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자살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플란다스의 개

삶과 생존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걸까

"숙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위한 변론>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으니라"(朝聞道 夕死可矣) - 공자, <논어>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의 첫 문장

"난 절대로 내 믿음을 위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I would never die for my beliefs because I might be wrong.) - 버트란드 러셀, <자유사상과 공식적인 선전>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낫다, 만족한 멍청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


플란다스의 개는 좀 특이한 동화다. 아무리 봐도 주인공 네로는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계속해서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끝내 비극적으로 죽고 만다. 피노키오처럼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놀부처럼 심술을 부리거나 베짱이처럼 게으른 것도 아니며,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허영심이 많지도 않았다. 단지 화가가 되겠다는 꿈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을 뿐인데, 소설가 '위다'는 주인공 네로와 파트라슈를 지독하게도 괴롭힌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춥고 심지어 누명까지 써서 괴롭힘당한다. 권선징악이라기 보다는 권악징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마지막 죽음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네로의 죽음은 자살인가? 아닌가? 나무위키에 따르면 원작소설도 죽음의 장면을 모호하게 서술해서, 자살인지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다고 한다. 사실 우리 생각보다 자살이라는 개념은 명확하지 않다. 자살하면 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없다는 법리에 비추어 볼 때, 만일 네로의 사망에 보험금이 걸려 있었다면 받아낼 수 있는걸까? 동화에서 자살 시도는 드물게 발견되는데, 팅커벨이 피터팬을 구하기 위해 독약을 마시는 장면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서로의 오해로 각자 자살하는 장면이 있다. 이 글에서는 자살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시지프스의 형벌과 의문스러운 죽음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인간의 삶을 시지프스의 형벌에 비유하는데, 그 말대로라면 따지고 보면 자살하지 않을 이유가 잘 없다. '어차피 모든 인간이 죽을 것인데 고통을 피하고 빨리 죽는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누군가는 가족들이 슬퍼할 거니까 자살하지 말자고 하지만, 달리 말하면 다 같이 죽으면 된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실존주의 철학은 이러한 문제에 설명을 제기하려고 한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서도 실존주의와 허무주의가 끝없는 대결을 펼치는데, 그 대립은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며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내적으로 고민해봤을 주제라고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카뮈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의 부조리함과 불확실성을 강조하며 '교통 사고로 죽는 것이 가장 무의미한 죽음일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는데, 1960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위대한 지성의 무의미한 죽음이 참 안타깝지만, 최근 일각에서는 카뮈가 소련의 인권침해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원한을 사서, 소련의 KGB 요원이 사고를 가장해 그를 계획적으로 암살한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된다고 한다. 참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사람의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심장이 멈췄을 때가 아니라 잊혀질 때 죽는 것이다.-원피스) 링컨과 케네디, 간디, 존 레논과 같이 암살당한 사람은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만일 카뮈 암살설이 사실이라면, 그 죽음은 사실 무의미한 게 아니고 다시 의미있어진다고 말해야 하는걸까? 아니면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이런 저런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것 자체가 다시 무의미한 짓인 걸까? 죽은 뒤에 후손들이 그 삶의 위대함을 추앙한다고 해봤자 그 인생이 끝나버렸는데 뭐가 달라지나? 해결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아무튼 카뮈의 관점은 자살과 삶의 의미에 대해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다.





삶과 생존의 차이, 그리고 자살의 정의
네로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


네로와 파트라슈는 자발적으로, 마침내 루벤스의 성화 앞에서 예술적 감동을 느끼면서 삶을 마감한다. 그렇다면 그냥 무의미하게 살다가 갑자기 죽는 것보다 의미 있는 죽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네로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진짜 비극은 그러한 예술적 감동이나 삶의 의미도 고민해 본 적 없이 냉혹한 현실에서 생존하다가 늙어서 죽는, 네로에게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오히려 누명을 씌워 괴롭히던 이웃 사람들의 인생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왜 사는가? 그냥 태어났으니까 산다. 왜 죽지 않는가? 죽기가 무서워서 그렇다.


