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와 베짱이라는 사기극: 성실, 인내에 잡아먹힌 개성

게으름을 찬양했더니 열정과 창의성, 흥미가 샘솟은 건에 대하여

한 남자가 있다. 자식도 형제도 없이 혼자 산다. 그러나 그는 쉬지도 않고 일만 하며 산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재산도 그의 눈에는 차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끔, "어찌하여 나는 즐기지도 못하고 사는가? 도대체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수고를 하는가?" 하고 말하니, 그의 수고도 헛되고, 부질없는 일이다.
- 솔로몬, 전도서 4장 8절 (구약성경), 새번역


어느 날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부모, 선생, 어른들은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개미처럼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한다"라는 조언을 한다. 그리고 "베짱이는 게으르고 놀기만 좋아하니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말한다. 아마 그 어른들도 어릴 때 비슷한 조언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실, 노력, 인내는 정말 좋은걸까? 어떤 고정관념들은 옛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할 뿐 현대 사회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탄수화물을 많이 먹고 체중을 늘리는 게 현대인의 건강 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개미의 삶은 21세기에 맞지 않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반면 베짱이는 자신의 가치관대로 인생을 즐기며 살아간다. 과장을 섞어 단언하자면, 당신이 행복하길 원한다면 개미처럼 살기보다는 베짱이처럼 살아야 한다. 한 가지 비밀을 말해주자면, "인간은 일하기보다 노는 걸 좋아한다." 너무 당연한 말인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일을 제쳐두고 노는 일에 몰두한 수많은 예술가, 작가, 철학자들의 유산을 향유하고 있다. 당시 가장 열심히 일했을 일꾼들의 이야기? 아무도 기억하지도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딱히 기록할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도 없다. 그냥 개미처럼 살다가 죽었을뿐. 삽질이나 망치질이나 타자기를 열심히 쳤겠지.(육체노동을 비하하려는 건 아니다) 인생의 아름다움과 즐거움, 짜릿함과 공포, 슬픔과 사랑은 대부분 베짱이에게서 나온다. 그렇지 않은가?


진로를 고민하는 이유?
성실, 노력, 인내, 복종, 협동은 개성과 열정, 흥미, 창의성, 혁신을 잡아먹는다

위 문단은 물론 지나친 비약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면서 우리는 진지하게 베짱이의 삶을 예찬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모두가 자기 직업이 대체되고 없어질 것을 걱정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할 일이 없어지는 건 매우 좋은 것 아닌가? 물론 개미도 베짱이도 생존하려면 먹을 음식과 잘 공간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직업이 없어질 게 아니고 돈이 없어질 걸 걱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을 노동 즉 신체를 팔아서 벌어야 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다. 대다수의 사람은 굶어죽고 싶지 않으니까 개미의 삶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치 베짱이의 여가와 문화생활이 나쁘고 개미의 인내와 금욕이 좋은 것처럼 포장한다. 그러한 세계관은 수많은 사람의 잠재력과 개성을 말살하고 더 나아가 공허하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인류 최고의 부자, 지식인이라는 솔로몬의 전도서를 상기시켜 보자. 성경에서도 바람을 잡으려 하기보다 적게 가지고 편안하라고 말하고 있다. 신 입장에서는 인간들이 돈을 쫓아서 개미처럼 뼈를 깎고 피를 토하며 노력 하는 모습이 우습거나 안쓰럽게 보이지는 않을까? 우주를 생각해보자. 우주 입장에서 인간은 인간이 개미 한마리를 보는 것보다 훨씬 하찮고 미미한 존재일 것이다.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과 미술과 이야기를 창조할 수 있는 천재적인 존재들이 돈을 좀 더 벌겠다고 애쓰는건 엄청난 자원 낭비일 지도 모른다.

전도서 4장 4절: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이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4:5 어리석은 사람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제 몸만 축낸다고 하지만,
4:6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많이 가지려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낫다.
-새번역 구약성경


최고의 천재 중 하나인 버트란드 러셀도 그렇게 말했다. 제목부터 압도적인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그는 '노예도덕'이라는 말까지 동원하며 기존의 세계관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우리 교과서에서 이 아름다운 글을 읽히지 않은 건 어쩌면 많은 예비 노예들이 해방선언을 할까봐 두려워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물질을 움직이는 노동은, 우리 존재에 어느 정도 필요하긴 하지만, 인간 삶의 목적 중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만약 삶의 목적이 일이라면, 우리는 모든 일꾼들이 셰익스피어보다 뛰어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이유로 오도(misled)되어 왔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만족시켜야 할 필요성이다. 수천 년 동안 부자들은 노동의 존엄성을 설파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품위를 잃지 않도록 일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보살폈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즐거움의 메커니즘으로서, 우리가 지구 표면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놀랍도록 영리한 '변화에 대한 기쁨'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동기부여는 실제 일꾼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중략) 그들은 일을 생계를 위한 필수적이고 불가피한 수단으로만 여기며, 때로 행복을 즐기더라도 그건 모두 여가(노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온 것들이다. - 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개미들은 또 속고 있다 [개또속]

