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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가 부업으로 논술 강사 준비하게 된 사연

몇달 전부터 대입 논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Highway and Byways, 1929 by Paul Klee


몇달 전부터 대입 논술 공부를 하고 있다.

지금 와서 대학을 다시 들어가려는 건 아니다. 그냥 1년 반 뒤 법무관 복무가 끝나면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 찾아보다가 논술 교육 시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굳이 다른 길을 찾는 이유? 내 주변을 조사해 보니 대부분의 동기들은 소위 빅펌에 이미 다니고 있거나, 다닐 계획인 것 같다. 몇달 전 학부/로스쿨 동기의 뜻밖의 제안으로 나도 원서를 넣어볼까 (아주 잠깐) 고민했다가 역시 아닌 것 같아서 접었다. 물론 가족들도 내 진로에 관심이 많고 훈수도 둔다. 아마 로스쿨 과정에서는 딱히 달라질 게 없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내 판단의 이유를 설명하자면 스스로도 조금 복잡미묘한 심정이고, 솔직히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논증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원래 인생의 실존적인 결단은 계산적, 도구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거두절미하면, 결국 그런 커리어에 그만한 노력을 쏟을만한 보상이 (경제적으로든, 다른 측면에서든) 있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엄청난 노동량에 비하면 생각보다 주어지는 게 별로 없다고들 한다. 물론 업무량도 케바케고 과장된 거라는 말도 있지만 아무튼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배우자, 아이와 함꼐하는 시간, 재밌는 영화 찾아보는 시간, 책 읽고 브런치에 글쓰는 시간, 뉴스 찾아보고 답답해하며 분통 터뜨리는 시간.. 이런 것들을 잠시라도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봐도 참 까다롭기는 하다.

나 스스로는 돈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다고 믿지만, 어찌보면 나는 적당한 성공보다는 큰 성공을 원하는 것 같다. 물론 어떤 회사에서도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받아준다고 보장해준 적은 없다(오해 금지). 그 분야뿐 아니라 검찰이든 법원이든 그런 보장을 쫓아 살기보다는 아직 꿈을 향해 가보고 싶은 느낌이다. 1년이라도 좋으니 간판을 따거나 경험을 하는 게 좋다는 말도 지겹도록 들었다. 솔직히 이 말을 반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냥 그렇게 하기 싫다. 세상의 쓴맛을 보고 나서 비굴하게(?)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기회를 빨리 잡고 싶은 마음이 크다(로펌 변호사들이 비굴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 몸과 두뇌가 노화하는 속도를 생각해봤을 때, 경험의 축적으로 얻는게 더 클지도 잘 모르겠다. 어떤 회사에서 간판만 따고 나오려고 들어간다는 게 너무 기만적인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애써서 들어간다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자율적으로 일할 가능성은 구조적으로 매우 낮다(가령 한국의 대형 펌에는 노측 대리나 자문 업무가 전무하다고 한다). 맘먹고 뛰어들거면 뛰어들었지, 지금처럼 애매한 마음가짐을 숨기고 충성을 다하겠다고 호소하고 싶지가 않다. 여우의 신포도 동화가 생각나는데, 신포도는 신포도로 두고 떠나는 용기가 정말 중요하다고 늘 주장해왔다. 그런 주장을 말로만 하는 것보다 정말 용기있게 결단하는 게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글이 길어지는 것이다.


아무튼 로스쿨 1학년 때부터 나는 곧바로 개업을 하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다. 나름 구체적인 컨셉과 계획들, 리서치, 공익활동 준비까지 해왔다. 다들 개업시장이 힘들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시장에는 좋은 기회가 많이 널려있고, 내가 잘 잡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떤 근거로 정당화되지 않는 믿음에 불과했겠지만 이런 마인드셋을 가지는 것 자체가 대체로 도움이 된다. 처맞기 전에는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고 했던가.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는데, 어느정도 각오는 되어있다. 하지만 물론 리스크 관리는 필요하다.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부업이나 포트폴리오, 파이프라인을 어떻게 펼치면 좋을지 고민이 있었다.

