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니까 오히려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다: 내가 경로이탈을 결심한 이유
법조계에 오래된 속설 중에, "첫 직장이 평생 커리어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일반 직장인들에게도 통용된다고 하지만, 주로 변호사의 커리어처럼 동질성과 획일성이 높은 영역에서 이야기되는 것 같다. 그 말을 뒤집으면, 누군가의 미래를 알고 싶으면 첫 직장만 봐도 알 수 있다는 뜻일텐데, 학생들에게는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속설들은 진실인지 검증되지 않은 채, 수많은 로스쿨생들에게 경쟁심과 동기부여를 제공해 왔다. 사실 나는 첫 직장을 강조하는 관념과 분위기가 실제 적성을 찾는 과정에서 상당히 해롭다고 생각한다. 나도 로스쿨에 입학했을 때 주변의 친척, 지인들에게 예상 진로에 관해 많은 질문을 받았다. 내가 희망하는 공익인권, 혹은 노동 법률사무소의 계획을 얘기하면, '그래 좋아. 하지만 일단 첫 직장은 검클빅으로 시작해야 해. 그래야 나온 뒤에도 평생 인정받을 수 있거든'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영래, 이태영, 김선수, 황필규 변호사, 혹은 오바마 같은 사례를 조사해보니 생각보다 첫 직장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과연 첫 직장의 중요성이 그렇게 큰 것일까? 첫 직장을 잘 고르기 위해서 적성 찾기나 다양한 클럽활동, 자기계발의 기회를 포기하고 경쟁에 뛰어드는 게 좋은 선택일까? 어쩌면 가장 쓸모없는 걸 위해서 가장 소중한 걸 희생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아닐까? 나는 내가 롤모델로 생각하는 변호사들의 사례를 조사해 보기로 했다. 물론 사회가 선망하는 직장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친구들을 공격하려는 건 전혀 아니다. 그저 이 사회의 통념에 대해 반례들을 제시하고 나 역시 그런 반례가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나는 상당히 특이했던 2016년 8월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를 기억한다. 친구가 졸업한다고 해서 누가 연설하나 봤더니, 평생 한센병 치료와 인식 개선을 위해 헌신한 것으로 유명한 김인권 의사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그 연설의 제목은, "너무 좋은 직장을 찾지 마십시오"라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좋은 직장에 좋은 조건으로 팔려가기 위해 무한경쟁하는 요즘 대학에서, 좋은 직장을 찾지 말라는 말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선택을 위해 제가 선배로서, 사회의 경험자로 몇가지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너무 좋은 직장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생각하는 좋은 직장은 경쟁이 치열하고 상하 수직관계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어 여러분들의 존재감을 나타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또 조금의 실수도 포용하지 않고 서로 상대방의 단점을 부각하여 여러분들이 여간 강심장이 아니면 그 사회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또 살아남는다고 하여도 여러분의 감성은 아주 무뎌지고 말 것입니다. (중략) 직장을 선택하게 될 때 또는 무슨 일을 시작하게 될 때 여러 사람의 조언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이 이끄는대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의 결정에 후회가 없고 설령 후회가 된다고 하더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계속)
저는 첫 직장을 여수의 신풍리에 있는 한센병 환자와 소아마비 장애자들을 주로 치료하는 병원으로 정했습니다. 이곳은 제게 아무 지연과 혈연이 없는 곳입니다. 이곳에 있던 의사들 역시 저와 아무 학연도 없었습니다. 다만 이곳의 일이 제 마음에 들고 이곳에서 일을 하는 것이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후 큰 동요없이 34년간을 봉직하게 된 제일 큰 힘은 이 선택을 내 자신이 했고,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었습니다. 정년을 맞이했고 정년 후에도 계속 일해 달라고 부탁을 듣게 될 때 제가 바른 선택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작은 조직에 들어와 즐겁게 일을 했고 열심히 일을 했으며 그 결과 주위사람들이 이 사람이 이 조직에 아직도 꼭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졸업을 합니다. 인생의 긴 여정에서 보면 이제 인생의 첫걸음을 내 딛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부디 앞길을 잘 선택하시어 먼 훗날 인생을 마무리를 하게 될 때, 이 순간이 여러분의 행로에 후회가 없는 선택이 됐다고 자부할 수 있는 선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인권(의대 1975년 졸업), 제70회 학위수여식
여러분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으니까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뻔한 내용일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는 내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 세상이 좋다고 하는 직장에도 단점이 있고, 내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가기 위해 남들이 선망하는 직장으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소위 '좋은 직장'이 모두에게 좋은 게 아니고 무모한 도전처럼 보여도 그게 나에게는 가장 '좋은 직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로의존성이라는 말이 있다. 