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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주의, 시장 이데올로기와 민주주의를 가르다

다문화 현상과 급진적 인권 개념을 둘러싼 흥미로운 여정

(본 글은 인문학 전문학술 논문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I. 세계화와 다문화 현상의 부상

- “모두가 서로의 이웃이 된 시대,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


세계화(Globalization) 흐름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되면서, 여러 문화권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 한 사회 안에 함께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수많은 정치·문화적 갈등을 수반하며, 이런 갈등에 대응하려는 다양한 논의 역시 부상합니다.

저자는 우선, “기든스(Anthony Giddens)는 세계화를 서구 지배의 확산으로 보는 관점을 거부하면서, ‘세계화는 오히려 서구 지배의 쇠퇴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다문화주의와 급진적 인권, p.256)라는 문장을 인용하여 기든스의 주장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 해석만으로는 현실 세계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긴장과 대립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함께 제시됩니다. 실제로 “세계화 담론 속에서 타자의 문제가 더욱 첨예해졌다”(p.256)는 지적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죠.

결국 세계화는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인권 같은 서구적 제도가 비서구권에도 확산되는 흐름을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소수 집단이나 문화 간 갈등이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함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처럼 갈등의 현장에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가 하나의 해결 방안으로 제안되었습니다.


II. 다문화주의의 지형

- “캐나다 정책부터 테일러·킴리카 이론까지, 어떻게 전개되어 왔나?”


다문화주의란 “세계화에 따른 다문화 현상이 내포한 갈등과 긴장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문화적 다양성의 존중을 하나의 윤리적·정치적 원리로 제안하는 이론”이며, “1970년대 다민족 국가인 캐나다의 정책으로 제기된 이래 테일러와 킴리카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교화되었습니다”(p.257 참조).

(a) 정책 프로그램으로서의 다문화주의

캐나다는 소수 민족의 문화·정체성을 합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차별화된 시민권’을 도입했습니다. 이는 자치권(self-government rights), 다인종 권리(polyethnic rights), 특별대표권(special representation rights) 등으로 구체화되는데, “이런 차별화된 시민권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원리에 위배된다는 반대론에 부딪히기도 한다.”(p.259)라는 점이 흥미로운 쟁점입니다.

(b) 다문화주의의 철학적 기초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차이의 정치를 통해 이전까지 무시되었던 개별·집단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인정해야 한다”(p.260)는 견해를 펼치고, 윌 킴리카(Will Kymlicka)는 “소수 집단들이 자유주의적 원리들을 수용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다문화주의적 권리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p.261 참조).

하지만 테일러식 ‘공동체주의적 다문화주의’와 킴리카식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는 각각 문화 존중과 개인의 자유라는 상충된 가치를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 결과, “자발적 이민자들이 과연 이전 문화를 그대로 보호받을 자격이 있는지, 아니면 선택의 순간에 그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지”(p.264) 같은 난제들이 대두됩니다.


III. 후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 다문화주의

- “다국적 기업의 마케팅부터 노동 통제 수단까지, 문화가 소비된다!”


다문화주의가 자본주의 논리와 결합할 때, 본래 의도와 무관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합니다. 저자는 “다문화주의가 후기 자본주의의 시장 이데올로기와 노동 통제 전략으로 활용되기도 한다”(p.257)고 지적합니다.

예컨대 “다국적 기업들은 문화적 다양성을 마케팅 차원에서 ‘평화로운 지역 정체성’ 이미지를 강조하며 상품화한다.”(p.264)거나, 서로 다른 민족·언어권 노동자들을 교묘히 배분해 노동자들의 연대를 약화시키는 수단으로 삼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다문화주의를 전지구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이상적 형식”이라 칭하면서, “진정으로 공포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전지구적 자본의 보편성 아래 숨겨진 익명적 기계’이지, 어떤 특수한 문화의 힘이 아니다”(p.266)라고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IV. 다문화주의와 여성주의

- “소수 문화 보호 vs 여성 인권 보호, 어디서 충돌이 일어날까?”


특정 문화 자체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려는 다문화주의적 관점은, 문화 내부에서 발생하는 차별을 방치할 위험이 있습니다. 본 논문은 “이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여성주의의 비판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p.257)고 강조합니다.

