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학과 고대·현대 사상을 아우르는 분노의 다층적 분석
(본 글은 인문학 전문학술 논문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분노는 “광기에 사로잡혀 잔인하게 살인과 폭력을 저지르는 범죄의 원인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의한 것에 대한 의분으로 정의를 향한 가치 있고 숭고한 감정”이라는 이중적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실제로 “분노는 광기에 사로잡혀 잔인하게 살인과 폭력을 저지르는 범죄의 원인이기도 하다.”(본문 p.165)라는 말처럼, 극단적 상황에서 분노가 범죄를 유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현대 법은 행위에 대한 원인으로서의 감정을 고의와 과실 판단, 그리고 형량의 결정과 연결시키는데”(본문 p.165)서 보듯, 분노가 때로는 중요한 법적 쟁점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간통 현장을 목격한 남편이 격정적 분노로 인해 상간자를 살해했다면, 법적으로도 이를 어떻게 처벌해야 할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합니다.
본 논문(이하 ‘본 논문’이라 칭함)은 이처럼 인간의 강렬한 감정 중 하나인 ‘분노’를,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고대 법정 연설가 뤼시아스, 나아가 현대 사상가인 마샤 누스바움의 이론을 중심으로 폭넓게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단순히 분노를 윤리적·심리적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 분노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 혹은 법적·제도적으로 분노와 폭력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깊이 살피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감정을 행위의 충동(horma)으로 보았다.”(본문 p.168)고 하며, 분노(pathos)는 수동적인 경험인 동시에 인간 행동을 이끄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플라톤은 『국가』 4권에서 영혼을 이성(logos), 기개(thumos), 욕구(epithumētikon)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여기서 기개에 해당하는 분노를 “이성의 통제 하에 놓이면 용기라는 덕을 낳는 감정”(본문 p.165)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컨대 플라톤은 『법률』 9권에서 고의와 과실을 구분하며, “격정(thumos)을 자제하지 못하여 계획 없이 저지른 살인과, 특정한 목적을 갖고 수행한 계획적 살인을 법적으로 동일하게 다룰 수 없다”고 말합니다(본문 p.171). 이를 통해 분노가 폭력적 범행의 직접적 원인일 수 있지만, 동시에 상황과 동기를 고려해 다른 법적 평가를 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한편 플라톤은 “부당함으로부터 자신의 자존감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분노가 동원되는 경우도 있다”(본문 p.170–172)는 점을 들어, 분노가 욕구와 다르지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제대로 된 교육과 훈련을 통해 분노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이성’의 역할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핵심적 입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사상을 계승·발전하면서도, 분노를 더욱 분명하게 정의합니다. 그는 『수사학』에서 “분노란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가 이유 없이 멸시나 모욕을 당했다고 인지했을 때, 복수하려는 고통 섞인 욕구가 뒤따르는 감정”이라고 규정합니다(본문 p.169). 그리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분노는 마땅히 분노해야 할 대상과 때, 방식으로 표출될 때 덕으로 연결된다”라는 핵심 주장을 펼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분노는 본성상 폭발적이며 공격적이기 쉽지만, “마땅한 때 분노하지 않는 것은 노예적 태도로 비난받는다”(본문 p.165)고 합니다. 정의롭게 자신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때론 분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과도한 분노는 광기로 흐르므로, 이는 ‘중용(中庸)’의 덕을 통해 통제되어야만 합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가, 언제, 어느 정도로 분노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지혜(phronēsis)’가 중요하다고 말한다.”(본문 p.169) 분노는 부당한 대우에 맞서는 정의 실현의 동력일 수 있으나, 분노가 지닌 복수심이 지나치면 되려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균형을 찾는 일이 윤리학과 법학 모두의 과제가 됩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간통이 단순히 개인적 문제를 넘어 국가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로 간주되었습니다. 특히 간통 현장에서 벌어진 살인은 예외적으로 정당화될 여지가 있었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뤼시아스의 『에라토스테네스 살인 변론』입니다(본문 p.168–169).
이 변론문에서 “남편이 아내의 간통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격정적 분노에 휩싸여 상간자를 살해했다면, 이는 ‘계획된 살인’이 아니라 ‘정당한 분노’에 의한 행위”라는 논리가 전개됩니다. 뤼시아스는 “간통이야말로 성적 범죄 중에서도 가장 극악무도한 행위이며, 이는 사회 전체를 잠식하는 심각한 위협이기 때문에 국가의 법이 오히려 이를 처벌하지 않고서는 정의를 세울 수 없다”라고 주장합니다(본문 p.169).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간통 살인이 무조건 정당방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해당 사건에서 뤼시아스는, 남편이 우발적으로 행위를 저질렀음을 부각하기 위해 ‘분노’를 중요한 키워드로 삼았습니다. “뤼시아스는 ‘이는 실질적 살인이 아니라, 공동체 법에 따른 행위’라고 강조하며 도시의 정의를 위해서였음을 변론”(본문 p.169)한 것입니다. 이 사례는, 분노가 법정에서 어떤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를 생생히 보여 줍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간통죄가 존재했지만, 2015년 헌법재판소는 “비도덕적 행위라도 본질적으로 개인의 사생활에 속하며, 사회적 해악이 크지 않다면 국가권력이 형벌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다수 의견을 들어 간통죄를 위헌으로 판단했습니다. “간통을 국가가 형사처벌하는 것이 더 이상 정당성이 없으며, 혼인과 가정의 보호는 형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입니다(본문 p.177–178).