과거의 선택이나 관습으로 코스가 만들어지면, 그 길에서 이탈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들의 법률, 시스템에도 적용되지만 개인의 진로 선택에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A라는 영역에 들어가서 3년을 일했다고 하면, 나중에 B라는 영역으로 가고 싶어져도 A에 쏟아부은 시간과 비용이 아깝게 느껴질 것이다. A로 쭉 나아가면 더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데 굳이 문외한인 B로 가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게 5년 7년 길어지면 어느새 내가 가고 싶었던 영역과 내가 가고 있는 길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걸 발견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끝없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첫 직장이 중요하다는 격언은 매우 타당한 말일 수도 있다. 남들이 알아주고, 타이틀이 좋고 연봉을 많이 주는 곳에 가라는 게 아니다. 첫 직장이 정말 그렇게 중요하다면, 우리는 각자 적성과 자아실현을 위한 진로를 신중히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우리 법조계의 검클빅 선호 현상은, 마치 수능 점수에 맞춰 대학교에 지원하는 고3 학생들을 연상하게 한다. 각자 무슨 전공과 꿈이 있는지는 중요치 않고, 일단 첫 직장의 네임밸류를 챙기는 게 우선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나중에 무슨 분야로 개업을 하든, 일단 처음에는 검사, 로클럭, 빅펌의 이력을 가지고 있어야 유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말들을 믿지 않는다. 첫 직장부터 남들과 다른 도전을 해서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례들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반대로 주장하려 한다. 첫 직장은 정말 중요한 게 맞다. 당신이 원하는 분야도 잘 모르면서, 남들의 기준에 맞춰서, 여러 우연적인 요소들로 회사에서 권유하는 대로 첫 직장을 결정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결정이다. 물론 인생에서 우연이 선물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맡겨놓기에는 각자의 인생과 적성은 너무 소중하다. 다시 말해 첫 직장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길을 잘못 들었다면 다시 돌아오면 된다.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을 정한 이상 그게 첫 직장인 셈 치면 된다. 첫 직장이야말로 가장 젊을 때, 가장 여력이 있고 책임 질 것이 적을 때, 자기다운 선택과 도전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을 들여서 실패하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빨리 결정하고 빨리 실패해서 도전을 이어가는 게 유리하다고 말한다. Fail quick, fail cheap이라는 말도 있다. 죽지 않을 정도로, 회복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작게, 자주 실패하는 전략이 변화무쌍한 시대에서 가장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엄청나게 공을 들여서 딱 한 번의 시도에 올인한다고 해서 어차피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누구도 변화하는 세상에서 운과 타이밍을 미리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첫 직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리스크도 부담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길게 보면 가장 큰 리스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의 화려한 업적만을 기억하지만, 실제 조사해보니 첫 직장과 초기 경력부터 특이하고 도전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 선택은 극소수의 천재들만 할 수 있는 거라고? 과거라면 몰라도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점점 도전하기 쉬운 사회가 되고 있다. 인터넷과 핸드폰, 인공지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넘쳐난다. 아이디어와 추진력만 있다면 누구나 1인 기업을 세울 수 있다. 이제 버려야 할 건 '첫 직장의 연봉과 명성이 평생을 결정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뿐이다.
조영래 변호사의 첫 직장은 어디였을까? 어떤 자료에서는 김앤장이라고 한다. 그는 1971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71년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고, 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6년간 수배생활을 했다. 80년에서야 복권되어 1982년 연수원을 수료한 뒤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 매우 짧게 일했다. 어떤 자료에서는 설립 직후인 1973년 무렵에도 김앤장 창립자인 김영무 박사와의 인연으로 비공식 사무원으로 일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가장 유명한 인권변호사 조영래가 가장 큰 로펌(혹은 법률사무소)에 잠깐이지만 소속되었다는 게 참 신기해 보인다. 물론 조영래는 83년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를 만들어 공익, 인권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니, 사실상 첫 직장은 본인이 개업한 사무소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김앤장이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압도적인 위상을 가진 회사는 아니었다. 모 자료에 따르면 김앤장은 1982년에 15명의 변호사가 모인 중견 로펌(법무법인은 아니고 법률사무소)이었다고 하니까, 조영래와 김앤장이 각자의 길에서 확고한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은 신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법조계에서 김앤장으로 대표되는 로펌의 윤리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일단 넘어가자.
