 것이다. 진정한 잠재력과 다양성을 평가해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갈 좋은 인재를 발굴하려는 순수한 노력마저 중단돼서는 안 된다. 맹목적인 비난보다 현명한 비판이 필요한 이유다.
-천경훈, <로스쿨 입시 다양성도 중요하다>, 중앙일보 칼럼 중.
천경훈 교수는 용감하게도, '공정성이 유일한 가치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발언을 하면 비리와 부정행위를 옹호하는 걸로 오해받기 쉽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세상에는 객관식 시험과 달리 정해진 답이 없다. 이상적인 법조인의 모습이나 이데아가 고정적으로 존재할 리가 없다. 아무리 사법시험을 만점맞는 천재 대법관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면에서 불편부당한 인격체는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모든 평가 결과가 결국 특정한 취향이나 편향성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결국 좋은 대학을 만들기 위해 중요한 건 여러가지 취향과 관점이 뒤섞여서 다양성 높은 집단을 구성하는 것이다. 물론 다양성이 유일한 가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경시되고 있는 가치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예일대 로스쿨에는 '런닝머신(treadmill)에서 뛰어내리기'라는 유명한 연설이 전설처럼 내려온다고 한다. 예일대 동문 매거진에 Jennifer Kaylin이 1993년 기고한 글에 따르면, 예일 로스쿨의 성공에서 많은 공로는 1953년에 졸업하고 교수로 돌아온 Guido Calabresi에게 돌아가야 한다. 1985년 학장이 된 칼라브레시는 수업 첫 날에 반드시 이런 연설을 한다. "축하해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수많은 경쟁에서 살아남았고 더 이상 검증할 필요가 없어요. 지금까지 공부에만 매진해 왔겠죠. 앞으로는 그 런닝머신 위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예일은 1등부터 180등까지 등수를 매길 생각이 없어요. 옆의 친구들을 돌아보며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공부를 하세요. 그게 예일 로스쿨입니다." 그는 졸업생들이 했던 독특하고 이상한 업적들을 나열하고, 로펌이나 clerkship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위험을 감수하라고 권한다. 한국에서 이런 교수가 있다면 대책없다고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예일 로스쿨은 A~F의 성적을 매기지 않고 변형된 pass/fail 제도를 통해 덜 경쟁적인 분위기를 중시한다는데, 경쟁을 많이 할수록 실력이 좋아진다는 우리 통념을 재검토해야하지 않을까.
2021년 예일 로스쿨의 헤더 게켄(Heather Gerken) 학장은 위 연설을 더 발전시켰다. "제 조언도 역시 러닝머신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다만 가만히 안주하지는 마세요. 계속 달리세요, 그러나 경주하지는 마세요(Don't race, but Run). 레이스 속에서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겠죠. 모두 같은 트랙에서 경쟁할 때 당신의 성공은 다른 사람의 실패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진정한 달리기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달리기의 진정한 핵심은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방향을 직접 선택해야 해요. 예일의 성공적인 졸업생들 중 대부분은 졸업 후까지 정확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많은 길들은 여러분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여러분이 스스로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예일대처럼 엘리트들이 모이는 유명한 곳이니까 "저렇게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라고 느껴지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어떤 위치의 누구라도 메타인지를 통해 자기 자신의 상황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 앞을 보고 달리다 보면 내가 뭘 향해 가는지 잊고 눈 앞의 경쟁에만 매몰되기 쉽다. '자기주도적인 선택은 엘리트들만 하는거야'라는 관념이야말로 가장 엘리트주의적인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
서울대 로스쿨에서도 독특한 성적제도로 1학년 1, 2학기에 S/U 학점 정책을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전공필수 수업에 대해 pass, fail로만 평가해서 학생들의 학업 부담을 줄이고 다양한 진로 탐색을 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 제도가 곧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른 로스쿨들에서 엄정한 학사 관리를 위해 폐지하라는 강한 압력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 로스쿨은 학교 내에서뿐만 아니라 학교들 간에도 치열한 경쟁과 비교가 존재한다. 검사, 로클럭, 빅펌을 몇 명 보냈는지 집계해서 서열화하는 기사도 나온다. 서울대의 무학점 정책으로 인해 로펌의 서울대 선호 현상이 더 심해졌다는 지적도 있다고 한다. 나는 소위 검, 클, 빅 모두 지망하지 않았으니 우리 학교의 위상을 드높이는 데에 기여하지는 못했지만, 무학점 제도가 부디 없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법률신문에서 공익-인권변호사는 왜 집계에 안 넣어주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쩌면 이 정책의 최고 수혜자라고 생각한다. 경쟁의 부담이 적었기 때문에 1, 2학년 때 학내 모임과 인권법학회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고 지금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학기 중 어려움이 있었는데, s/u 제도가 없었다면 어쩌면 공부를 이어가지 못하고 중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학부 4년, 로스쿨 입시를 위해 끝없이 달리던 학생들에게 재정비할 시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공부를 잘하면 행복할 거라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지속된 경쟁과 비교하는 분위기 속에서 행복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는 진심으로 다른 로스쿨에서도 이런 정책이 있다면 좋겠다. 특히 학교가 추구하는 다양성 차원에서 보더라도 무학점 정책이 폐지되면 가장 어려움을 겪는게 소수자에 속하는 학생들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런 뜨뜻미지근한 논증은 결코 설득력을 가지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대신 이렇게 말해보자. 치열한 경쟁으로 선발한 인재들이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시험의 등수를 매기도록 해서 '물밀듯이'같은 단어를 외우게 하는 건 국가적인 낭비다. 차라리 우리 사회를 위해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할지 각자 자유롭게 생각하게 풀어준다면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미지의 영역에 진출해서 새로운 혁신을 주도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지 말라고만 할 게 아니라, 왜 한국 엘리트들은 획일적인 경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구조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서 말이다.
