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도덕시간에 공리주의라는 것을 배운적이 있다. 공리주의를 대표하는 말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란 것이 있는데, 개인의 행복과 집단의 행복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한 것이 더 좋은 것이란 전제를 깔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 철학시간에 공리주의를 배우며 크게 동의한 적이 있는데, 소수의 욕망보다는 다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이 사회를 바람직하게 만들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철학시간 벤담의 공리주의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던 나는 20년이 지난 지금, 과연 벤담이 말하고자 했던 공리주의가, 설마 제외되었던 소수를 희생시키며 다수를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었길 바라고 있다.
추석이란 것은 며느리이자 딸인 당신의 희생으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실현되는 구조이다. 그러니까 며느리인 당신만 희생하면 모두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 흔히 모두에게 <좋은게 좋은거 잖아>가 되는 것이다. 물론 너 빼고.
당신의 남편은 남들이 하는 것처럼 당신이 추석에 시댁에 와서 음식을 하고 부모님의 비위를 맞춰주며 살갑게 굴면 세상이 편안해진다. 한 가정을 이룬 떳떳한 가장이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당신의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잡일을 도맡아 하면 편히 쉴 수 있고 어른 행세를 할 수 있어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든다. 아들 키워 장가보낸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당신의 시누이나 시숙은 오빠나 형,동생의 부인이 찍소리 없이 와서 일을 하고 본인이 밥 먹을 때 설겆이를 하기에 편하다. 호칭도 '아가씨' 혹은' 도련님'이라 듣기 나쁘지 않다.
당신의 동서들은 일손을 나눌 사람이 한명 더 와서 좋다. 같이 하소연이라도 하면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는 기분이다.
당신의 아들 딸들은 엄마인 당신이 차려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 좋고, 싸움같은 건 볼 필요없이 집안 어른들에게 예쁨을 받다 오면 된다. 용돈이라도 받으면 기분은 더 좋아진다.
심지어 당신의 부모조차 딸인 당신이 시댁에서 그런일을 하는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딸의 성실하고 모범적인 행동에 자식 잘 키웠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행여 당신의 딸이 그곳에서 인권과 권리를 주장하며 맞서싸우고자 한다면 사돈들 볼 낯이 없다며 걱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당신만 침묵하면 된다.너만 입다물고 참는다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실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은
모두가 행복해진다고 나의 행복은 희생되어도 되는가?
단언컨데 나는 그 의문에
'아니다. 당신의 행복 역시 다수의 행복과 동등한 가치로 중요하다.'
라고 답해주고 싶다.
지난 설날 이후로도 나는 시어머니와 몇번을 더 만나 설전을 벌였고, 한번은 시어머니가 분에 못 이겨 병원에서 링거를 맞았다. 물론 시어머니 건강에 큰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 모든 사람이 나를 비난했다. 공리주의의 원칙에 위배되는 행동으로 '나. 딸이자 며느리'가 희생당하지 않아 모두가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 나를 제외한 모두가 싫었다. 그래서 그들을 똘똘 뭉쳐서 나를 공격했고, 저 위에 언급된 사람 중 단 한명도 내 편은 없었다.
집단은 개인에게 잔인하게 군다. 그들이 옳다고 믿는 것에 도전하는 나약한 개인에게 한없이 난폭해지고 악랄해진다. 그들은 내 행동과 나의 삶을 모두 비난하여 자존감을 깍아내렸고,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한다며 가스라이팅하려 했다.
만약 당신이 명절에 시댁을 상대로 싸우고자 한다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모두의 공격대상이 되어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결과가 좋을지 안 좋을지도 장담하지 못하겠다. 당신을 제외한 모두가 집단이 되어 비난하는, 그리고 비난받는 과정은 참으로 지난하다.
당신이 싸움을 벌일지 안 벌일지
당신이 그 싸움에 승리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을지 못 얻을지
당신이 상처를 입고 쓰러질지 혹은 굳건히 일어설지
나는 아무것도 장담해 주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주장하고 싶은 단 하나는