1983년 사무소를 개업한 조영래는 한국식 나이로 37세였다. 1990년에 사망하기까지 짧은 변호사 생활이었지만 굵직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1983년 전태일 평전이 처음 출판되었고 1984년 대규모 공해소송 '망원동 수해사건', 1986년 부천성고문사건, 여성조기정년제 사건, 1987년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지침 사건, 진폐증 사건을 담당했고, 1988년에는 민변의 창립과정에 기여했다. 조영래는 남들처럼 첫 직장을 번듯한 곳에서 가지려고 애쓰지 않았다. 누군가, The Best Way To Predict The Future Is To Create It 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조영래의 비전과 열정을 담을 수 있는 회사는 당시 한국에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의 '개업변' 성공신화는 맨땅에 헤딩하는 정신으로 도전하려는 사람에게 큰 용기를 준다.
이태영 변호사는 대한민국 최초 여성 변호사로서, 김병로의 추천을 받았지만 이승만이 여성 판사는 시기상조라고 임용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이태영은 195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고(39세) 곧바로 1952년 11월 황신덕, 박순천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을 설립한다. 첫 직장이라고 할 만한 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한 건 1956년이었는데, 별도의 큰 조직에 소속되지 않고 인권변호사로 경력을 시작한 것이다. 이태영 변호사가 판사에 임용되지 못한 것을 경력의 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당시 법원(혹은 대통령)의 보수성과 남성중심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흑역사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김선수 변호사(현 대법관)는 1985년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하고, 1988년에 연수원을 수료했다(28세). 당연히 판검빅 중 하나에서 경력을 시작했을까? 김선수는 앞서 조영래가 설립한 남대문법률사무소에 1988년 합류한다. 지금의 시선에서 보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너무 공부를 많이 해서 판단력이 흐려진 것일까? 그에 따르면 사법시험을 공부할 때부터 노동운동가 전태일에 관심이 있었고, 조영래라는 걸출한 인물을 보고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조영래의 사망 이후에도 김선수 변호사는 독보적인 능력을 발휘해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대한민국에서 첫 직장은 무조건 검클빅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널리 존경받는 김선수의 삶을 생각해보면 28세 청년의 과감한 선택은 가장 성공적인 투자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김선수는 작은 변호사 사무소를 선택했기 때문에 조영래를 이어 2세대를 대표하는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 기회는 공부를 잘 한다고, 좋은 회사와 조직에 들어가서 먼저 승진한다고 해서 누가 떠먹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분위기, 다수의 선망과 눈치를 신경쓰지 않고 주체적인 결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후 김진, 권두섭 변호사는 남대문법률사무소를 계승한 시민종합법률사무소를 첫 직장으로 선택해 합류했는데, 둘 다 최고의 노동법 권위자로 성장했고 특히 권 변호사님은 민주노총 법률원장으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인물들이 너무 옛날 얘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뿐이지 여러 영역에서 주체적인 판단으로 경력을 시작하고 이어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황필규 변호사는 2005년 연수원을 수료하고(38세), 2005년 곧바로 아름다운재단 상근법률지원팀 '공감'에 합류했다. 2003년 12월 신입 변호사 염형국, 소라미, 정정훈, 김영수가 모여 설립한 '공감'은, 황 변호사의 활약에 힘입어 이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익인권법재단으로 성장했다. 황필규 변호사는 대한변호사협회 국제인권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옥스퍼드대 이주정책사회센터 방문학자, 하버드 로스쿨 인권프로그램 방문펠로우로 활동하는 등 국제인권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공감에는 강은희 변호사님도 있다. 우리 로스쿨의 노동법학회장 출신이고, 10기 졸업생이라서 나와는 두 기수 차이가 난다. 직장갑질 119, 매일노동뉴스와 법률저널의 오피니언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데, 얼마 전 <공익과인권> 22호 출간기념회에서 만나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직장 내 젠더 폭력, 드라마 제작 현장의 노동 문제 등 폭넓은 영역을 다루면서, 우리 학교의 공익 인권 전통을 최전선에서 계승하는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강 변호사님 역시 로스쿨 졸업 후 바로 인권법재단 공감에 들어갔으니 첫 직장으로 독특한 진로를 고른 셈인데, 앞으로도 다양한 사례가 많이 나와서 검클빅 중심주의가 완화될 수 있다면 좋겠다.