The Race Track (Death on a Pale Horse)c. 1896–1908 Albert Pinkham Ryder
경주를 표현한 유명한 작품으로, 알버트 핑크햄 라이더의 The Race Track (Death on a Pale Horse)이라는 작품이 있다. 말 그대로 트랙을 달리는 창백한 경주마 위에 해골 기수가 타고 있다. 성경의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창백한 말'을 타고 있는 '죽음'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클리블랜드 미술관에 따르면, 이 그림의 주제는 1888년 뉴욕에서 열린 경마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 화가 Ryder의 친구 하나가 경마에 500달러를 걸었다가 돈을 잃자 친구가 자살한 것이다. 요즘 사회에도 인생 한방을 노리다가, 지름길만 노리다가 실패하면 생명을 포기하겠다는 식의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죽음'은 낫을 들고 창백한 말을 탄 해골로 표현되고, 유혹과 악의 상징인 뱀이 그림 앞 부분을 기어가고 있다. 누가 이 고통스러운 경마를 시작했을까? 우리는 왜 여기에서 달리고 있을까? 이 경주 트랙을 벗어나면 안되는 걸까? 우리끼리 질투하고 앞서려고 밀어내는 게 의미 있는 일일까? 오징어게임처럼 누군가가 저 멀리서 돈을 걸고 지켜보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공정성은 알지 못한 채, 옆의 녀석이 나보다 앞서간다고 티격태격 다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보니 내가 학부생 때 들었던 인상적인 가르침이 생각난다. 재무관리 교수님이 그러셨다.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든 끈질기게 할 수 있는 인재들이에요. 그러니까 실패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령 여러가지 도전이 다 실패해서 육체노동을 한다고 해도 그 일에 목숨 걸고 할테니까 상위 1%를 해서 먹고 살 수 있어요. 그러니까 벌써부터 최악을 가정해서 안정적인 직업만 가지려고 하지 마세요."
어찌 보면 뻔한 연설이겠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재무학 교수잖아요. 여러분들이 각자 주식이라고 치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거거든요. 혹시 내 말을 믿고 창업도 하고 도전도 하고 그러다가 쫄딱 망했다? 그러면 나한테 와서 생활비를 내놓으라고 하세요. 열심히 살았는데 운이 나빠서 그렇게 되었다고요. 내가 그 정도도 못 해주겠어요? 대신 내 말대로 해서 성공하면 어디 가서 나 덕분에 내 장담 덕분에 도전할 수 있었다고 한마디 해주면 됩니다. 나는 여러분에 대한 투자가 절대 실패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몇 년 째 장담을 하지만 아무도 내게 망했으니 돈 달라고 온 적은 없거든요. 일단 도전해보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도 생길 겁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여러분처럼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못 믿어서 소극적이고 안정지향적인 선택을 한다는 거예요."
새로운 길로 가보기로 결심한 나는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언젠가 그 교수님을 진짜 찾아갈 생각이다.
우리 앞엔 두 가지 연설이 있다. 칼라브레시와 게켄의 '런닝머신에서 뛰어내리기' 연설과 Virus 교수의 '뻐꾸기처럼 밀어내기' 연설이다. 결정권은 당신에게 있다. 여러분은 어떤 연설을 믿고 따를 것인가. (계속)
이어령 작가는 모 강연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앞선 사람들이 다 해 버렸으니 나는 말을 덧붙이기보다 인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천재 아닌 사람이 어디있어. 모든 사람은 천재로 태어났고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천재성을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남들이 덮어 버려요. 학교에 들어가면 학교 선생이 덮어주 고 직장에 나오면 직장 상사들이 덮고 자기 천재를 전부 가릴려고 해.
그래서 내가 늘 하는 이야기가 360명이 달리는 방향을 좇아서 경주를 하면은 아무리 잘 뛰어도 1등 부터 360등까지 있을꺼야. 그런데 남들 뛴다고 뛰 는 것이 아니라 내가 뛰고 싶은 방향으로 각자가 뛰면은 360명이 다 1등 할 수 있어. 'BEST ONE'될 생각하지 마라. 'ONLY ONE'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라.
자기는 하나밖에 없는데 왜 남과 똑같이 살아? 왜 남의 인생 남의 생각을 좇아가냐고 사람들이 와 몰 리는 길에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야. 그랬을 때 대담하게 내가 정말 가고 싶은 길은 쓰 러져 죽더라도 내가 요구하는 삶을 위해서 가라는 거예요. 자기 삶은 자기 것이기 때문에 남이 어떻 게 할 수가 없어. 늙어서 깨달으면 큰일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