나는 삶과 생존을 구별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네로같이 고통스럽지만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그냥 생존하다가 다양한 이유로 사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로가 불쌍한 게 아니라 그 이웃들이 불쌍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예수님도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다지 않는가. 팅커벨처럼 우정을 위해 혹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감정에 빠져 죽는 것은 충동적인 행동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자살 충동은 인간의 속성을 잘 반영하는 것 같다. 네로의 죽음은 빈곤, 추위, 방화 사건의 누명과 분명히 연관이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반드시 루벤스의 그림을 보겠다는 예술적인 열정이었다. 죽음을 예감했더라도, 작품을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상관 없다 혹은, 평생 다시 오지 않는 기회라면 반드시 보고 말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네로에게 예술가로 활동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자원이나 안전망이 제공되었다면,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다양하게 열려있었다면 자살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경제적 소외계층에게 자살이 유일한 선택지가 되지 않도록, 예술가를 위한 사회복지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게 된다.


사실 공자님이 논어에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말한 것은 다소 과격하게 느껴진다. 소크라테스도 '숙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단다. 성인이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생명을 하찮게 여겨도 되는건가?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만큼 도를 알기가 어렵다는 비유적 표현이라고 하기도 하고, 여기서 '도'와 '숙고하는 삶'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논쟁하기도 한다. 나는 하나의 고정된 목표가 아니라 여러 가치와 의미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 선, 미', 즉 어떤 진리나 윤리, 예술에서 느낄 수 있는 궁극적인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러한 가치를 좇는 자세이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것도 상관 없다. 고상한 취미 뿐만 아니라 단순한 게임, 요리, 노래방, 등산, 소주 한잔, 브런치 글쓰기에도 철학과 윤리와 예술이 숨어있다. 그런 걸 찾아다닐때는 결코 자살을 떠올릴 겨를이 없을 것이다. 인생이 살만하다고 느낄 지도 모른다.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이 단순히 생존을 위해 생존하는 것은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 상황에서 자살하지 않을 이유는 결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자살일까? (법철학에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오역이라고 지적받고 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루기로 하자.) 팩트만 정리하면, 소크라테스는 도망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독배를 마셨고 죽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던지게 된다. (논리적으로는 예수님도 스스로 십자가형을 택했다.)


생존할 수 있으면 비겁하고 구차하더라도 무조건 생존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살' 말고 '순교', '순국'이라는 말도 있다. 성경에 나오는 삼손과 데릴라의 일화에서, 삼손이 건물을 붕괴시킨 것은 자살이 아니고 순교라고 한다. 윤동주, 안중근, 유관순, 전태일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위인들에게 자살이라는 말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같다. 한편 버트란드 러셀은 레너드 라이온스와의 대화에서, "난 절대로 내 믿음을 위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사람의 신념은 이렇게 나약하기도, 혹은 잘못되기도 한다. 나치, 카미카제처럼 불의한 편에 서서 깊은 감동을 느끼는 죽음도 분명 존재한다. 한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잘못된 신념은 충분히 숙고되지 않았고, '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도'가 아니었던 것 아닐까.


물론 신념은 단순한 명예욕이나 허세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은 가족을 죽이고 전쟁터로 떠나는 계백의 일화를 패러디하는데, 죽음에 관한 흥미로운 대사가 나온다.

계백의 아내 : 아! 나라가 쳐망해버리든가 말든가! 아, 그것이 뭐기에 니가 내 새끼들을 죽인다 살린다 하냐!

계백: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절망스러워하며) 제발 깨끗하게 가자니까!

계백의 아내: (눈물을 흘리며) 뭣이 어쩌고 어째? 아가리는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씨부려야지. (울부짖는다)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뒤지는 것이여! 이 인간아!

계백 장군의 결연한 의지가 어떤 심리에서 나왔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사람이 이름 때문에 명을 재촉한다는 아내의 이야기는 큰 통찰을 준다.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삶의 의미란, 단순히 후대에게 이름을 남길 수 있다는 식의 개념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이름은 호랑이 가죽처럼 허망한 것이다. 진짜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의미다.




