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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과 막스 셸러가 들려주는 “공감”의 비밀

인간의 본성인가, 혹은 철학적 환상인가?

(본 글은 인문학 전문학술 논문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I. 현대사회가 ‘공감’을 갈망하는 이유

- 세계적 위기와 갈등을 풀어낼 열쇠로서의 공감


최근 들어 ‘공감’이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여기저기서 부각되고 있습니다. 심각한 갈등이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연대하는 능력>인 공감이 인간 사회를 구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공감은 여전히 모호한 개념이며 그 이론적 규정이나 실천적 적용에 있어 해명해야만 하는 난제를 가지고 있다”(「공감과 공감의 윤리적 확장에 관하여」, p.197)는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합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인간의 공감능력이 무엇이기에 인류가 처한 다양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으로 설정될 수 있는가?”(같은 논문, p.197) 이 물음은 현대사회 곳곳에서 공감이 강조되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본 글에서는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현대적 공감 담론의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고, 공감론의 선구자로 불리는 흄(D. Hume)과 막스 셸러(M. Scheler)가 어떤 관점을 펼쳤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II. 거울 뉴런과 ‘공감의 시대’

- “본성으로서의 공감”을 강조하는 신경생리학과 진화생물학


원문은 “심리학, 신경생물학, 진화생물학, 뇌과학 등을 비롯한 경험과학들은 물론이고 사회학, 철학 등 인문학을 논거로 삼아 인류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전망한다”(p.198)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대표적인 사례가 1996년에 발견된 ‘거울뉴런(mirror neuron)’입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1996년 ‘거울뉴런’의 발견입니다. 거울뉴런은 인간이 타인의 행위와 감정에 대해 동일한 반응을 하는 뇌의 신경세포를 일컫습니다”(같은 논문, p.200). 이 발견으로부터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끼고 모방할 수 있다는 실험적 증거가 제시되었습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인간은 오랜 진화 과정에서 서로 협력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기에, 결국 공감 능력을 발전시켜 온 존재”라는 주장을 폅니다.

문제는 이렇게 공감이 ‘본성’으로 규정되더라도, 왜 현실에서는 공감의 부재나 왜곡이 빈번하게 발견되는가입니다. 이는 곧 <공감이 작동되지 않는 환경이나 구조>를 어떻게 이해하고 개선하느냐의 과제로 이어지는데, 원문은 이 점을 뒤에서 다시 비판적으로 검토합니다.


III. ‘공감’이란 무엇인가?

- 감정전염, 감정이입, 동정, 그리고 공감의 경계들


공감 담론에서는 ‘동정(sympathy)’, ‘감정이입(empathy)’, ‘감정전염(Ansteckung)’이 종종 혼용되지만, 실제로 이들은 세부적으로 구분됩니다. 예컨대 막스 셸러가 강조하듯, “감정전염이든 감정이입이든 그 상태에선 윤리적인 삶을 위한 참된 이해나 배려가 불가능합니다”(같은 논문, p.208). 특정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타인 감정에 휩쓸리는 것은 일시적인 모방 현상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감을 보다 윤리학적으로 정립하려면, 감정의 종류와 생성 과정을 더 면밀히 구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원문은 흄과 셸러의 논의를 차례로 검토합니다.


IV. 흄(D. Hume)의 공감론

- “인간의 본성에는 타인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흄은 저 유명한 『인간 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에서, 이성이 아니라 공감(sympathy)이야말로 인간의 윤리적 관계를 가능케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는 타인의 경향과 감정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 있습니다”(David Hume (1978), p.316)라고 못박고, “이 모든 것은 가장 분명한 경험적 사실이며 철학의 어떤 가설에도 좌우되지 않습니다”(같은 책, p.319-320)라고 말합니다.

다만 흄에게 이 공감은 무조건적·보편적이라기보다는, “유사성(resemblance)”과 “상상력”을 매개로 형성됩니다(같은 책, p.318). 인간은 기본적인 신체적·정신적 구조가 유사하므로, 타인이 겪는 상황을 떠올리면 비슷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흄의 구도입니다. 이를 통해 “도덕의 일차적 기준은 ‘만족’과 ‘불만족’이라는 감정”(같은 책, p.471)이라는 전제 위에서, 공감이 윤리적 판단의 뿌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공감이 가족·친구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강하게 작동한다면, 사회 전체적으로 윤리적 관계를 확장하기 쉽지 않습니다. 흄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일반적 관점(general point of view)”(같은 책, p.591)과 같은 방안을 언급하지만, 결국 상황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 공감의 범주가 달라질 수 있다는 한계를 명확히 극복하지는 못합니다.