그렇게 정신승리를 하며 시장을 서핑하다가 발견한 게 논술 교육이다. 학부 때 잠시 마주쳤던 후배와 정말 오랜만에 마주쳤는데, 그 친구가 유명한 학원에서 전업으로 논술 강사를 한다는 말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다짜고짜 나도 학원에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날따라 그 친구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도 흔쾌히 나를 추천해줬고 신기하게 학원 측과 이야기가 잘 이루어졌다. 원래도 수능 국어 교육에 관심이 있었는데, 여러 자료를 접하면서 논술 교육이 더 적성에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대학원에서 만나는 상당수 교수님들도, 논술, 구술, 토론, 창의성 등으로 학생을 선발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신다. 한국 특유의 줄세우기, 공정성에 대한 강박적인 요구 때문에 현실화되기 어렵지만, 숫자가 아니라 글과 말이 가지는 힘은 분명 실존한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도 일종의 논술 사교육 강사 아니겠는가. 논술 강사처럼 특별한 자본 투입 없이 글을 읽고 쓰고 토론하면서 확실한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직업도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진지하게 논술 교육, 문해력, 토론, 철학과 예술 교육이 나라의 미래를 상당히 좌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그게 현실에서 치열하고 비싼 사교육(대체로 획일적인 답 맞히기 게임)을 매개로 한다는 점이 좀 안타깝기는 하지만 일단 나도 어른으로서 먹고 살아야하니 어쩔수 없는 부분이다. 좀 어릴 때에는 내가 하는 과외가 결국 부자집 아이들을 떠받들어주고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 고착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닌가 심각하게 성찰할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억지로 다른 포인트에 집중하려고 한다. 어찌됐건 그 수업에서 몇명의 학생들에게 절묘하고 다채로운 내용을 잘 전달해주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내 수업은 어떤 내용일지 나도 궁금하다. 대입 논술을 공부하더라도 답 맞히기 게임보다는 삶과 가치, 예술에 대한 지독한 고민, 논리와 세계의 법칙들, 철학, 법학, 경제, 정치, 문화 등을 가지고 노는 다양한 방법들을 전수해주고 싶다. 그러한 소망마저 현실세계에 부딪치면 모조리 깨져버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에게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이 주어졌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논술 강사로서 가장 중요한 역량이 무엇인지 선배 강사인 후배에게 물어보니, 강의력도 필요하지만 컨텐츠, 예컨데 모의 문제를 제작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좋은 소식이다. 무릇 창작자는 끔찍한 고통과 극도의 쾌락을 오가며 산다. 내 머리속에서 내가 출산해낸 글과 작품들을 보며 느끼는 뿌듯함과 보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다. 다른 독자가 잘 봤다고 칭찬해주는 건 둘째 문제다(대부분 입에 발린 소리라는 걸 나도 안다). 나는 그 불규칙한 진자운동을 즐기는 편이다.

그리고 세상이 나를 돕기라도 하듯이 GPT, Claude, Deepseek, Gemini, Perplexity 등 엄청난 서비스들이 경쟁하며 발전하고 있다. 내 학생들이 얼마나 양질의 글을 읽고 똑똑해질 수 있을지 벌써 흥미진진하다. 조직에 매이지 않고 시간활용도 자유로운데다가 시급으로 쳐도 웬만한 전문직 소득도 부럽지 않은 정도라고 하니 나에게는 딱 맞는 일인 것같다. 기대했던만큼 성과가 안나와도 뭐 어쩔수 없다. 정말 목숨걸고 일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내 부업에 대한 고민은 귀여운 정도일 것이다.

사람의 천직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그리고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 세 가지 조건에 해당하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전통적인 산업사회였다면, 평생직업이 일반적인 세상이었다면, 좋은 타이밍에 좋은 기회가 굴러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마 이런 결심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역시 나는 운이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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