자살을 바라보는 종교적, 학문적, 예술적 견해들
네로와 파트라슈는 천국에 갔을까


자살을 얘기할 때 기독교의 강경한 전통적인 입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도 최대한 줄이기로 하자. 사실 종교가 있는 사람에게 자살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많은 종교에서, 특히 기독교에서 '

자살하면 지옥간다'라는 식의 도식이 어느정도 통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부 기독교 변증가들(조나단 노예스, 션 맥도웰 등)도 '자살해도 천국 갈 수 있다', 혹은 '천국 갈 지 말 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라는 논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 논점은 영화 <콘스탄틴>에서도 흥미롭게 활용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애니메이션 판에서는 네로와 파트라슈를 천사들이 천국에 인도하는 결말로 끝난다. 누군가 이 영상의 댓글로, '왜 저 놈의 천사들은 필요할 때 안 오고 죽고 나서야 오는거냐'라고 했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천사를 기다릴 게 아니라 인간사회를 잘 만드는 게 더 중요할 것이다.

https://youtu.be/v6nmUgwiIx4?t=151


카톨릭과 개신교도의 자살 성향에 대해서는 사회학자 뒤르켐의 연구를 빼놓을 수가 없다. 간단하게 말하면, 자살이라는 극도로 개인적인 결단에 있어서도 인간관계가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인데, 그는 사제의 권위와 집단적 응집력이 강한 가톨릭 교도가 평신도와 개인 중심의 교리인 기독교 교도보다 자살률이 낮게 나타난다고 분석했다.(최근 사회학 연구에서 자살률에 어떤 변수가 가장 결정적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한국의 노인 자살률이 이례적으로 매우 높다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


한편 정신의학에서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수의 자살을 항우울제와 상담치료 등으로 예방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고 한다. 알약 몇 개 먹는다고 죽을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놀랍게도 그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통계적인 근거들이 쌓여 있다. 그걸 보면 인간은 생각보다 생물학에 정말 많이 의존하는 존재인 것 같다. 그렇다면 존엄사나 안락사, 조력사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 자기 생명을 끝낼 권리가 인정되어야 할까? 어떤 질병과 고통이 있는지, 스스로 합리적인 결정을 표현할 능력이 있는지, 경제적인 부담으로 제도가 악용될 우려는 없는지,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겠지만, 사실 판단하기 어렵다는 말을 돌려말한 것이다. 그 판단의 최종심급은 결국 대법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엄청난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했다는 뉴스가 나오는 것이 이제 낯설지 않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미 죽고 싶으면 죽을 수 있으며,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이다.


다만 국가와 사회는 국민이 죽지 못하게 감시하거나 통제하기보다는, 애초에 죽고 싶어하지 않게끔 잘 관리하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통계적 연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물질만능주의와 경쟁, 능력주의와 지나친 비교의식, 획일화된 서열주의 문화는 다양한 가치와 의미 획득을 어렵게 하므로 자살 심리에 상당히 나쁘다고 생각한다.




다시 플란다스의 개로 돌아와 보자. 마지막까지 잘 해결되지 않는 미스테리가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 앤트워프 성당에 열려있는 뒷문으로 몰래 침입한 네로와 파트라슈. 평소에는 은화를 내야만 볼 수 있었던 그림이, 그 날만큼은 두꺼운 커튼에 가려지지 않고 달빛에 반짝였다. 커튼은 누가 치운 걸까? 원작에는 그 이유가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다음날 크리스마스 행사에만 무료로 공개하려고 예외적으로 열려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네로와 파트라슈는 하루만 버티면 공짜로 볼 수 있다는 걸 몰랐던 걸까? 어리석다고 말해야 할까? 나는 성당에서 그런 황금대목에 무료 공개를 하지는 않았을 거 같다. 어쩌면 네로와 파트라슈를 위해 자비를 베푼 신부나 성당 직원이 있었던 것 아닐까? 하필 크리스마스 이브에 뒷문을 열어 놓고, 커튼을 치워져 있었던 건 우연이라고 보긴 어려울 거 같다.