전혀 다른 분야지만, 임현서 변호사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이면서다'라는 유튜브 운영자이자, 부동산 관련 스타트업을 경영하는 변호사님이다. 우리 학교의 경영학과 선배, 로스쿨 선배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우리 가족들이 임 변호사가 출연한 방송 <굿피플>을 재밌게 보고 그의 팬이 되었다는 것이다. 임 변호사님 역시 첫 직장을 소위 '검클빅'으로 가지 않고 스타트업이라는 독자적인 진로를 택했다. 원래 우리 가족들은 내 진로에 대해 걱정과 반대가 많은 편이었는데, 임현서 변호사님의 케이스 덕분에 가족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전형적인 진로가 아니더라도 임 변호사님처럼 성공적으로 길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 있다'라는 논리로 가족들을 안심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의 생각과 행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나 역시 그의 팬이다. 방송에 나오고 자기 삶을 공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그렇게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고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나처럼 멀리서 지켜보는 누군가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것 같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묘하게 친근감이 느껴진다. 사실 내가 1학년일 때 임 변호사님이 3학년이었는데, 학교 도서관 랜덤 배정에서 근처 자리에 배정되어서 가끔 마주친적이 있다. 늘 감사한 마음이 있었는데 이 기회에 브런치에 살짝 팬심과 내 생각을 풀어봤다.
오바마 변호사 이야기를 해보자. 버락 오바마는 하버드 로스쿨에서 로리뷰 편집장을 맡을 정도로 유능하고 탁월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91년 하버드 로스쿨 JD를 졸업하고 92년에 선택한 첫 직장(한국 나이로 32세)은 왁텔이나 크레바스, 설리번이 아니고, 이름도 생소한 "Miner, Barnhill, and Galland(이하 MBG)"였다. 그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 선출된 1996년까지 4년간 civil rights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현재도 마이너 반힐 갈랜드 홈페이지의 history에 오바마의 사진이 걸려 있다. 현재 이 로펌은 파트너 10명에 어쏘 7명이라고 하니까 상당히 작은 규모의 회사로 보인다. 하지만 공익, 인종, 공해 관련 소송에 강한 역량과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오바마의 첫 직장이었던 MBG를 설립한 Judson Miner 역시 로스쿨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recently having completed law school), 이 사무소를 열었다고 한다. 역시 개업에 성공하려면 반드시 근사한 곳에서 첫 직장을 마쳐야만 한다는 믿음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공식 사이트에 따르면, 이 로펌은 1971년에 설립되었는데, 로스쿨을 졸업한지 얼마 안 된 Miner(1968, 시카고 로스쿨 JD 졸업)와 Davis가 당시 소규모 로펌에서는 드물게 인종적 평등을 추구하고 민권 및 지역사회 개발 법률 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로펌을 설립하기로 결심하면서 문을 열었다. Miner는 post-law school clerkship(Simon Sobeloff)과 fellowship(Reginald Heber Smith)을 거치고 졸업 후 3년 만에 사무소를 연 것이다. 역시 초창기 변호사였던 Barnhill(1968, 미시건 로스쿨 JD 졸업)이 1972년에 합류했고, Galland(1973년, 시카고 로스쿨 JD 졸업)는 졸업 직후 1973년에 합류했다. 파트너들은 시카고의 미시간 애비뉴에서 몇 블록 떨어진, 당시에는 유행에 뒤떨어진 지역이었던 시카고의 14 W. Erie St.에 있는 방치된 타운하우스를 매입하여 새롭게 단장했다. 이 건물은 40년 동안 회사의 홈 오피스로 사용되었다. 수년에 걸쳐 MBG는 민권, 집단 소송 및 지역 사회 개발에 중점을 두었던 기존 업무에서 공해 및 독성 불법 행위, 사기 및 소비자 보호, 복잡한 상업 소송 및 비영리 법인을 위한 거래법 등 여러 다른 업무 영역으로 확장해 갔다.
아무튼 하버드의 우등생이었던 오바마는 아마도 훨씬 큰 규모의 회사에 갈 수도 있었을텐데, 왜 MBG에 간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무작정 소록도에 한센병 치료를 하러 간 김인권 선생처럼, 오바마도 자기 마음가는 대로 첫 직장을 고른 것은 아니었을까.