V. 막스 셸러(M. Scheler)의 공감론

- 타자의 삶 자체로 들어가려는 노력, “뒤따라 느낌(Nachgefühl)”


막스 셸러는 공감을 흄보다 훨씬 정교하게 분류하려 시도합니다. 그는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Wesen und Formen der Sympathie)』에서, “단순한 뒤따라 느낌만으로는 고통에 대한 진정한 연대가 어렵습니다”(같은 논문, p.209)고 말하며, 감정전염이나 감정이입은 모두 <무의식적 모방>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그 대신 셸러는 “진정한 공감은 타인에게 무의식적으로 나를 동일시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체험 속으로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것”(같은 논문, p.210)이라 정의합니다. 이때 인간에게는 “공감의 원천적인 토대가 이미 존재합니다. 인간의 표현 형식들은 어떤 보편적인 문법을 가지며, 우리는 이를 통해 타인을 직접 지각할 수 있습니다”(같은 논문, p.211)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런 진정한 공감이 가능하려면, 인간이 “정신(Geist)과 사랑(Liebe)을 통해 생물학적·사회적 제약을 넘어 더 높은 가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라는 셸러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같은 논문, pp.212-214). 이 지점에서 셸러의 공감론은 보편적 윤리를 정초하려는 의욕은 강하지만, 경험적으로 증명하기 난해한 종교적·형이상학적 요소를 상당 부분 포함하게 됩니다.


VI. 공감은 정말 윤리의 열쇠인가?

- 감정의 공유만으로 선(善)이 보장될 수 있을까


타인과 함께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으로 ‘도덕적으로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에서는 “공감은 타자의 감정을 함께 느끼거나 이해하는 능력일 뿐 그 자체로 타인에 대한 실질적 배려나 행동을 보장하진 않습니다”(같은 논문, p.219 참고)라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고통을 그대로 공감하면서도, 이를 악의적 쾌감으로 변질시키는 ‘잔인한 공감’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공감이 가족으로 상징되는 한정된 세계에만 머물 때, 타인에 대한 폭력과 배제는 되려 심화될 수도 있습니다”(같은 논문, p.221)는 언급도 흥미롭습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집단 이기주의적 공감’을 떠올리게 합니다. 결국 공감은 매우 중요한 토대이지만, 사회적 관계나 문화적 요인이 함께 고려되지 않으면 윤리성으로 온전히 이어지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VII. 공감을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

- 경험과학과 형이상학을 넘어, 사회구조적 관점을 고민해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공감이 폭넓은 윤리적 관점으로 확대될 수 있을까요? 원문은 “공감의 한계를 넘어서려면 공감이 작동하지 않는 관계망과 구조를 밝히는 것이 우선입니다”(같은 논문, p.215)라고 제안합니다. 즉, 생물학적으로 ‘공감 유전자’를 타고났다거나, 형이상학적으로 ‘사랑의 힘’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립이나 불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감 담론이 진정으로 실효성을 발휘하려면, 왜 공감이 특정 환경에서 왜곡되고 작동하지 않는지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제도나 문화적 영역에서 재편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합니다. 공감과 인간의 본성만 찬양하는 태도는 오히려 “공감은 결국, 인간이 주어진 현실에서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가치화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같은 논문, p.222)는 통찰을 흐릿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VIII. 마무리: 새로운 공감 담론을 위한 길

- “상상력과 이해”를 넘어 실제적 변화로 나아가려면


결국, 공감은 <인간이 간주관적인 존재>임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지만, 그 자체만으로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공감은 모호하고, 다양한 학문과 영역에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정의합니다”는 점(같은 논문, p.197)에서 드러나듯, 공감론은 한편으로는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늘 논쟁과 난제를 동반합니다. 이는 흄이 말한 ‘경험적 공감’이나 셸러의 ‘보편적 공감’ 모두에서 드러납니다. 공감의 자연발생적 한계를 뛰어넘는 원리나 형이상학적 토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공감이 어떤 사회·문화적 조건에서 어떻게 “변형”되거나 “조작”될 수 있는가까지 주목해야 우리의 감정 공유가 실제로 윤리적 진전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본 글은 [소병일, "공감과 공감의 윤리적 확장에 관하여 ― 흄과 막스 셸러를 중심으로 ―" 『철학』 제118집, pp.197-225 (2014), KCI 우수등재]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https://www.kci.go.kr/kciportal/po/search/poArtiTextSear.kci )


[독자의 평가와 일독을 권하는 이유]

공감 개념은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나가려는 열망이 짙게 깔린 주제입니다. 흄과 막스 셸러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공감이 <단순히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수준을 넘어, 인간다움과 윤리의 기초를 견인할 수 있는 잠재력>을 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들이 보여준 난제를 통해, 공감이 우리가 한 번쯤 성찰해야 할 복잡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화두임을 깨닫게 됩니다. 본 논문은 현대사회가 막연히 떠받드는 ‘공감’이라는 말을 심도 있게 되짚음으로써, 그 개념이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넓은 시각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읽어볼 가치가 큽니다. 혹시 공감이 너무 ‘당연하고 평범한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 글에서 다뤄지는 다양한 비판과 문제의식을 통해 공감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질문해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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