혹은 신이 직접 개입한, 말 그대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일 지도 모른다. 사실 네로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지 아닌지는 명확히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사망한 날짜가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사망한 장소가 성당이라는 점, 그리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림이 예수를 '십자가에 세움',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림'이라는 점이 종교적인 느낌을 준다. 어쩌면 작가는 네로의 죽음을 통해 종교집단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려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수님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아마도 네로를 괴롭혔던 사람들은,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말하며 불평할 것이다.


결국 네로의 사망이 자살인지 여부는 외부인 입장에서 어차피 알 방법도 없고,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형법에는 미필적 고의라는 말이 있다. 어떤 결과 발생이 불확실하더라도, 그 결과를 예견하고 용인했다면 고의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보험금 다툼의 과정에서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자살로 인정되어서 보상받지 못할 여지가 클 것 같다. 하지만 결코 무의미한 삶은 아니었다. 이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어 보이는 무신론적, 회의주의적 현대사회에서도, 예술을 향한 열정은 그 자체로 숭고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몇 안되는 확실하게 검증된 탈출구다. 굳이 비교하고 경쟁할 필요도 없다. 예술은 모든 인간에게 충만한 감동을 주고도 고갈되는 일이 없다. 조합 대수기하학 연구로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는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허준이 교수의 축사 중.


출처: 경향신문 유튜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죽음과 예술, 주변의 시선
사회 비판 동화? 네로와 파트라슈의 새로운 시작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속해서 어느 병실에서 어떤 침대에서 죽고 무슨 프리미엄 묘지로 갈지 관심을 가지라고 부추길 것이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남들보다 못한 곳에서 시시하게 무시당하며 죽을테니 큰일 난다고도 할 것이다. 그러한 주변 시선에도 불구하고 죽는 순간까지 예술적 가치를 추구한 네로의 열정은 수학에 인생을 바친 허준이 교수의 열정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예술은 원래 한가한 인간들이 심심해서 만들어낸 것이고 가난하고 돈 없으면서 예술을 추구하는 건 사치에 불과하니까 당장 돈부터 벌어' 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예술을 모르겠는가.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는 미술을 사랑하는 네로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다. 네로는 예술을 사랑했으며 동시에 예술로부터 사랑받았기 때문에 행복했을 것이다. 겨우 동료 인간들 따위가 괴롭힌다고 해서 낙담할 이유가 없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숙, <가난한 사랑 노래> 중.


나는 가난해도 이것들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플란다스의 개는 그러한 점에서 사회비판동화로 해석될 수도 있다. 끝으로 나는 아이들을 위해 좀 더 희망적인 관점으로 이 이야기를 각색해보고 싶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문학적 표현일 지도 모른다. 네로와 파트라슈는 그날 밤 루벤스의 명화를 보고 다시 활력을 재충전한 뒤에 그 가혹한 마을을 떠났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발군의 생활력으로 이겨냈을 것이다. 마침내 다른 마을에서 이름을 바꾼 네로는 파트라슈와의 우정과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작품활동을 하면서 행복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보고 뉘우쳤다는 것은, 사실 꾸며진 이야기다. 비겁한 마을 사람들은 네로와 파트라슈가 떠난 걸 발견하고, 꾀를 냈다. 가짜 무덤을 만들고 네로와 파트라슈의 이야기로 관광지를 만든 것이다. 동화는 원래 누가 그 이야기를 지어냈는지에 유의해서 봐야한다. 나는 이 이야기가 비현실적일지 몰라도 더 마음에 든다. (끝)

Nello and Patrasche were left all alone in the world.
네로와 파트라슈는 세상에 외톨이로 남겨졌다.
They were friends in a friendship closer than brotherhood.
그들은 형제보다 더 가까운 우정을 나눈 친구였다.
Nello was a little Ardennois Patrasche was a big Fleming.
네로는 아르덴 출신의 작은 소년이었고 파트라슈는 플란다스 출신의 커다란 개였다.
They were both of the same age by length of years,
그들은 햇수로 치면 같은 나이 였다.
yet one was still young, and the other was already old.
하지만 하나는 아직 어렸고, 다른 하나는 이미 늙었다.
-위다, <플란다스의 개>의 첫 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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