역시 최고의 경제학자 케인즈는, 1930년 논문에서 100년 후인 2030년 쯤에는 주당 15시간의 노동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Three-hour shifts or a fifteen-hour week may put off the problem for a great while. For three hours a day is quite enough to satisfy the old Adam in most of us!) 이제 7년 남았다. 근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건가. 왜 우리는 이 모양인가? 나는 이 참사가 다 그놈의 <개미와 베짱이> 동화 때문이 아닐까 의심해본다. 아마 당신은 그 동화의 교훈이 성실, 노력, 인내하는 삶의 숭고함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동화는 개미가 아니라 베짱이가 지어낸 것이다. 베짱이는 다른 개미들을 부려먹고 더 즐겁게 문화생활을 하고자 그런 교묘한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다들 거기에 속아서 몸을 갈아넣는 동안 베짱이는 승승장구하며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 개미는 철저한 관료제 속에서 자기가 생산한 걸 상납하지만 그게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개미는 노예와 같은 상태이다. 흥미롭게도, <개미와 베짱이>를 포함한 이솝 우화를 만든 이솝(아이소포스, Aesop)은 그리스의 노예 출신이었다가 이야기를 잘 하는 재주로 자유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노예제가 실존하는 사회였고, 이 이야기의 저자는 우화 창작 능력으로 노예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개미와 베짱이를 모두 경험한 희한한 인물이다. 우린 이솝의 우화가 아니라 이솝의 실화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세상은 당신이 개미 일을 열심히 잘 한다고 베짱이를 시켜주지 않는다. 아마 승진하고 일만 더 받을 것이다. 바쁜 와중에 틈틈이 베짱이처럼 일을 딴짓을 하고 취향과 경험을 개발하고 문을 두드려야 비로소 베짱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눈 앞의 일부터 열심히 착실히 해야 한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천만의 말씀. 또 속고 있는게 아닌지 성찰해 봐야한다.


상상해보자. 이솝이 근무시간에 삽질을 하다가 개미와 베짱이를 보면서 흥미로운 상상을 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그 주변 동료들이나 감독관, 십장은 딴짓하지 말고 성실하게 인내하며 제대로된 일이나 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운영될 수 있었다는 말이 있다. 그런 세상에서 '개미와 베짱이'의 스토리는 사실상 모욕처럼 보인다. 불쌍한 노예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들의 삶이 언젠가 보답받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자식들에게 들려줬을 것이다. 물론 반대일 수도 있다. 정의로운 이솝은 노예제의 불합리한 현실에 분노했고, 이야기 속에서나마 베짱이가 몰락하고 개미가 승리하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그 주관적인 의도가 어떠했든, <개미와 베짱이>는 이후 자본가들에게 최고의 추천도서, 권장도서, 필독도서로 활용되어 온 것은 분명하다. 어린 아이들을 순종적이고 훌륭한 노동자로 무장시키기 위해 이만큼 확실한 도구가 있을까.

대부분의 우리 세대와 마찬가지로, 나는 '사탄은 늘 게으른 손이 할 수 있는 장난을 찾는다(즉, 손이 한가하면 나쁜 짓을 하게 된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나는 미덕 있는 아이였기 때문에, 내가 들은 모든 것을 믿었고, 지금껏 바쁘게 일하도록 유지해 준 '양심'을 습득했다. 내 양심이 내 행동을 통제해 왔지만, 곧 내 의견은 혁명적 전환을 경험했다. 난 이 세상에 너무 많은 일(노동)이 행해지고 있고, 일이 곧 미덕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엄청난 해악이 발생하며, 현대 산업 국가에서 설교되어야 할 내용은 항상 설교되어 온 것과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현대 사회의 개미 미덕들