이는 고대 아테네의 시각과 크게 대조됩니다. 뤼시아스가 보았던 간통은 국가 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였고, 그 때문에 간통과 분노가 만나 살인이 벌어져도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었지만, 현대 사회에선 간통을 형사처벌할 만한 사회적 합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변화입니다.
“누스바움은 고대 철학자들의 분노론을 모두 검토하면서 보다 발전적으로 ‘분노’에 관해 분석하려고 시도한다”(본문 p.165–166)고 평가됩니다. 그녀가 특히 주목하는 점은, 분노가 기본적으로 ‘응보’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자신의 모욕을 되갚아 주려는 고통의 욕구이자, 관습적으로 결정된다’는 견해에 의한다면, 아내와 간통한 상간남을 살해한 남편의 행위도 ‘격정적 분노’에 의한 복수로 간주되어 감형 사유가 될 수 있다”(본문 p.166)는 것이지요.
그러나 누스바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분노를 미래지향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특정억제, 무력화, 일반억제(중요한 가치의 공개적 표현을 통한 억제 포함), 그리고 가해자 O에 대한 추가적 조치, 교육제도 마련, 빈곤 완화 등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범죄를 사전에 억제”(본문 p.167)하는 방식입니다. 법이 단순히 ‘분노 표출에 대한 처벌’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적·제도적 환경을 개선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지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뤼시아스, 그리고 누스바움으로 이어지는 분노론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뉩니다. 첫째,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전면적 부정, 즉 “분노는 영혼의 질병이므로 제거해야 한다”(본문 p.165–166)는 시각입니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중용론으로, 부당함에 맞서기 위한 ‘적절한 분노’는 정의와 용기를 지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마지막으로 누스바움이 제기하는 미래지향적 관점, 즉 처벌과 복수를 넘어서는 사회·제도적 해결책입니다.
“법적·윤리적 차원에서 분노를 검토하는 것은, 중용 개념과 더불어 불의에 맞서는 인간의 자연적 감정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해 준다.”(본문 p.175–176) 또한 간통과 같은 구체적 사례를 통해, 분노가 어떤 방식으로 범죄와 결합하고 또 어떻게 정당화 혹은 부정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분노는 부당함에 맞선 “의분(義憤)”의 형태로 나타나 긍정적 에너지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폭력적 결과를 초래하는 파괴적 힘이 되기도 합니다. “분노는 용기로 이어져 정의를 실현할 수도 있지만, 잘못 다루면 오히려 공동체의 붕괴나 극단적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본문 p.170)
문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분노가 표출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천양지차라는 것입니다. 분노가 생기는 상황과 배경을 미리 파악하고 구조적 문제를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누스바움의 견해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법적 처벌과 응보만으로는 분노가 낳는 모든 문제를 막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결국 “분노라는 인간적 감정을 법철학적으로 바라볼 때, 그 목적은 단순히 처벌과 보복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은 미래사회를 향해 제도와 교육을 설계하는 데 있다”(본문 p.167–168)는 점을 본 논문은 역설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의 균형감각, 누스바움이 제안하는 통합적 예방책 모두가 “바람직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분노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동일한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분노론은 단순히 "화를 잘 다스리는 방법"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사상가들이 어떻게 인간 사회의 정의와 질서를 고민해 왔는지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본 논문에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뤼시아스, 그리고 누스바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이 충돌·보완되는 과정을 밀도 있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언제 폭력으로 이어지고 언제 정당한 저항이 되는지, 그리고 공동체가 이를 어떻게 제도적으로 관리하는지 이해하고 싶은 독자라면 이 글이 충분히 사유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또한 분노라는 감정을 “처벌”이 아닌 “예방과 개선”의 관점에서 다루는 누스바움의 통찰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여러 갈등과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구체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해 줍니다.
(본 글은 [장미성·윤진숙, "‘분노하는 인간’(Homo Iracundos)에 대한 법철학적 대응―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뤼시아스, 누스바움을 중심으로―" <법철학연구> 제25권 제2호, pp.165~192 (2022), KCI 등재]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저자와 출판연도는 정확히 기재해야 합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https://www.kci.go.kr/kciportal/po/search/poArtiTextSear.kc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