일부다처제나 여성 음핵절개와 같은 전통적 풍습을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할 것인가?”(p.267)는 질문은 다문화주의의 딜레마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결국 개인 인권을 지키려면 보편적 기준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되지만, 그 보편성 자체가 서구·남성 중심으로 치우칠 수 있다는 비판 또한 존재합니다.

이렇듯 다문화주의와 여성주의는 “문화의 존중”과 “개인의 자유·평등”이라는 가치가 직접 충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려 깊은 결합이 필요합니다.


V. 다문화주의와 민주주의

- “인권 개념과 보편성은 어떻게 접합될까?”


다문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쟁점 중 하나는 ‘보편적 인권’ 문제입니다. 저자는 “다문화주의는 갈등과 투쟁의 모델과 열린 주체의 형성을 강조하는 개방적인 급진적 인권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적으로 보완될 수 있을 것”(p.257)이라고 제안합니다.

합의와 절차에 의존하는 전통적 자유주의 모델만으로는, 문화·성·인종에 대한 불평등을 실제로 시정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을 언급하더라도, “합리적 절차가 공적 영역에만 국한될 경우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은 여전히 은폐될 수 있다”(p.271)는 지적도 유효합니다.

결국 다문화주의가 민주주의 이념과 조화를 이루려면, 특정 문화가 안고 있는 내부 억압 구조까지 드러내고 비판할 수 있는 ‘개방적이고 급진적인 인권 개념’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VI. 급진적 인권 개념

- “갈등과 투쟁의 모델로 다문화주의 보완하기”


본 논문은 이러한 인권 개념을 단지 ‘합리적 합의’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의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p.274)고 강조합니다. 투쟁과 갈등의 과정을 통해서만 기존 질서가 바뀔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급진적 인권’이야말로 차별과 폭력을 적극적으로 철폐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는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것”이라는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개념을 참조하면서, “갈등이 반드시 적대적 파괴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 과정을 소거해 버리면 실제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한다”고 저자는 논평합니다(p.273). 결국 열린 주체들의 능동적·집단적 참여와 투쟁이 ‘형식적 합의’ 이상의 변화를 가능케 한다는 논리입니다.


VII. 열린 주체의 형성과 성찰적 공동체

- “민족·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까?”


이제 저자는 ‘열린 주체성’ 개념을 통해 다문화주의와 민주주의를 접합시키려 합니다. “‘주체 형성’이 합리적 토론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비인지적 정서·집단적 욕망·관습 등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p.275).

따라서 자율적 개인만이 아닌, “반인종주의적이고 성평등적인 집단적 정체성 형성을 목표로 하는 성찰적 공동체가 더욱 중요하다”(p.279)는 주장이 뚜렷해집니다. 이는 반드시 전통적 민족 공동체일 필요도 없고, 때로는 특정 국가·민족과 갈등을 일으키는 형태의 소모임이나 초국적 네트워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문화 공동체와, ‘이미 사회적으로만’ 구성된 근대적 관행 모두가 성찰 없이 폐쇄성을 강화한다면, 어느 쪽도 다문화주의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p.278)는 논의가 시사하듯, 열린 주체와 열린 공동체는 끊임없이 갈등을 드러내고 해결해 가면서 만들어진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본 글은 [진은, “다문화주의와 급진적 인권” 철학(제95집) pp.256-283 (2008), KCI 우수등재]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https://www.kci.go.kr/kciportal/po/search/poArtiTextSear.kci )


[독자의 평가와 일독을 권하는 이유]
이 글이 흥미로운 이유는, 다문화주의가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이라는 양극단 평가를 지양하고, 실제 정책과 철학, 자본주의와 여성주의를 아우르며 정교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급진적 인권 개념”을 통해 문화적 다양성의 문제를 정치적 투쟁 과정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추상적 이상만 남는 것이 아닌 실천의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갈등과 대립이 불가피한 현장에서 어떻게 문화·인권·민주주의가 실제로 결합할 수 있는지 고민해볼 수 있기에, 본 논문은 일독의 가치가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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