링컨 같은 노예폐지론자가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났을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질문해보자. 과연 지금의 노동자들은 많이 다른걸까? 러셀은 현대의 노동자들도 노예상태(slavery)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근대 사회에서는 노동의 도덕과 기술의 진보 덕분에 노예 상태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자발적 노예라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이 사실을 스스로 숨기고 있다. 권력자들의 이익이 인류의 더 큰 공익과 동일하다고 노동자들이 믿도록 관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때때로 이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아테네의 노예 소유주들은 그들의 여가 시간을 이용해 문명에 대해 상당한 기여를 했는데, 이는 정의로운 경제 시스템 하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가는 문명에 필수적인 요소이며, 과거에는 소수를 위한 여가는 많은 사람들의 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노예들의 노동은 분명 기여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일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 덕분에 가능했던 여가가 가치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현대 기술은 여가가 소규모 특권 계층의 제한된 특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고르게 분배되는 권리가 될 수 있도록 했다. 노동의 도덕성은 노예의 도덕성이고, 현대 세계는 노예제도가 필요하지 않다.
-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파이팅해야지>이즘과 자본주의 정신

인간 문명 발전에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기여분이 없다는 러셀의 지적은 좀 과도해 보인다. 자본주의 탄생 이전에 노예제를 비롯한 여러 단계가 필요하다는 점은 아마도 칼 마르크스도 인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명을 경제적, 생산적 차원이 아닌 문화적, 학문적 차원에서 본다면 대부분의 성과가 여가에서 산출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지금 사회에서도 같은 의문을 던져볼 수 있다. 우리가 다같이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각자 여가를 즐기면서 행복과 예술을 향유한다면 그게 우리에게도 후손에게도 좋은 것 아닐까? 물론 그에 상응해서 소비도 줄고 생활이 불편하기도 하고 평균수명이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과로하면서 사는 삶이 그렇게 편리하고 즐거운 것 같지도 않다. 모든 인간이 자본 축적과 증대를 위해서 인생을 그렇게 '빡세게', '파이팅'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무슨 신의 부름을 받은 것도 아니고, 쇠사슬이나 채찍을 들고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자기 인생을 갈아넣는 것은 한 걸음만 떨어져서 봐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놈의 경쟁사회 속에 떨어지면 가상의 채찍과 불지옥이 뒤에서 쫓아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원래 자본주의 사회가 그걸 제일 잘한다.


147260_240_thumb.jpg 출처: 위키트리


한편 베짱이와 개미는 노예주-노예의 관계 뿐만 아니라, 식민제국-식민지, 선진국-개발도상국의 관계로 해석될 수도 있다. 문화제국주의, 세계체제론, 종속이론 등에서는 선진국이 고부가가치 산업을 독점하는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다. 개미들이 열심히 땀흘려서 돈을 벌고 베짱이들의 음악 영화 소설에 지불한다는 것이다.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많이 언급된다. 국제정치학에서 많이 반박된 관점이라고는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한때 '해리포터'의 관련 매출액이 한국의 반도체 수출 총액보다 많다는 기사가 나온 적 있다. (데이터가 정확히 분석된 것인지 잘 알지는 못하고, 시간이 지난 현재에는 판도가 많이 달라졌을 수 있다) J.K.롤링의 손끝에서 탄생한 소설이 영화 게임 음악 뮤지컬로 퍼져나가면서 엄청난 파급효과를 냈는데, 남들이 보면 베짱이에 불과하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위치를 생각하면 우리에게도 더 많은 베짱이들이 필요하다. (다음 글에 더 쓰겠지만 사실 베짱이들도 엄청나게 노력한다. 하지만 그 노력의 방향과 속성이 다르다.)




Boulanger_Gustave_Clarence_Rudolphe_The_Slave_Market.jpg?20110206180555 The Slave Market, Gustave Boulanger, 1886, oil on painting

<노예 시장>은 1882년에 프랑스의 '역사를 그리는 화가' 귀스타브 불랑제가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고대 로마의 노예 시장을 장면을 그린 역사적인 장르화다. 불랑제는 세세한 주의를 기울이고 역사적인 정확성에 중점을 둔 화가로 알려져 있으며, 이 그림을 통해 노예 무역의 가혹한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림에서 노예 상인(혹은 경매인)은 젊은 여성을 잠재적인 구매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중심에 있는 젊은 여성은 알몸으로, 그녀의 취약성과 대상화, 객체화, 물질화를 상징한다. 이는 노예 시장에서 개인이 어떻게 비인간화되고 상품화되는지를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도 인간을 수단화하는 모습은 결코 해결되지 않은 것 같다. 회사에 취업하지 못하면 인생이 망한다는 식의 위협 속에서 성적표와 지원서를 넣는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한 표정을 볼 수 있다. 강제 노동은 꼭 채찍과 쇠사슬을 통하지 않더라도, 칼로 협박하지 않더라도, 경제적 압박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과장된 말이 통용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돈이 칼만큼 강하고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진정 자유로운지 알기 위해서는 노동과 물질에서 얼마나 해방될 수 있는지 성찰하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이 그림은 노예가 겪어야 했던 비인간적인 대우와 기본 인간의 존엄성의 상실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정말 개인의 가치와 개인적인 자유를 중요시하는 걸까? 돈이 많으면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쩌면 이 그림의 노예 상인은 자기도 또 하나의 개미일 뿐이라고 합리화할 지도 모른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면 뭐든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돈의 노예인 것은 다르지 않다. 사실 이 그림에 베짱이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이 그림을 통해 노예제의 폭력적인 속성을 환기시키고 자본주의의 한계를 간접적으로 지적하려 한 예술가, 화가의 관점이야말로 가장 베짱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개미와 노예들은 자기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예술가를 보고 '땀 흘리지 않는 불한당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술가야말로 현실의 모순을 집요하게 드러내고 고차원적인 상상력으로 문명을 진보시키는 사람들이 아닐까. 이 대목에서 나는 봉준호의 기생충이 떠올랐다.