끝으로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다소 낮은 것 같지만 서굿 마샬 미연방대법관과 브라이언 스티븐슨 변호사(교수)의 사례도 있다. 서굿 마샬은 흑인 최초의 연방대법관으로서, 변호사 시절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 NAACP 활동 등에서 활약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Time이 선정한 20세기의 영향력 있는 인물 100에 법조계를 대표해 선정될 정도로 미국에선 유명하고 중요한 법조인이다. 1933년 하워드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서굿 마샬은 첫 해에 고향인 볼티모어에서 개인 사무소를 시작했고(한국식으로 치면 26세), 이듬해에 (훗날 위대한 업적을 이룰) NAACP에 합류했다고 한다. 지금 누가 보면 멋모르는 애송이의 객기라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브라이언 스티븐슨 변호사는 더 최근의 인권 변호사이자 탁월한 사회운동가인데, 1985년에 27세의 그는 하버드 로스쿨(JD)와 케네디스쿨(MPP)을 동시에 졸업한 이후 곧바로 비영리단체인 SCHR(남부인권센터)를 첫 직장으로 선택했다. 이쯤 되면 그렇게 뛰어난 사람들이 대체 왜 이런 충격적이고 비상식적인(?) 진로 선택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공부란 게 이렇게 위험하다!). 브라이언 스티븐슨은 1988년에 그가 설립한 EJI와 함께 수많은 사형수, 청소년, 인종차별 반대 등의 운동을 이끌었는데, 재심 등으로 사형을 면한 숫자가 누적 130여명을 넘을 정도로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최근에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저스트 머시>를 흥미롭게 보았는데, 변호사가 되자마자 곧바로 인종차별에 맞서려는 그의 열정과, 그런 아들을 말리고 안정적인 코스로 가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 절묘하게 묘사되고 있다. 성공을 어떻게 정의할지는 어려운 문제이지만, 어쨌든 성공하려면 첫 경력부터 전통적인 꽃길로 반드시 가야만 한다는 통념이야말로 뭘 좀 모르는 이들의 망상일지도 모른다.
내 첫 직장은 아마도 공익법무관이 될 것 같다. 내가 원해서 가는 건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일단 신검에서 1급을 받았으니 현행법 상 군대에 가야한다. 원래 나는 무하마드 알리, 요한 갈퉁, 조지 R.R. 마틴, 폴 코헨처럼 병역 거부를 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 군 인권이 처참한 이유는 과거의 선배들이 자기 권리를 충분히 주장하지 않고 그저 무사히 끝내자는 생각으로 순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군대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현재 한국의 현실이 징병이 정당화될 정도의 상황은 아니며, 징집에 응하는 건 다른 피해자들을 만들고 결국 동의 없이 인력을 착취하는 구조적 폭력에 기여하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감옥에 가거나 대체복무를 선택하면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지고 돈도 없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군대를 제대로 가지 않으면 사람 취급받기 어렵다는 가족의 호소를 무시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여전히 그런 취급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부끄럽게도 그냥 압력에 굴복하고 군대를 가기로 했다. 변호사 자격증이 있으면 그나마 3년간 민간인으로 정부 법무를 수행하면서 병역 의무를 간접적으로 마칠 수 있다. 징병제가 부당하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왕 법무관이 된 이상 내 재능을 활용해서 공익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군대를 제외하면 내 진짜 첫 직장은 어디가 될까? 검클빅이 아닐 건 분명해 보인다. 정말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현실적인 직장이 필요해진다면, 나중에라도 노력하면 기회는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단 나는 군대를 마치면 바로 사무소를 개업하고 싶다. 조영래의 남대문법률사무소, 시민법률상담소, 이태영의 가정법률상담소, 염형국, 황필규, 강은희의 공감, Judson Miner, 오바마의 MBG, 브라이언 스티븐슨의 EJI 같은 공동체를 만들고 이끌어보고 싶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상에 치이다가도 가끔가다 공익과 인권을 도모하는 그런 사무소라면 좋겠다. 물론 장애물에 부딪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타협하고 굴복해야 할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내 인생에서 첫 직장만큼은 참으며 일하는 곳보다는 즐겁고 설레게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좋겠다. (계속)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여서 두 길을 모두 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오래도록 서서 한 길이 덤불 사이로 굽어지는 곳까지
멀리, 저 멀리까지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길로 나아갔습니다. 똑같이 아름답지만
더 나은 길처럼 보였습니다.
풀이 무성하고 닳지 않은 길이니까요.
그 길도 걷다 보면
두 길은 똑같이 닳을 것입니다.
까맣게 디딘 자국 하나 없는 낙엽 아래로
두 길은 아침을 맞고 있었습니다.
아, 다른 길은 후일을 위해 남겨두었습니다!
길이란 길과 이어져 있다는 걸 알기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면서요.
나는 한숨을 쉬며 말하겠죠.
까마득한 예전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로 나아갔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