nighthawks.jpg 밤을 새는 사람들(Nighthawks), 에드워드 호퍼, 1942

'밤을 새는 사람들'은 1942년에 그려진 미국의 국민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은 늦은 밤 시내 식당에 모여 앉아 각자의 생각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대 도시의 소외와 복잡한 도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고독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사람들이 특별히 고통받거나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루종일 과로에 시달리고 잠깐의 자유시간을 허락받은 신종 노예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노동을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끊임없는 노동을 우선시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따르는 피로와 외로움에 대한 논평으로 볼 수 있다. 이 장면은 늦은 밤까지 야근을 하거나 스트레스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을 암시한다.


식당의 밝은 조명은 주변의 어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이는 늦은 시간에도 생산성과 주의력을 끊임없이 요구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식당 주인은 늦은 밤에도 쉬지 못한다. 좋아서 하는 일일까? 돈 때문에 하는 일일까? 중요한 건 그의 마음과 실존 속에 있다. 외부의 상황만으로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그림 속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서로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떨어져 있고 고립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모두가 자신의 업무와 책임에 집중하고 의미 있는 사회적 관계의 필요성을 소홀히 하는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는 정서적 단절과 고독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밤을 새는 사람들'는 실제로 노동과 피곤한 사회라는 주제를 잘 시각화하는 것 같다. 에드워드 호퍼는 우리에게 거울을 가져다 주고, "내가 있는 그대로 그려봤어. 너는 지금 네 삶과 사회에 만족하니?" 라고 묻는 것 같다.




개미들은 항의할 줄도 모른다

성실, 노력, 인내의 함정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지만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 다음 연재로 넘겨야 할 거 같다. 성실은 단순히 고되고 바쁘기 때문에만 나쁜 것은 아니고, 현실 체제에 순응하고 변화를 거부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악한 측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짧게 인용하고 다음 글로 넘기도록 하자. 인권변호사 조영래는 판사, 검사, 사법연수원생 등이 여론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법조인'으로 늘 선정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흥미롭게도 조영래 역시 '노예'와 '성실'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러셀의 에세이를 참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상통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현실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무모한 짓으로 되며, 따라서 자신에 대해서는 불성실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도덕으로까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비판정신의 싹을 자신의 의식 속에 싹트기도 전에 잘라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명령, 모든 가치관, 모든 선전을 무조건 받아들여 '순한 양'이 된다. 자기 머리로 생각할 줄 모르는 주체성을 빼앗긴 정신적 노예로서 길들여지는 것이다.
등 어루만지고 간 빼어먹는다는 말이 있다. 강한 자들은 이 길들여진 양들에게 '착실', '겸손', '온건', '성실', '적응성 있다' 하는 등의 온갖 아름다운 찬사를 퍼부으며 환영하고 칭찬하면서 최대한으로 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털을 뽑는다. 고통받는 인간은 한동안은 얼떨떨하여 그가 고통을 당하는지 털을 뽑히는지 모른다. 설사 어렴풋이 그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는 다만 생존하기 위하여 현실의 부당한 행태와 그로부터 오는 자신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만다. 때때로 무언가 '부당하다'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나, 역시 자신은 '무력'하며 그것은 시정될 길이 없으므로 그는 곧 머리를 흔들어 그런 건방진 생각을 털어버린다. 인내는 그의 영원한 금과옥조로 된다.
(중략) 우리 사회에서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일수록, "열심히 일해서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고."라는 식의 생각을 품기 쉽다.
-조영래, <전태일 평전>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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